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그래도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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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그래도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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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그래도 깜짝
2022.10.06.
“그대가 먼저 유혹한 거야.”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목을 잡아챘다.
리시스가 놀라 동그랗게 눈을 뜨고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 동그란 눈동자에 또 키에르트의 몸이 지끈 울렸다.
“남자한테 함부로 귀엽다, 이러면서 머리카락 쓰다듬고 그러면 안 돼.”
“어……, 기분 나쁘셨어요……?”
“아니, 너무 좋아.”
“……예?”
리시스는 다시 한번 얼이 빠졌다.
멍했던 것 같은 키에르트가 왜 갑자기 사나워져서 덤비는 것일까.
그 전후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그대가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버렸어.”
“그……, 렇군요.”
“그러니 책임져 줬으면 좋겠는데.”
“어,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될까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목 안쪽을 가볍게 물었다.
따끔한 느낌에 리시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아픔뿐만은 아니었다. 손바닥 안을 간질이는 듯한, 몸 안쪽에서 불을 켠 듯한 감각도 따라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감각.
저도 모르게 기대해버리게 되는, 그 감각이다.
리시스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알면서.”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뒷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조심스레 입술을 마주대 온기를 나누다가, 이로 긁었다가. 입술의 결을 하나씩 세 보듯 비비기도 했다.
익숙한 듯 하지만 이 감각들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말을 전했다.
‘소중함.’
말이 아니어도 소중함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소중하게 다뤄지는 것이었다.
리시스는 두 팔을 뻗어 키에르트의 머리를 안았다.
그리고 자신 역시 소중하게 그를 만졌다.
키에르트가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리시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소중함에 이어, 뜨거운 욕망이 덮쳐들었다.
***
체온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리시스는 새벽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는 열기에 잔뜩 달궈졌다.
한여름의 태양 밑처럼, 온몸이 홧홧하고 숨이 찼다.
새벽의 찬 공기는 키에르트라는 태양을 식히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키에르트의 열기는 리시스의 온몸을 뒤덮었다.
머리카락 끝, 발톱 끝의 작은 모서리까지도 소유하고 싶다는 양 집요하게 매달렸다. 동시에 보물처럼 소중히 어루만졌다.
‘내 것’과 ‘소중함’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키에르트는 그것들을 리시스에게 아낌없이 표현했다.
리시스는 잠들지 못한 채 그것들을 끝없이 곱씹었다.
‘소중함.’
리시스는 옆에서 들려오는 키에르트의 곤한 숨소리를 들었다.
키에르트는 잠자고 있을 때에도 단정한 얼굴이었다. 리시스는 그 얼굴을 마음껏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느라 밤이 새도록 장기만 둔 적도 있었는데.
자는 사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 들까 봐 일부러 자지 않으려 버티기도 했고, 어쩌다 같이 잠든 날은 기절할 것처럼 놀라기도 했다.
키에르트는 특히나 기척에 예민해서 리시스가 그의 잠든 모습을 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리시스가 먼저 깨어나 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어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장난기가 생겼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옆 얼굴선을 손가락으로 따라 그렸다.
손끝에서 그림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내 남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키에르트는 정말 잘생겼다.
“음……, 리시스……?”
리시스가 옆에서 자는 정도로는 깨지 않지만 기척은 느꼈다.
손가락이 얼굴 앞에서 왔다갔다하니 그걸 느꼈나보다.
“아, 죄송해요.”
“음…….”
하지만 키에르트는 눈을 뜨거나 벌떡 일어나는 대신 무겁게 팔을 움직여 리시스의 몸을 더 꽉 끌어안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곤한 숨소리가 이어졌다.
얼굴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이 뛰고 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묵직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키에르트의 품에 안겨 잠드는 것이 편했고, 오히려 더 푹 잤다.
누군가에게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호받는다는 평화. 안정감.
생각지도 못하게 얻은 안정감이었다.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생각했는데 그곳이 살아오면서 가장 천국에 가까운 곳이었다.
‘다시 살던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전처럼 잘 살 수 있을까.’
키에르트가 없는 삶이 이제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심장소리를 손 안에 넣고 가져가고 싶었다. 그럼 조금이라도 함께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가슴에 손바닥을 붙였다.
“……음……, 리시스?”
그 바람에 키에르트가 잠에서 깨어났다.
잠기운이 덜 가신 눈으로 리시스부터 돌아보더니, 습관처럼 입을 맞춰온다.
리시스도 웃으며 입술을 반겼다.
그리고 그 입술이 떨어졌을 때,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불쑥 본심을 토해버렸다.
“폐하. 저도 폐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요.”
키에르트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눈가에 매달려 있던 잠기운도 확 날아갔다.
“그럼 가지 마.”
키에르트는 두 팔로 리시스의 몸을 꽁꽁 묶듯 옭아맸다.
키에르트의 심장소리가 온몸을 쿵쿵 울렸다.
이것을 떠밀어내야 한다. 멀어져야 한다.
그 사실이 너무 슬펐다.
“……하지만 가야 해요.”
“가지 않을 이유가 필요하면, 내가 그 이유가 되어주면 되지 않나.”
“제가 아니면 안 돼요.”
