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 울고불고, 매달리고, 빌고 (122/153)


122. 울고불고, 매달리고, 빌고
2022.10.02.



 


“아, 아니……, 그게…….”

키에르트의 기세에 긴장한 리시스가 말을 더듬었다.

키에르트에게 알리는 건 훨씬 나중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도 아니었다.

더 절절하고 애틋한 분위기 속에서 눈물어린 고백과 헤어짐, 그런 걸 생각했다.


“안 돼.”

“예?”

키에르트는 물어 봐놓고서는 리시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냅다 반대부터 했다.


“제가 어딜 간다고 말도 안 했는데…….”

“아무튼 안 돼. 그대가 좋은 곳을 가려고 했으면 렉싱턴 장군이 저렇게 소리를 질러댔을 리가 없지.”

“그렇습니다.”

이상한 데서 두 사람의 죽이 잘 맞았다.

리시스는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일단 차분하게 제 말을 들어봐 주세요. 장군님도.”

“싫습니다.”

“거절하지. 들어서 바뀔 일도 없는데 괜히 그대 입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말 좀 한다고 입이 아프지는 않아요…….”

“배고파지잖아.”

그냥 안 듣겠다는 말이었다.

리시스의 배신감은 키에르트에게 집중되었다.


“제 말은 뭐든 다 들어줄 것처럼 그러셨으면서! 어떻게 사람이 바뀌어요?”

“그 말은 맞지 않는군.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지.”

이미 흥분해 있던 리시스는 침착한 키에르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이익……!”

말문이 막힌 리시스가 분해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키에르트는 그걸 보고서는 성큼 다가와 손을 쥐었다.


“이것 봐. 배가 고파서 손이 떨리는 것 아닌가.”

“폐하 때문인데요!”

기어이 키에르트에게도 큰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한 채 시급한 대처부터 서둘렀다.


“점심 먹고 얘기하지.”

애초의 목적이 리시스에게 점심을 챙겨 먹이는 것이었다.

한 번의 사건으로 리시스가 알아서 잘 먹을 것이라는 신뢰가 사라졌다. 하녀들이 챙긴다고는 해도 눈앞에서 먹는 것을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할 것이다.


“렉싱턴 장군은…….”

“저도 같이 먹겠습니다.”

리시스가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렉싱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있으면 잔소리가 네 배가 된다는 것을 아는 리시스가 축객령을 내렸다.


“장군님은 별궁 가서 드세요. 그리고!”

일단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지만 허락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오늘부터는 포로답게 감금입니다.”

“뭐라고요?”

“모셔.”

리시스는 따져 묻는 렉싱턴의 말을 무시하고 문밖의 경비병에게 명령했다.


“탈출해서라도 갈 겁니다! 이거 놔!”

“장군이 탈출한 순간 나도 출발하는 거야.”

리시스의 사나운 협박에 렉싱턴의 입이 다물렸다.

그렇게 렉싱턴은 경비병의 손에 황후궁에서 쫓겨났다.

잔소리꾼 하나를 보내버렸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리시스는 긴장하며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일단 밥부터 먹을까요?”

밥은 아주 좋은 도피수단이었다.

***



“그러니까.”

키에르트는 식후 디저트까지 깔끔하게 챙겨 먹이고, 따져 물을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딜 간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양 웃으며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키에르트를 일하러 보내버리려 했던 리시스는 그만 케이크 사레가 들어버렸다.


“케헥! 컥!”

“차 한 입 마시고. 어딜 가는지부터 들어보지.”

“쿨럭!”

리시스는 눈물을 찔끔 훔치며 차를 홀짝 마셨다.

혹시 차를 마시는 동안 키에르트가 마음이 바뀌지는 않을까, 하는 가엾은 소망을 안고.

당연히도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독촉의 미소를 보냈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수도 있었다.

리시스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숨을 골랐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키에르트는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이건 피해갈 수 없게 생겼다.

결심한 리시스는 눈을 번쩍 떴다.


“줄곧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특수부대와 렉싱턴 장군의 병력을 끌고 ‘리시스’로서 국경에 가면 아무 트집 잡히지 않고 끝낼 수 있어요. 렌데일과 로구안 둘 다 반드시 이길 자신도 있고요.”

“응, 안 돼.”

“네?”

뭐라고요?

기껏 용기 내어 단숨에 말했는데, 키에르트는 너무 쉽고 단순하게 대답했다.

벙찐 리시스의 얼굴을 보며 키에르트는 다시 한번 미소와 함께 친절히 대답을 반복해 주었다.


“안 돼, 못 가. 안 보내줄 거야.”

“……제가 한 말 안 들으셨어요?”

“들었어.”

“근데도 안 돼요? 왜 안 돼요?”

에드린은 정략결혼의 무효를 주장하니 리시스는 ‘쉬란’을 대표하지 않을 수 있다.

알헨크의 움직임도 로구안에서는 ‘왕자의 독단’이라고 주장하니, 마찬가지로 리시스 역시 ‘에드린 공주의 독단’이라 우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렌데일에 관해서는 반대로, ‘황후’이기 때문에 대응할 수 있다.

‘에드린의 공주’이자 ‘쉬란의 황후’면서, 동시에 에드린의 공주 자리를 부정하고, 쉬란의 황후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역으로 얻는 이점이었다.

추가적으로 리시스의 실력은 말해 뭐할까.

키에르트도, 알헨크도, 렉싱턴 장군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작전능력.

거기에 마침 리시스가 훈련시키던 쉬란의 특수부대와, 전쟁터에서 함께 굴렀던 에드린의 정예들도 쉬란에 와 있다. 거기에 매일같이 땀방울 쏟아지는 합동훈련도 진행 중.


