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소중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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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소중한 사람
2022.10.16.
“리시스! 리시스!”
“황후 폐하! 황제 폐하! 만세!”
두 사람이 황궁 문 안으로 들어선 후에도 환호성은 길게 이어졌다.
꽃길을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사방에 꽃잎이 휘날려 꽃비가 내렸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꽃비는 황궁의 높은 벽을 넘어 그 안까지 스며들었다.
리시스는 콧등에 내려앉은 꽃잎을 떼어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할 말이 참 많았다. 하지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 그러니까. ……어디까지 섭외하신 거예요?”
“……응?”
키에르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리시스를 쳐다보았다.
리시스의 얼굴을 가득 채운 홍조는 아직 한참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튀어나온 질문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이거, 폐하께서 준비하신 깜짝 선물이었던 거죠? 다들 황궁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일반 백성들한테 접근해서 이런 준비를 다…….”
“내가 준비했던 건 온 사방에 내 아내를 자랑하는 것밖에 없었어.”
아, 어쩐지.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괜히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이 영 어색했다.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연기를 하려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들이 움직였어요?”
리시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노래했는지, 꽃을 주었는지. 자신의 앞에 꽃길을 깔아 주었는지.
키에르트가 모든 것을 계획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다고 이해하려 했다. 다만 그 과정이 수수께끼였다.
언제, 어떻게, 무슨 수로 일반 백성들과 협의를 했을까?
“내가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그대가 움직인 것이지.”
“……제가요?”
아직도 믿지 못하는 리시스의 두 손을, 키에르트는 꼭 쥐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에 꼭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그건 아니지만…….”
“그대는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생생한 힘이 있으니까.”
키에르트가 새겨 넣듯 말했다.
키에르트가 주고 싶었던 선물.
사람들의 짧고 가볍지만 순수한 호감이었다.
이유 없이 사랑해 줄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유가 없어도 스스로를 소중히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대는 소중한 사람이야.”
“…….”
“사람들이 그대를 향해 건넨 꽃을 잊지 말고.”
“안 잊어요.”
리시스는 콧등이 시큰해져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훌쩍이며 올려다본 키에르트의 눈은 한없이 따뜻했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을 온기였다.
“어느 곳에 있어도 소중한 스스로를 가장 먼저 챙겨줘.”
곧 떠나갈 전쟁터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의 리시스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할 수만 있었다면 칼을 들고 전투에 뛰어드는 것도 불사했을 것이다.
이 선물은 부디 그러지 말아달라는 키에르트의 당부였다. 전투의 승패보다, 쉬란의 안위보다, 황실의 체면보다 스스로를 가장 중요하게 챙겨달라는.
“그럴게요.”
리시스는 다시 한번 콧물을 킁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씩씩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키에르트의 미소도 짙어졌다.
“무사히 돌아오면 다음에는 제대로 된 선물을 주도록 하지.”
이번에는 키에르트도 많이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성을 하나 지어서 그 안에 금은보화를 방마다 채워 주고 싶었다.
그건 키에르트의 마음 하나밖에 전달하지 못해서 참았다. 떠나가는 리시스에게 더 주고 싶은 것은 자신이 소중하다는 메시지였다.
리시스가 전선에서 무리하지 않고 얌전히 돌아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선물 때문에라도 꼭 무사히 돌아와야겠네요.”
“그래. 꼭.”
리시스는 이제야 키에르트를 마주보며 웃었다.
***
“절대 다치지 말고.”
“네에.”
“식량이 부족할 것 같으면 무조건 후퇴해서 밥부터 먹고.”
“네에.”
“그럴 리는 없지만 밀린다 싶으면 무조건 돌아오고. 그깟 영지 좀 내어줘도 되고, 나중에 되찾으면 그만이니까.”
“네에.”
키에르트의 잔소리는 끝이 나지 않았다.
“폐하. 시간이.”
“그래, 하나만 더.”
출정 준비 다 끝낸 병사들 앞에 세워두고 하는 송별의 인사가 너무 길었다.
어느 영웅의 서사시에나 등장하는 장면이기는 했다.
전장으로 떠나려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애틋한 헤어짐. 무운을 비는 남겨진 사람.
보통은 남자가 떠나가고 여자가 남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그러나 남겨지는 사람의 역할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과하게 실천 중이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맞잡은 두 손을 더욱 꼭 부여잡으며 눈을 마주치고 착실히 잔소리에 대답했다.
“로구안 놈이 뭐라고 회유해도 넘어가지 말고.”
“……회유요?”
“그래. 혹시 모르잖아. 그대가 따져봤을 때 훨씬 더 좋은 조건을 내밀지.”
다 얌전히 들었지만 그건 너무 황당했다.
리시스는 어이가 없어 하하하 웃었다. 정말 별 걱정이었다.
“제가 쉬란의 황후로서 나서는 첫 전투니까 승리를 선물로 가지고 돌아올게요. 올 때 빈손으로 왔었으니까. 뒤늦은 결혼 선물로.”
빈손으로 쉬란에 온 것을 신경 쓴 적은 없다.
지금도 그게 미안하다든가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쉬란에 온 이후 모든 것을 키에르트의 금고에서 해결하다보니 자신의 힘으로 뭔가 하나는 해 주고 싶었다.
기왕 선물해 주는 것, 키에르트가 놀라 감동할 만한 굉장한 것으로. 지금껏 키에르트가 리시스에게 줬던 것들이 다 그랬으니까.
“결혼 선물……, 그대가 선물인데 왜 그런 걸 따로 챙기려 하지.”
