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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누구냐고? 황후다 (128/153)


128. 누구냐고? 황후다
2022.10.23.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한순간에 들이닥쳤습니다……!”

“저희 앞에 있는 마을에서도 그렇게 당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희까지 그렇게 당할 줄은!”

리시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 하소연을 터뜨렸다.

리시스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사람들의 말을 신중하게 들었다. 그들의 말 하나하나에 단서가 들어 있었다.


“이제 다시는 그놈들이 쳐들어오지 못할 거야. 안심하고 마을 재건에 힘쓰고.”

“예……!”

“필요한 지원이 있으면 문서화 시켜서 정리해 놔. 그 편이 보내기 쉬우니까.”

전투에 이기는 것만큼이나 전투 후의 정리도 중요했다.

쉬란과의 전투에서 일반 백성 중 사상자가 생기는 경우는 없었지만, 마을 시설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런 것들을 빨리 회복하는 것 또한 작전의 일부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우왕좌왕하던 마을 사람들은 리시스가 척척 내리는 명령만으로도 큰 지지가 되었다. 놀란 머리로는 당장 뭘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내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황후 폐하께서 와 주신 덕분에 정신을 빨리 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이 먼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리시스의 단출한 차림부터 직접 이 먼 곳에, 황제도 없이 온 것에 놀라워했다.

외모만 보면 그냥 소녀처럼 보여서 놀라움이 더 컸다.

처음 등장한 순간, 상황을 파악하던 냉철한 눈빛과 이성적인 명령만 아니었다면 스스로 황후라고 밝혀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서실 만큼의 엄청난 일도 아니고……, 내가 관련된 일이라 직접 와 봤는데 말이지…….”

상황이 이리 흘러가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키에르트가 함께 와도 괜찮을 뻔했다.

감히 알헨크가 쉬란의 국경까지 넘어 이딴 짓을 벌이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렌데일 공작가에서는 아무 연락이나 지원이 없었어?”

“예, 앞마을에서도 지원 요청을 했고, 저희도 영주성에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이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문을 걸어 잠궈……?”

영주성은 영주의 생활공간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교역지로서의 역할도 있다. 문을 걸어 잠궜다는 소리는 그 기능을 모두 정지시켜놓고 있다는 말이다.

렌데일이 알헨크와 완전히 손을 잡았든, 다른 문제가 생겼든, 좋은 일은 아니었다.

우선은 국경의 알헨크와 마주치기 전, 그쪽을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혹시 이쪽에는 나와 관련된 무슨 얘기 없었어?”

“황후 폐하와 관련된 얘기요……?”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떠오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실 저희는 황후 폐하가 계신 것도 방금 알았습니다요…….”

“…….”

렌데일 영지가 황도에서 멀긴 멀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번화한 도시도 아니고 정말 시골의 조그만 마을이라 소식이 느려도 엄청나게 느린 모양이었다.


“그래, 이제부터라도 알아두면 되지. 내 이름은 리시스고.”

“리시스, 리시스, 수학천재 리시스…….”

리시스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곁에 있던 병사 하나가 습관처럼 흥얼거렸다. 축제 이후 사람들의 최고 유행가가 되어버린 리시스. 그 리시스였다.

그 노래의 주인공인 리시스는 병사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헙, 죄송합니다. 습관이 돼서 그만…….”

병사가 리시스의 눈빛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은 들어버렸다.


“죄송합니다만, 방금 그 노래는 뭐였습니까, 기사님? 한 번 들었는데도 귀에 계속 맴도는 것이…….”

“어, 이게 뭐냐면 우리 황후 폐하를 칭송하는 찬양곡인데…….”

“오오, 그럼 저희에게도 알려주십시오!”

길거리 악사가 명곡 하나 끝내주게 뽑아냈다. 황도로 돌아가면 찾아내서 상여금이라도 쥐어줘야 할 모양이다.

***

리시스 일행은 마을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지 않고 다시 이동했다.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렌데일 영주성의 상태가 영 마음에 걸렸다.

출발을 하며 리시스는 전서조를 꺼냈다. 티티는 짧은 거리에서 상대를 정확하게 찾아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먼 거리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이럴 때는 전서조가 유리했다.

『알헨크, 렌데일 영지 내 약탈.』

전서조를 통해 보낼 수 있는 말은 길지 않다. 렉싱턴은 혼신의 힘을 다해 길고 긴 문장을 구겨넣는 것에 성공했지만 리시스는 그런 재주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렉싱턴에게 대신 써달라고 했다간 화병이 나서 쓰러질 수도 있으니, 최대한 문장을 고르고 골라야 했다.


‘일단은 전면전이 될 수도 있으니 군사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할까?’

알헨크가 벌인 짓은 쉬란과 로구안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는 짓이었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몸소 출전할 정도까지의 일은 아니었다. 알헨크가 운용하는 병사의 규모는 지금 리시스의 병사만으로도 충분했다.


‘차라리…….’

리시스의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이 번득였다.

지금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이용할 수 있는 시점이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빨리 돌아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것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부탁도 선뜻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결심을 마친 리시스는 다음 줄을 채워 넣었다.


“보고 싶다, 뭐 그런 말을 적으신 건 아니지요?”

리시스의 고민을 옆에서 지켜보던 렉싱턴이 매서운 눈으로 물었다.


“……아, 아니거든?”

“혹여 그런 마음이 있으셔도 절대 그런 건 적으시는 게 아닙니다! 남자는! 결혼을 했어도 끝까지 주도권을 주는 거 아닙니다!”

