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축제의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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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축제의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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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축제의 남녀
2022.10.09.
“아, 폐하 오셨어요? 축제날 무슨 급한 일이람.”
키에르트는 최근 들어 아주 바쁜 일만 아니면 리시스의 곁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한 몸인 것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일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 이렇게 가끔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축제인데. 세상 일 참 인정사정없었다.
“그러게. 다 없애버릴까.”
“……진정하세요.”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뒤에서 안고 어깨 위에 턱을 올린 자세로 성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 위치는 황궁 밖이 잘 보이지만 밖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축제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거리의 동태를 살피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래서 이곳은 언제부터인가 진행자 전용석이 되었다.
리시스도 아침부터 와서 자리를 잡고 구경 중이었다.
“축제는 어떤가.”
“잘 되고 있어요. 중간에 주제를 변경했어도 즐거운 건 마찬가지니까요.”
리시스의 말을 증명하듯 길거리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축제는 진행본부에서 주도하는 것도 있지만 자생적으로 퍼지는 분위기라는 것도 있었다.
사방에 장식한 화사한 꽃과 깃발, 이따금 흩날리는 색지, 좋은 향기. 황실 금고를 열어 제공한 먹거리 등이 사람들의 기분을 끌어올렸다.
거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는 노점들이 길에 깔리고, 곳곳에서 길거리 예술가들의 공연과 전시가 이어졌다.
작은 축제는 중간에 몇 번이고 있었지만 이렇게 황실이 주관하는 대대적인 축제는 일 년에 몇 번 없었다.
사람들은 오늘 자체를 즐기기 위해 최선이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이 옮겨왔다.
“그대도 즐거운가.”
키에르트가 함께 거리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물었다.
“저……, 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황후는 축제를 주관하는 사람이지 들어가 즐길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지금도 축제가 벌어지는 길거리를 지켜보며 ‘즐거워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네, 즐거워요.”
“이렇게 지켜만 봐도?”
“제가 계획한 축제가 잘 돌아가는 걸 보는 즐거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도 좋구요.”
“흐음…….”
리시스의 솔직한 대답은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키에르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낮은 신음을 흘렸다.
“폐하는 안 즐거우세요?”
“나도 즐겁긴 하지만……. 더 즐거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무슨 방법이요?”
키에르트는 씩 웃으며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성벽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
리시스는 순간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무 상식적이지 못해서.
“……설마, 나가서 구경하시겠다는…….”
“왜, 안 될 것 있나?”
“……저 사람들 틈에요?”
“싫어?”
리시스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본 적도 없고, 이런 큰 축제를 길에서 즐겨본 적도 없었다.
싫다기보다는, 어떨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폐하는 나가서 구경해 보셨어요?”
“아니.”
키에르트도 곱게 자란 황태자여서 직접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의욕이 생기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오죽하면 호위 기사나 유모가 ‘원하신다면 목숨 걸고서라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고 선언할 정도였을까.
어린 시절, 궁에서 탈출하는 건 황족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거치는 과정이었다. 키에르트는 그 과정이 없었다.
그런데 다 큰 지금, 그 유혹을 느꼈다.
“그러니 이제라도 한번 해 볼까 해.”
다 큰 황제 폐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선황은 저 먼 세상에 가 있고, 신하들도 갑작스러운 호위 영역 변경에 하얗게 질릴 뿐이지 황제의 행차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 혼자 가면 재미없을 것 같고……, 그래서 그대와 함께 가고 싶은데.”
“어…….”
“나중에 혼나도 같이 혼나는 게 낫지 않겠어?”
감히 황제 폐하를 혼낼 사람은 없지만, 리시스는 말도 안 되는 그 설득에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내민 손을 덥썩 잡았다.
“그래요……. 두 분이라도 행복하십시오…….”
옆에서 허멀 후작이 힘없이 응원했다.
자신은 축제 준비로 뼈가 빠져도, 결국 두 분이 즐거우면 됐다…….
***
“진짜 가는 거예요?”
옷을 갈아입고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던 리시스는 막상 성문 앞에 서자 긴장했다.
두 사람이 선 곳은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는 작은 성문이었다.
하지만 축제의 여파는 이곳까지도 이어졌다. 아마 온 황도가 들끓고 있어 사람이 없는 곳이 없을 것이다.
“싫은가?”
“너무 좋아서요.”
리시스는 생긋 웃으며 키에르트의 손을 잡았다.
축제 구경을 사람들 틈에 섞여 하는 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아 아쉬운 마음도 없었는데. 막상 이렇게 할 수 있게 되자 가슴이 설렜다.
“저 어때요?”
“언제나 그렇지만 예쁘지.”
“아이, 참…….”
키에르트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정말 예뻐 보여서 예쁘다고 했을 뿐이다.
저번 시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번에는 그때보다 조금 더 화려하고 가벼운 옷에, 망토는 쓰지 않았다.
어차피 황제 부부를 알아볼 사람들은 망토를 써도 알아보고, 못 알아보는 사람들은 망토가 없어도 못 알아본다는 것을 깨달은 덕분이었다.
오늘은 축제라서 귀족들도 길에 나와 구경을 했다. 굳이 평민처럼 보일 필요가 없으니 적당히 화려하고 예쁜 옷으로 축제 분위기를 내 꾸밀 수 있었다.
