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아내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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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아내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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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아내 자랑
2022.10.13.
‘설마?’
리시스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러포즈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의 일을 허멀 후작과의 상의 없이 벌일 리가 없다.
만약에 두 사람이 짰다면 리시스가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었다.
키에르트와 리시스는 축제 직전까지 거의 모든 순간을 붙어 지냈다. 준비 막바지 기간에는 허멀 후작도 황궁에 살았다. 그러니 자신 몰래 두 사람이 따로 뭔가를 할 틈은 없었다.
키에르트는 지금 분명히 리시스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고 있었다. 걸음에서 목적하는 방향이 느껴졌다.
‘뭘까.’
궁금했지만 리시스는 묻지 않고 얌전히 키에르트를 따라갔다. 그게 무엇이든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이었더라면 아마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죽이려는 건 아닌가 겁먹었을 텐데, 이제는 리시스도 키에르트에 대한 꽤 두터운 믿음을 쌓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폐하가 먼저 믿어줬네.’
키에르트는 일전에 시장에서 리시스가 정체도 모를 이상한 차를 사러 들어가는데도 믿고 따라 들어가 주었다.
리시스가 작정을 했으면 내통하던 밀정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고, 암살자들이 몰려들어올 수도 있었는데.
키에르트의 무용이 아무리 뛰어나도 일대다수의 싸움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변에 호위가 지키고 있어도 사고가 일어나는 건 한순간이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믿음을 주는데 큰 용기가 필요한 관계였다. 이제는 용기를 낼 필요도 없이 믿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고.
리시스는 앞서가는 키에르트의 너른 등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 오랜 시간 보지 못하게 될 텐데, 많이많이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이런,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아졌군.”
걷는 동안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밤이 되자 축제는 더욱 성대하게 무르익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연주와 웃음소리, 말소리, 몸짓이 내는 옷 스치는 소리 등등이 이리저리 뒤섞여 고막을 가득 메웠다. 혼란스럽지만 전쟁터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랐다.
“저는 그냥 이대로 즐겨도 좋은데……. 꼭 어디로 가야 해요?”
리시스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여기는 너무 막혀 있으니까. 조금 한산한 곳이 구경하기 좋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키에르트는 정말 길을 찾듯 목을 빼고 앞쪽을 살폈다.
키가 커서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사람들 머리 위로 앞을 훤히 살필 수 있었다.
“저쪽이군.”
길을 찾은 키에르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까와 비슷한 방향이었다.
리시스는 거의 확신하고 물었다.
“혹시 뭔가 준비하신 건 아니죠?”
“아니?”
키에르트는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엥? 아니에요?”
진짜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없어?
리시스는 충격을 받았다.
그럼 왜 어딘가 목표로 하고 있는 것처럼 쭉쭉 나아갔던 거지? 남들보다 시야가 높아서 사람 없는 쪽을 찾아 걷다 보니 우연히 한 방향으로 나아갔던 건가?
키에르트는 왜 없는지, 생각조차 없는지, 더 이상 붙이는 말조차 없었다.
‘어…….’
리시스 혼자 설레발을 친 것이었다.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가라앉는 기분만큼 발걸음도 무거워졌다.
가벼운 걸음으로 키에르트와 나란히 걷던 리시스는 점점 질질 끌려가듯 느려졌다.
“리시스?”
뒤로 처지는 리시스의 걸음을 감지한 키에르트가 뒤돌아보았다.
“발이 아픈가?”
“……아뇨.”
“목말라?”
“……아뇨.”
육체적으로 힘들 것은 없었다.
어릴 때는 숲속을, 나이 먹고는 전쟁터를 뛰어다녔는데 이깟 축제의 인파를 헤치고 다니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줬던 물건들도 다 키에르트가 들고 있어 힘들 것이 없었다.
그러나 젖어든 실망감의 무게가 너무 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기대를 엄청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키에르트가 뭔가를 하겠다는 기색을 내비쳤던 것도 아니고, 약속된 것도 없다.
