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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결국은 가지게 될 거야 (129/153)


129. 결국은 가지게 될 거야
2022.10.27.


리시스는 세니아를 내버려두고 창문으로 달려갔다.

저 먼 곳에서 흙먼지를 풍기며 말 탄 무리가 달려왔다.

리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예상보다 많네.”

“그새 본국에서 추가인원을 불러들였나 봅니다.”

곁에 다가온 렉싱턴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리시스가 대동한 인원은 저보다는 훨씬 적었다. 작전 인원이라 굳이 많을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건 익숙한 키에르트를 상대할 때의 이야기다.

실전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알헨크와 모의전투도 해 보았고, 성격과 지금까지 썼던 작전들을 취합해 감은 잡았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또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더구나 인원수에서 꽤 큰 차이가 났을 때는 소수 인원인 쪽이 움직이는 것에 더 신중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쩌나 일단 보지.”

리시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가까워지는 알헨크 군을 지켜보았다.

이미 한차례 난장판을 만들어 놓은 뒤다. 또 다시 찾아와 무슨 짓을 하려는 심산일까.

알헨크 군은 성벽 가까이 다가오더니 진군을 멈췄다.

뭔가 수작을 부리듯 저들끼리 뭉치더니, 무리 중에서 한 명이 튀어나와 앞에 섰다.

알헨크였다.


“리시스가 왔나? 리시스!”

알헨크의 목소리가 성벽을 넘어 쩌렁쩌렁 울렸다.

꽤 신이 난 목소리였다.

반대로 리시스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저게 감히 황후 폐하의 존함을……!”

“당장 나가게 해 주십시오.”

리시스만큼이나 미하엘과 렉싱턴의 분노도 순식간에 치고 올랐다.

하지만 알헨크의 저 경박한 부름은 도발조차 아니었다.

리시스는 당장 본인이 칼 들고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을 누르며 두 사람에게도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온 것 알고 있어. 기왕 왔으면 얼굴이라도 보여주지?”

알헨크는 옆집 친구네 집에 말하듯 정답게 외쳤다. 공격을 할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도 어이없는 인간이었지만 여전했다.

리시스는 주거공간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쪽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가는 동안 만난 렌데일 병사들은 알헨크의 등장만으로도 공황상태였다.


“히익! 어, 어떡하지!”

“도, 도망가야 하나……!”

“성 밖에 버티고 있는데 어, 어디로!”

“으아아, 으아아!”

이들의 행색이나 몸을 보았을 때 꽤 훈련이 된 병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저렇게 파랗게 질릴 정도다. 알헨크 군의 손속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진정들 해!”

보다 못한 리시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늘고 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밴 무게는 상당했다.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렌데일 병사들이 흠칫 정신을 차렸다.


“공격하러 온 게 아니다. 정신들 차리고, 차라리 귀나 막고 있어.”

알헨크의 공격 특성상, 칠 거였으면 말도 없이 쓸고 들어왔을 것이다. 어차피 성벽을 지키는 인원도 궤멸한 수준이니 조심스러워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알헨크는 보란 듯 성벽 밖에서 멈춰서서 리시스를 불렀다.

공격이 아니라 수작질이 목적이었다.


“리시스! 역시 날 보러 와 줬군.”

 

 
알헨크는 리시스가 성벽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만족스럽게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맨 앞에 나와 있지만 저 거리는 화살의 사정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곳이다.

리시스는 차게 콧방귀를 뀌었다. 반갑긴, 개뿔.


“감히 쉬란의 땅에 군사를 끌고 들어와 할 말인가?”

“군사라니? 이건 내 호위들인데.”

사실 명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국가 간의 명분이 오가는 전쟁이 아니다.

로구안의 왕자이지만 알헨크 개인과 그 호위의 독단행동. 그리고 쉬란의 황후지만 리시스 개인과 그 ‘추종자’들이라고 우길 수 있었다.


“그 호위들이 민가를 약탈하고 영주성마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면, 주인이 책임을 져야지?”

리시스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오해가 있던 모양인데, 나는 ‘친구’를 도왔을 뿐이야.”

“‘친구.’, 누구?”

“세니아라고, 거기 있을 텐데.”

“그 친구를 어떻게 도왔을까?”

“친구의 아버지가 친구를 팔아넘기려고 들어서 부녀간에 싸움이 났던 모양이야. 친구가 너무 딱하지 않아? 그래서 억지로 끌고 가지 못하게 막아줬을 뿐이지.”

핑계가 대단했다.

하지만 실상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리시스는 그저 실소했다.

자신들의 파멸로 이어질 줄 모르고 일을 친 것은 렌데일 공작가였다.


“그렇게 한 번 도와줬으면 되었지, 왜 또 찾아왔을까?”

“아무리 친구여도 도와준 값은 받아야 하잖아?”

“친구니까 공짜로 해줘.”

“그건 안 되지. 아무리 친구라도 받을 걸 못 받으면 친구라도 데려다 팔아야 하지 않겠어?”

상식이 없는 계산법이었다.

물론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는 것이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그것을 저렇게 뻔뻔하고 당당하게 읊어댄다는 것 자체가 리시스로서는 기가 막혀 머리가 다 띵했다.

렌데일 공작가가 알헨크와 손을 잡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세니아가 알헨크와 친구일 리는 절대 없었다.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황후 폐하, 아닙니다!”

어느샌가 따라나온 세니아가 네 발로 기며 울부짖었다.

렌데일 공작과 알헨크 사이에 오갔던 모종의 계약. 렌데일 공작 본인은 죽어버렸다. 하지만 계약은 남아 있다.

