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쉬란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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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쉬란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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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쉬란의 황후
2022.10.20.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사실 할 건 많지 않다.
지도를 들여다보고 전술을 계획하는 것도 이동하는 내내 할 수 없다. 멀미나고 눈도 아프다.
멍하니 먼 들판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초록 들판.
이따금 짙푸른 숲과 황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에서 키에르트가 떠올랐다.
저 파란 하늘은 키에르트의 싱그러운 미소를 떠오르게 했다.
저 하얀 구름은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새하얀 치아.
초록 들판은 키에르트가 걸쳤던 조끼…….
잠시 후 해가 지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면 키에르트의 머리색이 되겠지. 그리고 조금 더 밤이 다가오면 눈동자가 떠오를 거다.
내내 그런 생각만 했다.
“이쯤 되면……, 그냥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잖아.”
리시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키에르트가 보고 싶다.
“리시스 님…….”
“그러면 돌아가는 게 맞는 거겠지?”
렉싱턴은 리시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하필 그 자식인지는 모르지만, 리시스가 느끼고 있는 감정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감정을 인정한다고 속상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울컥, 렉싱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크흡!”
“아, 아아! 내가 잘못했어! 울지 마!”
“리시스 님이 잘못하신 건 없습니다. 다 그놈의 지나치게 잘생긴 황제가 사근사근한데다 열심히 노력까지 하는 탓이지요!”
“……욕이야, 칭찬이야?”
욕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칭찬이었다.
키에르트의 진심은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스의 마음이 어떨지는 몰라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는 게……. 이렇게 스스로의 가슴을 찌르는 질문이 되었다.
리시스가 쉬란에 있는 것이 좋다면 보내주는 것이 맞다. 하지만 쪼잔한 마음은 끝내 뒤끝을 남겼다.
“……그런데 황제가 그렇게 보고 싶습니까? 쉬란에 있는 동안 제 생각은 하긴 하셨어요?”
보내줄 때 보내주더라도 자신의 위치를 확실히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하필 그 질문은 리시스의 아픈 곳을 꾹 찔렀다.
리시스는 뜨끔 찔려 시선을 피했다.
“하, 하긴 했어…….”
“그게 뭡니까! 안 하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아니, 그게, 나도 사느라 바빠서…….”
“충성해봤자 별거 없다는 말이 이런 거였군요!”
“아니, 그래도 남편이랑 장군이랑 어떻게 같아…….”
“흥!”
리시스가 아무리 설득해 보았자 삐친 마음은 쉬 위로되지 못했다.
‘황제 폐하는 안겨서 눈만 마주쳐도 풀어졌는데…….’
이러는 와중에도 또 키에르트가 떠올라 버리고 말았다.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잠은 잘 잘까. 일은 잘 하고 있을까.
‘잘 하겠지!’
리시스는 고개를 저어 키에르트의 생각을 쫓아내려 애썼다.
자신이 없을 때에도 잘 살던 사람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살까.
리시스는 손목에 묶인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뒤에 접근하는 부대라든가……, 사람이라든가, 뭐 없어?”
리시스는 마차 창문을 열고 마차를 호위하며 달리는 기사에게 물었다.
시시때때로 정찰병이 주변을 살피고 있어 다가오는 무력집단이 있으면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없습니다.”
없어서 다행이어야 하는데……,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실망하고 있었다.
혹시 키에르트가 따라와서 같이 싸우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선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냐, 그럼 이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데. 큰일이지! 그렇게 정신머리 없으신 분은 아니니까.’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주접을 의심함과 동시에 황제로서의 능력도 믿었다.
자신도 예정대로 전선에 도착해서 로구안 놈을 때려눕히고, 렌데일 가문에 쳐들어가 책임을 물어 압송해야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토지의 색이 바뀌었다.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국경에 근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리시스는 곧 시작될 전투에 집중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황후 폐하.”
그때 미하엘이 창문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출전인데도 긴장감 하나 보이지 않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 있었다.
리시스의 눈빛도 빠르게 식었다.
“뒤는 아니고 앞에 심상치 않은 것이 보입니다.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멈춰.”
“멈춰! 주변 경계!”
미하엘이 리시스의 명령을 즉시 하달했다.
리시스는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마차 문을 노려보았다.
렉싱턴도 입을 다물고 창밖을 경계했다.
“내리셔도 됩니다.”
미하엘이 마차 문을 열고 안내했지만 렉싱턴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사방을 둘러보았다.
렉싱턴이 다시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에야 리시스도 마차에서 내렸다.
쉬란의 병력을 무시하는 짓이었지만 안전은 두 번, 세 번 챙겨 나쁠 것 없었다.
누가 더 잘났는지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안전해진 뒤에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아…….”
리시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광경에 신음했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전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종료된 것 같습니다.”
리시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렌데일 영지 안으로 들어선 지는 한참이다. 하지만 아직 국경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렌데일 영지는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하루 정도는 내리 달려야 할 만큼의 크기였다.
“여긴 영지의 중심쯤 아닌가?”
“맞습니다. 저 마을을 지나면 렌데일 영주성입니다.”