프러포즈는 취소되었고, 당연히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도 뭔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키에르트에게는 기대가 되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
키에르트가 잘못한 건 없다. 하지만 잘못한 기분이었다. ‘아뇨.’라고 말해주기 싫었다.
리시스는 공연히 입술만 삐죽였다. 그건 ‘네.’인거나 마찬가지였다.
“리시스.”
“……네.”
멈춰선 두 사람 주변을 신난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전까지는 리시스도 그 안에 함께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동떨어진 기분이다. 도저히 저들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키에르트가 허리를 굽혀 리시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대가 웃지 않으면 나도 즐겁지가 않아.”
“즐거워요.”
리시스는 억지로 입술을 쭉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쯤은 어렵지도 않았다. 감정을 숨기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표정을 만들고. 평생 해 온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보다 얼굴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리시스는 당황하며 다시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다. 움직이긴 움직인다. 하지만 다른 힘이 작용해 얼굴을 끌어내렸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리시스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그대가 그런 얼굴을 하면 내가 속이 상하는데.”
키에르트의 다정한 속삭임에 눈물이 다 나오려 했다.
눈물을 꾹꾹 참아삼키느라 대답을 할 틈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대가 나를 향해 웃어줄까…….”
키에르트는 정말 뭐라도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꽃……, 아 이미 사셨네.”
지나가던 꽃 파는 아이가 꽃을 내밀다가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키에르트가 손을 뻗어 꽃을 잡았다.
“꽃은 많을수록 좋지.”
“사 주시는 거예요?”
“그래. 이 예쁜 사람에게 줄 거란다.”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가리키며 말하자 아이가 까륵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요. 언니 정말 예뻐요!”
두 사람의 이어지는 칭찬에 리시스가 멋쩍게 얼굴을 붉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란다. 엄청 똑똑하기까지 해. 학자들도 못 푸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척척 풀기도 하고, 장기도 엄청 잘 둔단다.”
“우와! 굉장한 언니였네요!”
“그만해요…….”
눈앞에서 줄줄이 이어지는 칭찬에 리시스는 민망해 고개를 푹 숙였다.
키에르트의 칭찬은 이제 익숙해져서 태연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면역이 없던 모양이다.
“예쁘고, 똑똑하고, 수학문제도 잘 풀고, 장기도 잘 두는 언니니까 제일 큰 꽃송이로 드릴게요! 어, 그리구……, 이거는 제 선물이에요!”
아이가 키에르트가 산 꽃 말고 다른 꽃을 내밀었다. 키에르트가 산 꽃만큼이나 크고 싱싱한 꽃이었다.
“어? 이걸 받아도 돼……?”
“멋있는 언니니까 돼요!”
아이는 리시스의 품에 꽃을 안기고 사라졌다.
“어…….”
꽃만 덩그러니 리시스의 품에 남겨졌다.
리시스는 얼떨떨하게 꽃을 내려다보았다.
멋있는 언니.
누군가에게 그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주는 칭찬의 대상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기술 같은 것에 가까웠다.
애초에 리시스에게는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공주면 뭘해, 얻어먹을 것도 없는데.’
그러다가 리시스가 조금씩 도움이 되기 시작하면, 평이 바뀌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괜찮네. 공주라도 쓸모가 있어야 해, 역시.’
‘쓸모.’
쓸모가 없으면 밥을 굶는다.
살기 위해서는 쓸모가 있어야 했다.
꽃을 파는 아이에게 리시스의 재주는 쓸모가 없었다. 당장 아이와 전쟁터를 뒹굴 것도 아니고, 장기를 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는 리시스의 재주에 감탄하며 ‘멋있다.’고 칭찬해 주고, 좋아한다는 의미로 꽃 선물까지도 해 주었다.
“제가 멋있대요……. 꽃도 줬어요.”
“받아 마땅하지.”
“마땅해요?”
키에르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존재 자체로 세상에 빛이 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
“그게 저라고요?”
“왜 아닐 거라 생각하나?”
키에르트는 증명이라도 해 보이겠다는 듯 꽃으로 팔찌를 만들어 파는 아이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와! 진짜 멋져요! 저는 숫자 쓸 줄도 모르는데.”