두 사람 다 리시스가 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못 본 척,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새벽, 리시스가 먼저 그 외면하던 진실을 꺼내들었다.
키에르트도 마냥 연기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리시스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키에르트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간다면 차라리 잘 다녀오라며 멋있게 보내주고 싶은데.”
“저도 그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키에르트가 웃는다면 자신도 같이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상대의 마음이 가벼우면 받아들이는 쪽도 가벼울 수 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지금까지 받아 본 중 가장 무거운 마음을 주었다.
도저히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을 정도로 무거워서, 그래서 지금 이렇게 대처에 헤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놓아버리면 영영 이별이 될 것 같아서 불안해.”
“그럴 리 없잖아요. 제가 쉬란의 황후 자리를 놓고 어디를 가겠어요.”
상식적으로 쉬란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리시스가 제일 손해다.
“혹시 모르지 않나. 황후고 뭐고 자유로운 삶이 좋다고 산속에 처박혀 버리고 싶어 질 수도 있고.”
“평생 그러진 않겠죠.”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은 왜 안 하는데?”
“……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엄마와 숲속에 처박혀 살았던 때가 아주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럴 리가 없었다.
“……돌아올 거지?”
반쯤 장난이었던 리시스와 달리, 키에르트는 진심으로 조바심을 냈다.
“그럼요.”
리시스도 장난을 거두고 키에르트의 몸을 마주안았다.
이제는 키에르트의 품이 당연히 돌아올 곳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나라인 에드린으로 가면서, 적국인 쉬란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해지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예?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허멀 후작은 굳어버렸다.
가능하다면 그냥 죽어버리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리시스는 못 본 척 딴 곳을 바라보며 정직하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프러포즈는 취소야.”
“……예?”
몇 번을 들어도 현실감이 생기지 않아 허멀 후작은 같은 되물음을 반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축제 준비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키에르트의 몫으로 남겨놓은 프러포즈만 빼고 무대며, 분위기며, 모든 것이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축제의 주제 자체가 프러포즈인데, 그 프러포즈가 빠지면 어쩌라는 말씀이신지……?”
이미 소문도 웬만큼 퍼져나갔다.
축제 날짜에 맞춰 프러포즈를 하겠다는 연인들의 제보가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프러포즈만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내세워야지. 분위기도 프러포즈처럼 예쁘고 화려한 걸로.”
“그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으음…….”
리시스는 웃으면서 억지를 부렸다.
“승리?”
허멀 후작이 오랜만에 폭발했다.
***
여름 축제의 프러포즈는 결국 취소되었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뼈를 갈아 넣어 만들어 낸 분위기는 비슷하게 유지되었다.
이제 와서 ‘처음부터 다시!’를 외치기에는 인력과 시간 둘 다 부족했다.
어차피 프러포즈도, 축제도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대충 분위기 상 밀어붙일 수는 있었다.
“저 카펫…….”
“아아……, 파티용이랑 행사용이 다른 거 이번에 확실히 배웠어요, 후작님.”
“그렇지요……. 그래도 저걸 산 건 후회하지 않습니다…….”
“결혼 행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일상적인 느낌을 주게 하려고 참 많이 고민해서 산 건데.”
허멀 후작과 앨린은 축제의 가장 성대한 장, 황궁 문 앞을 내려다보며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이어갔다.
결국 프러포즈는 취소되었다.
프러포즈를 받은 뒤에 출전해버리는 신부는 누가 보아도 영 이상했다. 하지만 애써 조성해 놓은 분위기를 홀랑 가져다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대충 갖다 붙인 것이, ‘처음’이었다.
“쉬란에 처음 오신 황후 폐하를 환영하고……, 또 두 나라 사이의 평화가 처음이라는 의미도……, 나쁘지는 않네요…….”
“음…….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역시나 프러포즈만큼 만족스러울 수는 없었다.
축제의 고백만큼 설레는 이벤트는 없는데. 그걸 딱 내보였어야 사람들이 에드린에 가지고 있던 반감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건데.
지금 축제의 분위기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면 성공이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리시스만 태연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전혀 아쉽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자신의 연애가 아니어도 받는 것이 없으면 속이 탄다.
황제 폐하야 옆에서 챙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열심히 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프러포즈는 말이 달랐다.
허멀 후작은 연애와 결혼에 생각과 욕심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했다.
정작 당사자인 리시스는 어깨만 으쓱했다.
“프러포즈 안 받았다고 결혼을 안 한 것이 되는 것도 아닌데 왜?”
“…….”
이렇게까지 현실적인 황후 폐하를 감동시킬 프러포즈가 있기는 할까.
허멀 후작은 아쉽던 마음을 접었다.
그냥 안 하는 게 나았을 수도 있겠다.
꽃도 좋아하는 사람한테나 선물해야지, 별로인 사람한테 줘봤자 처리 곤란한 쓰레기일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역시 ‘그래도.’를 외쳤다.
처음 계획이 깜짝 고백이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 뭔가 ‘깜짝’을 따로 준비하셨을 수도 있지 않을까.
“황후.”
그때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키에르트가 등장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멀 후작과 앨린의 눈이 동시에 키에르트의 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