“영주성이 코앞인데, 그걸 지나쳐서 전투라…….”
불어오는 바람에서 익숙한 전쟁터의 냄새가 났다. 다시 이 냄새를 맡게 될 줄은 몰랐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 리시스의 눈이 한층 단단해졌다.
“흐에엥…….”
다시 마차를 타려는데, 마을 쪽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시스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신발 한쪽을 잃어버린 아이가 울면서 혼자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아무리 애여도 전쟁터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일단 앞을 가로막는 미하엘을 치우고 리시스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가, 혼자야?”
“히잉, 끅.”
아이는 사람을 보고 이쪽으로 왔지만 막상 무장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무서워졌는지 움츠러들었다.
리시스는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리시스도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 드레스를 벗고 움직이기 편한 차림에, 가벼운 무장을 했다. 하지만 온몸에 갑옷과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병사들보다는 덜 무서웠다.
“저 마을에서 왔어?”
“히끅, 네…….”
“엄마 아빠는.”
“도, 도망가라고……. 흐에엥…….”
“누가 쳐들어왔어?”
아이는 눈물을 후두둑 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혹시 봤어?”
“까, 까만 옷을 입고……, 말을 무섭게 달렸어요, 으흥, 으엉…….”
말을 무섭게 달렸다, 에서 알헨크의 부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동성을 최우선시하는 그들이 뛰어서 습격해 올 리는 없을 테니까.
이미 불바다가 됐다는 것은 이미 치고 빠졌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그 사람들은 누가 막았어?”
“아, 아빠랑 아저씨들이…….”
“영주님이 보낸 병사는 없고?”
“몰라요…….”
아이는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겁먹은 듯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국경도 아니고 렌데일 영지 안에서 알헨크의 부대가 약탈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저지하는 렌데일의 병력이 없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쉬란에 반역을 하려 들어도 자신의 영지가 털리는 것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에 리시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가 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일단은 직접 상황을 확인하는 쪽이 나았다.
“일단 마을로 접근해.”
“예.”
리시스의 명령에 정찰병이 먼저 출발했다.
리시스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우리 마을로 돌아가서 엄마 아빠 같이 찾아보자?”
“엄마 아빠가 도망치랬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엄청 세. 그러니까 다 이길 수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이는 리시스의 말에 마차를 둘러싼 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니까 최대한 친절한 미소로 시선에 답하려 해도 이미 몸집부터가 흉흉한 이들이라 크게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강해 보이긴 한 모양이다.
“웅……. 그치만…….”
“또 왜?”
“첨 보는 사람이 같이 가자 그러면 싫다고 하라 그랬는데…….”
누구신지 이렇게 애를 똑똑하게 잘 키울 정도면 저 난리통에도 잘 살아남았을 것 같다.
리시스는 웃으며 아이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누군지 신분이 확실하면 괜찮겠지?”
“누구신데요?”
“나는 쉬란의 황후, 리시스라고 한단다.”
“웅, 쉬란의 황후……, 황후 폐하?!”
아이가 한 박자 느리게 놀랐다.
“그래. 쉬란을 지키러 왔단다.”
그러니 이제 안심해도 돼.
리시스는 아이를 힘주어 꼭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팔 안에 느껴지는 아이의 무게가 리시스의 마음을 더욱 단단히 굳혀주었다.
이제는 개인적인 복수를 떠나, 쉬란을 지키기 위해서 칼을 들어야 했다.
“병력은 철수한 모양입니다. 주변에도 감지되는 병력은 없습니다.”
“진입하지.”
리시스는 아이를 안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눈앞에 보이는 마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가 혼자 울면서 걸어올 정도의 짧은 거리였다.
“또, 또 뭐야!”
“어디 놈들이야!”
마을 곳곳이 불타고 있는 난리통 중, 또 새로운 병력이 접근하자 사람들이 경계하며 소리를 질렀다.
리시스는 마차를 멈췄다.
아이를 안고 마차에서 내리는 여자의 등장에 발악하듯 소리치던 사람들의 기세가 주춤했다.
“어, 어……, 저건.”
사람들 중 아이를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아이도 그 사람을 알아보았는지 몸이 들썩였다.
“아는 사람이니?”
“네! 이모, 이모오!”
“얼른 가봐.”
리시스는 아이를 내려주었다.
아이는 한달음에 달려가 이모라는 사람의 품에 답싹 안겼다.
이모는 아이와 함께 울음을 터뜨리며 아이가 무사한지를 살폈다. 아이가 이상한 사람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님을 확인한 이모가 뒤늦게 리시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누구신지…….”
언뜻 보아도 비범한 신분인 것이 확연히 보였다. 신분을 묻는 것도 조심스러워 머리를 조아리며 묻게 되었다.
리시스는 아이에게 보여주었던 것과는 다른, 미소가 아닌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쉬란의 황후, 리시스다.”
불타고 있는 마을을 보며 분노의 감정이 솟았다.
쉬란의 땅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감히 쉬란의 땅을 짓밟은 놈들은 어떤 놈들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