아이는 팔찌에 이어 목걸이까지 즉석에서 뚝딱 만들어 선물해 주었다.
키에르트가 주었던 온갖 금은보화 선물과 달리 동전 하나면 살 수 있는 값싼 선물이지만 감동은 작지 않았다.
“내 아내 자랑 좀 하려고.”
키에르트는 심지어 길거리 악사들에게까지 리시스를 자랑했다.
누가 그런 걸 들어줄까 했지만 사람들은 웃으며 즐겁게 자랑을 들었고, 키에르트의 자랑은 갈수록 길어졌다.
“내 아내의 멋짐을 곡으로 표현해 줄 수 있겠나?”
“아, 물론 가능하지요!”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음이 떠나지를 않고 있었구먼!”
악사들은 즉석에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리시스, 리시스! 수학 잘 푸는 리시스! 전략 천재 리시스! 장기 고수 리시스!”
1절까진 좋았다. 그런데 2절, 3절, 구구절절 너무 많이 이어져 버렸다.
칭찬도 한두 번이지, 자신의 눈앞에서 노래까지 불러버리자 리시스는 이제 민망함을 넘어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주변에서 꽃을 팔던 아이들이 악사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기까지 했다.
“리시스! 리시스! 천재 리시스!”
즉석에서 만든 노래는 지극히 단조로웠고, 그만큼 따라 부르기도 쉬웠다.
아이들이 사방에서 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마저 뭔지도 모르고 흥얼흥얼 따라했다.
“리시스! 리시스! ……그런데 리시스가 뭐야?”
“사람 이름 아니야? 전략 천재, 수학 잘 푸는…….”
“아아! 그런데 그게 누군데?”
노래의 주인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익어버린 아가씨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본인이 꽃이 되어버릴 것처럼 많은 꽃을 들고 있었다.
“리시스! 리시스!”
“리시스! 꽃 받으세요!”
“제 꽃도 받아 주세요!”
사람들은 리시스의 이름을 노래하며 저마다 꽃을 안겨주었다.
주인공을 찾은 사람들의 노래가 하나로 합쳐졌다.
성대한 환호 속에 리시스는 부끄러우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사람들이 왜 이러는 거예요…….”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다.
키에르트는 싱긋 웃으며 꽃 한 송이를 리시스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스스로 빛나는 사람은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빛나는 법이니까.”
“그게 뭐예요…….”
“지금까지는 너무 깊은 어둠에 파묻혀 살아왔던 것일 뿐이지.”
진작 드러났어야 하는 빛이 이제야 드러났을 뿐이다.
리시스를 가리고 있던 나라, 혈통, 지위, 그런 것들이 없으면 오히려 이렇게 환하게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끌고 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황제 부부의 행진을 위해 길을 막고 있던 호위병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황급히 비켰다.
키에르트는 당당히 대로의 끝에 리시스와 손을 잡고 섰다.
“엇……, 저 사람들은 뭔데 저기에…….”
“황제 폐하 아냐?!”
“그럼 옆은 황후 폐……, 리시스……, 어?”
보통 사람들은 황실의 일에 무관심하다. 황제가 바뀐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도 새로운 황후가 들어왔다더라, 적국의 공주라더라 하는 소문은 났다.
그중 몇은 그 공주의 이름도 알았다.
“리시스……. 리시스 공주!”
드디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앞뒤가 짜맞춰졌다.
자신들이 둘러싸고 꽃을 주었던 그 천재 아가씨가 우리의 황후 폐하였다!
사람의 호감을 사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국가적 원수였기에 얼굴도 모르는 채 욕했고, 스쳐 지나간 인연이라도 있기에 원수라도 좋아했다.
“와아아아!”
“리시스 황후 폐하!”
사람들은 리시스의 앞에 꽃을 던졌다.
순식간에 대로는 꽃길이 되었다.
“이제 돌아갈까. 우리 집으로.”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그 꽃길을 밟으며 황궁으로 돌아갔다.
리시스의 이름은 오래도록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