“그래도요, 제 욕심이예요.”
“……욕심. 욕심이라…….”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에 빠지던 키에르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가 가져다 준다면 기쁘게 받도록 하지. 나도 말했던 것처럼, 그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기대할게요.”
키에르트가 크게 준다면 정말 크게 줄 것이다.
받는 만큼 돌려주어야 하는 관계라면 부담스러웠겠지만 키에르트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가 줄 만하니까 주겠지!’
키에르트 덕분에 리시스는 제법 기고만장해졌다.
마지막으로 키에르트는 손수 꺾어 만든 작은 꽃다발을 리시스의 주머니에 꽂아주고, 손수 수놓은 손수건을 손목에 묶어주었다.
전쟁터에 병사를 보내는 부인들이 해 주는 것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입장이 반대이므로 남편이 부인에게 해 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도 그대에겐 꽃이 어울리는군.”
“저도 이런 상황이지만 폐하께 꽃을 받아서 좋아요.”
키에르트는 배웅의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정말 마지막 순서로 리시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기다리고 있던 제롬이 돌아서는 리시스를 보고 마차 문을 열었다.
어차피 정식 출정이 아니기 때문에 병력을 과시하며 이동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리시스의 행진은 마차로 이동하는 귀족 아가씨와 그 호위무사들처럼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쟁임을 알고 있는 키에르트는 비장하게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차에 타기 직전, 리시스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굳은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에르트는 얼른 미소를 지었다.
“…….”
리시스는 마차에 오르지 않고 어물거리다가, 이내 결심을 마쳤다.
질질 끌며 한참을 걸었던 거리를 되돌아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리시스?”
리시스는 두 팔로 키에르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키에르트는 엉겁결에 리시스의 몸을 받아 안았다.
“빨리 갔다올게요.”
“그래.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몸을 두 팔로 가두듯 꽉 끌어안았다. 이대로 품안에 가둬 아무데도 못 가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리시스의 작전에 필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전투의 승패는 리시스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기왕이면 리시스가 원하는 형태의 승리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만약의 상황이 생겼을 때에 대비해 키에르트도 쉬란의 전군을 준비시켜 두었다.
리시스의 털끝 하나라도 상하게 된다면 그때는 쉬란 전체가 공격할 것이다.
“너무 오래 오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를 쓸지 나도 몰라.”
키에르트의 협박에 리시스는 겨우 웃었다.
은근히 기대가 되어버렸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면 키에르트는 무슨 수를 쓸까.
***
“무슨 수를 쓰실 것 같아?”
“그걸 제가 압니까.”
렉싱턴은 불퉁하게 대답했다.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엎드려 운다, 바닥에서 구른다, 자기도 황제 그만둔다고 협박한다. 이런 거거든. 그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내가 돌아올 수 있게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저야 모르지요.”
듣는 사람은 관심이 없다는데 리시스는 출발 이후 내내 그 얘기뿐이었다.
그리고 벌써 그게 삼 일 째였다.
국경을 향한 긴 여정은 쉼이 없었다.
리시스가 이끈 부대는 직접 키우던 특수부대. 그리고 렉싱턴과 함께 온 에드린의 부대원들이었다. 양쪽 다 리시스가 친히 굴려 만든 이들이라 수족처럼 움직였다.
중간에 영지를 들러 시찰을 한다거나 인사를 받는 일도 없었다. 모조리 생략이었다. 덕분에 이동속도는 최대로 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황도에 있을 정보원이 소식을 물어 날라도 거의 동시에 리시스 군이 도착할 속도였다.
“그런데……. 정말 로구안 왕자만 내쫓고 이대로 쉬란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그럼 어디로 가. 에드린으로 가?”
“다른 곳으로 도망가 숨으셔도…….”
“왜?”
리시스는 정말 이유를 몰라 물었다.
“내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고, 쉬란에서 힘들게 살았던 것도 아닌데.”
“그……, 정말 괜찮으셨던 겁니까.”
렉싱턴은 눈으로 보고, 직접 겪고서도 마지막 의심 한 자락을 내려놓지 못했다.
쉬란의 황궁 안에는 보고 듣는 눈이 있어서 잘 지내는 척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리시스는 그런 것에 통달한 사람이니까.
어디서든 잘 적응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고. 워낙 무던한 성격이라서 자연스럽게 그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리시스는 태생적으로 섬세한 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딜 가나 웃는 낯으로 호감을 사려면 마음속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해야만 했다.
렉싱턴이 본 쉬란의 리시스는 지금까지 보았던 모습 중 가장 많이 웃었고, 가장 편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적국이기 때문에 한 혼신의 연기일 수 있었다.
“렉싱턴 장군님…….”
리시스도 렉싱턴의 그런 염려를 모를 리 없었다.
전선에서 힘든 일이 닥쳐올 때마다, 억지로 웃는 리시스에게 ‘울어도 됩니다.’라고 말해준 사람이 바로 렉싱턴이었으니까.
사실 리시스도 지금까지 자신의 마음을 확신하지는 못했다.
연기를 오래 하다 보면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더구나 키에르트는 조건과 별개로 매력적인 사람이다.
리시스에게 정말 잘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리 떠나면서 리시스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더 선명히 보였다.
“지난 삼일 동안 달리면서 내가 무슨 생각만 했을 것 같아?”
“전투 생각?”
“……도 하긴 했는데.”
물론 다가올 전투에 대한 대비책도 생각은 했고.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리시스의 마음을 채웠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자꾸만 폐하 생각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