“아니, 뭐 그런 것까지 따져가며 살아…….”

“제 말 들으십시오! 남자는 쥐고 사는 겁니다!”

렉싱턴의 잔소리가 무서워 리시스는 얼른 전서조를 날려보내고 마차로 쏙 도망갔다. 하지만 렉싱턴의 잔소리는 마차 안까지도 이어졌고, 달리는 내내도 이어졌다.

그러나 렌데일 영주성에 도착한 순간, 조용해졌다.

렉싱턴뿐만 아니었다. 리시스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말을 잃었다.


“둘이 손을 잡은 게 아니었나?”

분명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공격당해 너덜너덜해진 영주성의 모습을 보면 둘이 결탁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것이다.


“흐, 흐아아! 누구, 누구야!”

“렌데일의 사병인가?”

반쯤 정신이 나간 병사가 문 앞에서 창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접근을 막았다. 질문에 답을 할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리시스는 턱짓으로 명령했다.

잘 훈련된 부대원이 민첩하게 병사를 기절시켰다. 있으나마나한 병력이었지만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 귀찮아서였다.

입구 쪽에는 몇몇 남은 병사들이 보였지만 대부분 전의를 잃은 채였다.

성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죽든가, 도망갔든가. 둘 중 하나였다.


“세니아도……?”

둘 중 하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알헨크에게 끌려갔든가, 영지를 이 꼴을 만들어놓고도 붙어 있는 중이면 더 최악이었다.

영주성 깊숙한 곳에 영주의 생활공간이 있었다.

그나마 문 앞에 제대로 된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렌데일에 마지막 남은 사병인 것 같았다.


“누구냐!”

그러나 검을 앞세워 바짝 긴장하는 것은 똑같았다. 검에 피가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알헨크가 여기까지는 치지 않고 넘어가 준 것 같았다.


“황후다.”

리시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뭐, 무슨 개소리야!”

“누구냐고 물어서, 황후라고 대답했어.”

“미친X 아냐!”

다짜고짜 욕을 먹었지만 리시스도 이해는 했다.

이 먼 변방까지 황후가 홀로 병사를 이끌고 나타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바로 그걸 노린 전략이었다. 누가 문제를 삼으면 황후가 그럴 리가 있냐, 한 마디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에드린 안에서 써먹을 핑계였고, 쉬란 안에서는 당당히 황후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안에 세니아 있나?”

“아, 아가씨는 왜…….”

“얘기 좀 하게.”

리시스가 너무나도 상식적이고 담담하게 대답해서 사병들은 다시 소리를 지를 짬을 놓쳐버렸다.

그때 문 안쪽에서 와장창! 하는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몸싸움을 벌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쿵, 쿵 찧는 소리도 들렸다.

리시스와 사병의 눈이 마주쳤다.


“얼른 열어!”

사병은 리시스의 기세에 어영부영하다가 결국 문을 열었다.

어차피 걱정하는 마음에 뛰어 들어갈 충성심도, 목숨 내놓고 지킬 책임감도 없는 이들이었다.


“앞서겠습니다!”

리시스의 앞으로 미하엘이 검을 빼어들고 달려 나갔다.

문 안쪽은 저택과 비슷한 형식으로 생활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먼저 넓은 홀이 있고, 정면으로 긴 계단이 놓였다. 계단 중간에 세니아가 있었다.


“헉……, 헉!”

손에는 피로 물든 칼을 들고.

거칠게 들썩이는 어깨 위로 늘 단정하게 틀어올려져 있던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 흐트러져 있었다.

차분함을 잃지 않던 눈동자는 요동치며 계단 아래에 못 박혔다.

자연히 시선을 따라가 계단 아래를 본 리시스는 짧게 신음했다.


 


“렌데일 공작…….”

계단 밑에 쓰러진 렌데일 공작은 움직임이 없었다.

미하엘이 재빨리 다가가 목에 손을 대 보곤 고개를 저어보였다.

죽었다.

아니, 살해당했다.

자신의 딸, 세니아에게.


“화, 황후 폐하……!”

그때 세니아가 울부짖으며 계단 밑으로 구르듯 뛰어내려왔다. 아직까지도 세니아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챙!

세니아의 앞을 렉싱턴과 미하엘, 두 사람의 검이 동시에 막아섰다.

세니아는 자신의 눈앞을 가로막은 검에 놀라 흠칫 멈춰섰다.


“검을 버리십시오.”

“아, 아아! 이건! 황후 폐하를 해하려던 게 아니라!”

세니아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검에 스스로 놀라 던져버렸다. 그런 허둥지둥한 태도까지도 세니아답지 않았다.

제 손으로 아버지를 찌른 시점에 이미 제정신일 수는 없지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서 이렇게 된 것인가.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사, 살려주세요!”

세니아는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때 황후 자리까지 노리던 그 고고하던 사람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차라리 우아하게 티파티에서 말다툼이라도 해서 쫓아냈더라면 개운했을 텐데.


“저, 저는 반대했습니다. 알헨크 그놈, 배신할 것 같았고……! 그래도 저는 쉬란을 사랑하니까! 아, 아버지가 아예 다 놔버리고 로구안 왕 놈의 첩으로 절 밀어넣겠다고, 그러면 로구안에서도 작위 받고 영지 받고, 더 잘 살 수 있다며……, 하지만 저는 쉬란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세니아의 절규에 리시스는 머리를 짚었다.

맙소사.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완전히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세니아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역은 반역이었다.

세니아의 처분을 말하기 위해 리시스가 막 입을 열었을 때, 성문 밖에서 몰려오는 말굽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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