“그럼, 갈까.”
키에르트의 눈짓에 똑같이 평복을 한 미하엘이 문을 열었다. 그 말고도 축제가 벌어지는 길거리에는 곳곳에 배치된 호위 기사들이 있었다.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와! 저기 봐!”
“저기 저기! 저기서 맛있는 냄새 나!”
살짝 열린 문틈으로도 축제의 뜨거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그 바람에 리시스도 살짝 흥분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을 꽉 붙잡고 축제가 벌어지는 길로 뛰어들었다.
“어서 오세요! 꽃빵 있습니다!”
“다트 던지기 하세요! 상품으로 인형을 드려요!”
“꽃 사세요! 화환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호객하는 소리가 먼저 밀려 들어왔다.
키에르트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노란 꽃빵 하나. 화환은 저 하얀 꽃을 많이 넣어서. 특별히 더 크게.”
……신중하게 접근한 노점에서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구매했다.
“이걸 다 사세요?”
“이런 게 축제의 즐거움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축제를 기획한 입장에서, 그게 맞기는 했다.
하지만 황궁 문에서 나온 지 채 백 걸음도 되지 않아 리시스의 머리에는 왕관보다 더 큰 화환이 얹혔고, 손에는 성대한 꽃다발과 인형이 들렸으며, 입에는 꽃빵을 물게 되었다.
“아주 축제를 제대로 즐기고 계시구먼, 아가씨!”
지나가던 사람이 리시스의 행색을 보고 껄껄 웃으며 칭찬했다.
제대로 즐기고 있는 건 키에르트 쪽인데…….
키에르트는 흥미진진하게 눈을 빛내며 돈주머니를 흔들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게 분명했다. 어쩐지 챙겨드는 돈주머니가 유난히 두툼하다 했다.
키에르트는 오늘 들고 나온 돈을 탕진해 버리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사람 같았다.
“그림 그려드려요! 그림! 기념할 만한 날을 그림으로 남겨두세요!”
길거리에는 화가도 많았다.
꽤 인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둘이 함께 초상화를 남겨둔 적이 없군.”
키에르트의 초상화는 많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매해 한 장씩 남기고 있었다. 황자였으니까, 황제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시스와 둘이 함께 남겨 놓은 초상화는 없었다.
왜 그걸 깜빡했을까.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막 한 화가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났다.
키에르트는 날름 앞에 가서 앉았다.
“여기서 그리게요?”
“이렇게라도 남겨놔야지. 얼른.”
정말 모든 것을 다 체험하시는구나. 리시스는 웃으면서 키에르트가 권한 의자에 앉았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 왕실 사람들은 한 장씩 남겨놓는다는데 리시스는 나중에, 나중에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남기지 못했다.
그림은 워낙 값이 비싸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리시스의 입으로 들어가는 빵 한 조각도 아까워했던 에드린 왕가에서 그런 것을 해 주었을 리가 만무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함께 그리십니까?”
“그것도 되나?”
“물론이지요! 원하는 포즈가 있으시면 취하셔도 되고, 말로 해 주셔도 됩니다.”
“그럼…….”
키에르트의 눈이 리시스의 입술로 향했다.
“꺅! 미치셨어요!”
리시스는 그 음흉한 속셈을 단박에 꿰뚫어보았다.
두 손으로 키에르트의 입술을 막는 리시스를 보며 화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보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행복한 커플이시네요.”
“부부다.”
“오, 부부셨구나. 그런데도 사이가 엄청 좋으세요. 신혼?”
화가는 가벼운 대화를 이어가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시스는 자신을 향한 화가의 시선에 움찔 긴장했다.
“어, 그, 그럼 뭘 어떻게 하면…….”
“방금 전까지 딱 좋았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계시면 됩니다.”
“어, 그 자연스럽게, 어떻게…….”
‘자연스럽게’를 하려니 오히려 더욱 뻣뻣해졌다.
입꼬리를 내리나? 올리나? 눈을 위로 뜨나? 내려 뜨나? 목은 앞으로, 옆으로, 뒤로?
“리시스.”
화가에게 관찰당하는 것이 익숙한 키에르트가 손을 썼다.
두 손으로 옆 의자에 앉은 리시스를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어, 어머! 으악!”
놀란 리시스가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하하하! 그게 차라리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그래? 이건 어떤가.”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허리를 안은 채 올려다보았다.
키에르트의 시선에 리시스도 난감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마주보았다.
그림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화가가 환호하며 재빨리 붓을 놀렸다. 워낙 반응이 좋아서 리시스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스케치만 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완성해 줄 수 있나? 좀 바빠서.”
“물론입니다! 선금만 놓고 가시면 완성해 놓을게요!”
스케치만 해 놓으면 나머지 완성은 화가의 머릿속에 남겨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키에르트의 주문 덕에 리시스는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휴……, 그림 남기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네요.”
리시스는 그새 이마에 배어나온 진땀을 훔쳐내며 한숨을 쉬었다.
키에르트가 대번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힘든가? 이만 돌아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키에르트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리시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조금 있다 황제 부부의 행차가 있을 예정이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조금만 더 돌아보고 들어가요.”
“그래, 다행이군.”
키에르트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
리시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키에르트의 걸음이 일정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