만약 알헨크에게 넘겨진다면 세니아의 남은 인생은 노예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병을 모두 잃고, 반역을 일으킨 가문의 여식이 되었다. 세니아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노예처럼 로구안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세니아는 마지막으로 리시스의 자비에 매달렸다.

리시스는 세니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성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니아 양은 쉬란 사람이야.”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여러모로 골탕을 먹였던 사람이다. 종국에는 황후 자리에서 리시스를 끌어내리기 위해 악랄한 수까지 쓰려 했다.

리시스라고 그런 세니아가 예쁠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쉬란의 황후였다.


“벌을 내려도 내 손으로 내렸지, 저 로구안 놈의 손에 넘겨주지는 않아.”

“!”

세니아가 놀란 듯 리시스를 올려다보았다. 줄줄 흘러내리던 눈물이 더욱 굵어졌다.

모든 것이 공식적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어떤 선전포고도, 공식 발표도 없었다.

그러니 리시스가 원한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세니아의 목을 치든, 알헨크에게 던져버리든 말릴 수 없었다.

임시라고 생각했던 황후가, 정말 쉬란의 황후가 되어 세니아를 보호했다.


“황후……. 폐하.”

어쩌면 자신의 것이 영영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내뱉을 때마다 입 안을 찢어발기는 가시 같던 단어가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하늘을 하늘이라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듯, 리시스는 황후였다.

리시스는 대답하지 않고 성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니아는 내어주지 않아.”

“유감이네.”

“뺏어보려면, 그러든가.”

리시스는 전투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싸우러 왔다.

상황이 이쪽에 다소 불리할지라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싸워서 내가 이기면 덤으로 리시스도 받아갈 수 있는 건가?”

리시스가 대답하기 전, 렉싱턴이 말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창 하나를 들었다.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 맞춰버려.”

렉싱턴은 망설임 없이 창을 던졌다. 창은 알헨크가 탄 말에서 한 보 정도 떨어진 곳에 푹 꽂혔다.

어차피 거리상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헨크가 탄 말이 놀라 앞발을 들어올리게 할 수 있었다.


“손이 미끄러진 거야.”

리시스가 웃으며 말했다.

알헨크는 여차하면 창에 꿰뚫릴 뻔했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역시 까칠한 매력이 최고야.”

“맞아, 나는 잘난 데다 매력도 있어. 황제 폐하도 그러시더라고.”

“……하하.”

이제 서로 제대로 눈이 맞은 모양이다.

그런다고 알헨크의 마음이 식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흥미진진해졌다.


“하지만 너는 여기 와 있잖아. 나한테.”

리시스가 직접 달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반쯤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올 수밖에 없게 판을 짜 놓았지만, 거기에 넘어간 건 넘어간 거다. 죽을 만큼 싫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미친놈…….”

리시스는 결국 험한 말을 하고 말았다.

키에르트와 분석했을 때와 실제로 만난 알헨크는 차이가 있었다.

리시스에게 찝적거린 것은 반쯤 재미고, 작전의 일환 정도라고 생각했다. 진짜 노리는 것은 에드린과 쉬란. 더 나아가서는 로구안의 영토 확장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말하는 것을 보니 완전히 반대였다.

진짜로 저놈은 리시스를 노렸던 거고, 리시스가 1순위였다. 에드린과 쉬란의 땅은 겸사겸사 노린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일관적으로 미친놈일 수 있지?


“확실히 죽여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죽일 수 있으면.”

알헨크의 자신만만함도 여간하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이 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못하면 너는 결국 내 것이 되는 거다.”

알헨크의 말에 리시스는 있는 대로 불쾌해져서 얼굴을 사정없이 찡그렸다.

알헨크가 뱉어내는 말들은 다 호감표현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나빴다.

키에르트가 하는 모든 말들이 기분을 폭신하게 만들어 주는 것과 정반대였다.


“사람이 물건이야?”

“쥘 수 있으면 물건과 다를 건 없지.”

알헨크는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졌다.


“당신 옆에 있기만 하면 그게 가지는 거야?”

리시스의 물음에 알헨크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까지 생각해 온 ‘가진다’는 것의 의미가 그것은 맞았다. 하지만 리시스가 그렇게 물어서 생각해 보니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지는 게 맞긴 한데……. 그러게. 뭔가 부족하네. 뭘 더 가져야 할까?”

그걸 자신에게 물어본다고 답이 나올까?

리시스는 어이가 없어 대답을 못했다.

애초에 성벽을 사이에 두고 나눌 대화도 아니었다.

그런데 알헨크는 이 와중에도 그게 굉장히 중요한 것인 양 신중하게 고민을 하고 앉았다. 자신을 꿰뚫을 뻔한 화살을 앞에 꽂아놓고, 말을 탄 채 뒤에는 자신의 병사들을 세워놓고.

저 혼자 고민을 마친 알헨크가 이윽고 박수를 짝 쳤다.


“고민해 봤는데,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네.”

“?”

“일단 몸을 옆에 가져다 놓으면 나중에 더 가지고 싶은 것도 가질 수 있겠지.”

“누가 준대?”

“결국은 가지게 될 거야. 지금까지 내가 삼켰던 모든 땅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원하면 내 손에 들어오게 되거든.”

그 오만한 자신감에 리시스는 가볍게 웃었다.


“늘 원하는 걸 빼앗고 살았구나.”

“그렇지.”

리시스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럼 이번엔 빼앗겨 볼 차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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