“폐하가 직접 움직이시는 거나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훨씬 깔끔하고 확실하잖아요. 제가 죽으러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기고 오겠다는 건데.”

“그래도 싫은데.”

키에르트는 웃는 얼굴로 참 잘도 부정의 말을 입에 담았다.

말이 통하지 않겠다 깨달은 리시스는 입을 다물고 키에르트를 노려보았다.

왜 오늘따라 이렇게 애처럼 떼를 쓰실까?


“그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야. 그대가 잘났고, 강하다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전쟁터에서 키에르트만큼 직접적으로 리시스에게 털려 본 사람은 없다.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적이었기 때문에 리시스의 강함을 잘 알았다.

처음에는 신방에 들어가는 것이 꺼려질 정도로 저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대가 지금 그대의 몸보다 키가 머리 세 개만큼은 더 크고, 몸집이 두 배는 커져도. 힘이 다섯 배 정도 세져도, 나는 반대할 거야.”

“제가 그래도 가겠다고 우기면요?”

“끝까지 반대하겠지.”

“억지로 가면요?”

“매달리겠지.”

키에르트가 매달린다고?

리시스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대처하려 했는데 이미 키에르트는 그 웃음기를 보아버렸다.


“그뿐인 줄 아나? 울기도 할 거야.”

“……예?”

“울며불며, 매달리고, 빌기도 해 볼까?”

“……어…….”

그쯤 되니 이제 웃기지 않았다. 무서웠다.

울며불며 매달리고 비는 키에르트라니. 한편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과, 어떻게 그 꼴을 보냐는 마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멈추지 않았다. 한 술 더 떴다.


“더 해볼까? 그걸로도 모자라면 바닥을 뒹굴며 떼도 쓸 거야.”

“그, 그만…….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대는 이제 내 사람이니까.”

“그럼 제가 폐하의 사람이 아니게 되면요?”

“혹여라도 이혼이나, 결혼무효 따위를 입에 담지는 마. 그딴 건 절대 인정 못 하니까.”

키에르트의 으르렁거리는 협박에 리시스는 입을 합 다물었다.

사실 생각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동맹이 아직 튼튼하다면, 그걸 믿고 에드린의 결혼무효를 받아들인 뒤 다시 결혼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꺼내면 안 되겠다.

리시스도 작전을 바꿨다. 키에르트가 감성에 의지해서 우기는 쪽을 선택했으니, 리시스도 똑같이 우겨보기로.


“하지만 저는 가고 싶어요. 그러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요.”

렉싱턴이 말한 대로 리시스는 전쟁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피 냄새, 전쟁터의 날선 공기,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삼엄한 긴장감, 이 모든 것을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하지만 자신이 나섬으로써 많은 것을 지킬 수 있었다.

렉싱턴 장군, 키에르트, 자신의 명예, 에드린의 백성, 그리고 쉬란까지도.

리시스의 굳은 결심을 엿본 키에르트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키에르트는 렉싱턴 장군처럼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워가며 말릴 생각은 없었다. 싸울 일도 아니었다.


“그대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가고 싶다면 가야 하고. 그대의 자유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리시스는 한 번도 키에르트의 손바닥 안에 들어왔던 적이 없었다.

손에 쥐려고 한 적도 없었다.

리시스에게는 리시스의 인생과 선택이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황제로서의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순간, 그들의 모든 관계는 연약한 파이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키에르트는 강제라는 것을 생각지도 않았다.

다만.


“계산을 한다면 그대의 말이 다 맞아. 하지만 싫어.”

“예?”

이제 포기하고 보내주려나 했는데, 그건 리시스의 착각이었다.

키에르트는 아직 본인이 선언한 ‘울고불고, 매달리고, 빌고’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 봐. 갔다간…….”

“……갔다간……?”

키에르트는 웃으며 협박했다.


“말라 죽을 때까지 울기만 할 거야.”

“하하하, 말도 안 돼요.”

“그럴까?”

“……아…….”

 

 
같이 웃으며 농담으로 넘겨버리려던 리시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왠지 키에르트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던 리시스는 황급히 고개를 저어 생각을 지웠다.

그 말은 금지였다.

‘스스로를 소중히.’, ‘마땅히 존중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리시스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키에르트가 울고불고 하겠다는 말이 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렉싱턴 장군님이 죽을 곳 찾아 간다는 말에 이성을 잃었으니까…….’

리시스는 죽으러 가는 건 아니고 죽이러 가는 것이지만, 전쟁터는 위험부담이 있는 곳이었다.

자신이 키에르트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불안하고 싫을 수 있었다.

문득 자신보다 늘 크고 단단해 보이는 키에르트가 보송보송하고 작아 보였다. 이상하지만, 까마귀 새끼마냥 귀여웠다.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키에르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

키에르트가 머리를 내어준 채 의문스러운 눈으로 리시스를 쳐다보았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머리를 쓰다듬는 데 정신이 팔렸다.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지는 매끌매끌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기분좋았다.

덩달아 보송보송한 기분이 된 리시스가 슬쩍 풀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폐하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셔도 귀엽네요…….”

“?!”

키에르트는 잠시 넋이 나갔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귀엽다고……?


“말이 헛 나온 건가, 헛소리를 할 만큼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제대로 말했고요, 지극히 정상이에요. 그냥 폐하가 귀여우신 것뿐이고요.”

다시 한번 리시스는 당당히 선언했다.

키에르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울고불고, 빌고, 떼쓰고……, 를 다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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