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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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2022.09.29.
“황후 폐하. 렉싱턴 장군이 왔습니다.”
“렉싱턴 장군님이?”
세니아의 행방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렉싱턴 장군이 찾아왔다.
리시스는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방을 나섰다.
“아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안색이!”
렉싱턴은 응접실에 들어서는 리시스를 보기가 무섭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시스는 놀라 자신의 얼굴을 더듬더듬 만졌다.
눈곱만 떼고 옷만 갈아입은 채 내려왔는데, 그게 문제였나?
“쓰러지셨다는 말에 걱정이 되어 와 볼까 말까 내내 고민했는데……, 와 보길 역시 잘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황제가 붙어 있다고 해서 괜찮으려나 했는데, 역시 믿을 게 따로 있지!”
렉싱턴은 발을 쾅쾅 구르며 분개했다.
“아, 아냐, 폐하는 잘…….”
리시스는 렉싱턴을 말리려다가 잠시 생각했다.
폐하께서 잘 먹이고 잘 재워주시긴 했지.
본의 아니게 귀찮을 정도로 달라붙고, 아침에는 체력 소모까지 시켰다. 모든 것에 ‘잘’이 붙는 건 맞지만 잘 ‘보살펴’ 준 것까지 맞을까?
“괜히 편들지 마십시오! 한 번 남편이라고 영원한 남편인 것처럼 매달릴 필요 없습니다!”
렉싱턴은 꾸준히 이혼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리시스가 행복하다니 참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행복이라면 당연히 말려야 하지 않겠는가.
“아, 아니야……. 진짜 배 터질 만큼 먹이고, 눈이 부어서 안 떠질 만큼 재워줬어. 침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했다고.”
리시스는 딱히 편을 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억울한 누명은 벗겨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끔찍하게 먹인 것은 사실이었다.
“안 먹어서 쓰러진 거라며 틈만 나면 먹이시는데…….”
“……흠. 그거 하나는 잘 했군요.”
“잘 하긴! 내 배를 봐!”
리시스는 태어나 처음 가져 본 통통한 배를 내밀며 호소했다.
며칠 만에 드레스를 입는데, 허리가 들어가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
그러나 렉싱턴은 통통해진 리시스의 배가 마음에 들었다.
키에르트는 참 마음에 들지 않는데, 가끔가다가 이렇게 한 번씩 정말 괜찮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드시고, 잘 쉬었는데 안색은 왜 그렇습니까?”
말을 들어보니 몸은 잘 쉰 것 같은데 리시스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아 보였다.
“아……, 그냥 좀. 신경 쓸 것이 있어서.”
리시스는 다시 한번 뺨을 문질렀다.
거울을 좀 제대로 확인하고 나올 걸 그랬다.
렉싱턴을 오래 기다리게 하기 싫어 대충 달려 나왔더니 영 몰골이 말이 아닌가보다.
“뭐 때문에 신경을 쓰시는 겁니까. 혹시 황제가 속썩입니까?”
“뭐? 아냐. 황제 폐하 때문은…….”
이번에도 리시스는 제대로 말을 맺지 못했다.
생각이 너무 넘쳐나서 말을 하면서도 시시각각 새로운 생각이 끼어들었다.
지금 리시스를 괴롭히는 건 전쟁이었지만 결국 키에르트가 걱정되는 것이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이건 렉싱턴과 상의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 걱정돼서 온 거야?”
리시스는 더 깊은 이야기가 나오기 전, 화제를 바꾸었다.
자신이 걱정되어서 온 것이면 더 큰 걱정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예, 저와 헤어진 직후에 쓰러지셨다 하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녀장이 별 얘기를 다 해 줬네.”
“잘 지내시냐는 물음에 답해줬을 뿐입니다.”
렉싱턴이 얼굴 볼 때마다 리시스의 안부를 물으니, 하녀장도 적정선에서는 이야기를 해 주고는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긴히 상의드려야 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응?”
렉싱턴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지금까지는 리시스를 아끼는 렉싱턴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에드린의 장군 렉싱턴이었다.
리시스도 그 차이를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무슨 소식이 들어왔어?”
렉싱턴은 렉싱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연락망이 있을 것이다. 에드린 내부에 관한 일이라면 쉬란보다 빠르고 많은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그게.”
“……좋지 않은 소식인 모양이네.”
렉싱턴의 안색도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은 같았다.
렉싱턴도 기왕이면 별일 아닌 것처럼, 웃으며 리시스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해주면 안 보내 줄 거야.”
리시스는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렉싱턴이 이렇게 각을 잡고 말을 꺼낸다는 건,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꺼내려는 것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렉싱턴이 돌아가는 이유는 분명 에드린의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의미일 터다.
숨겨보려던 렉싱턴은 맥이 탁 풀렸다.
“……안 보내주시면 도망칠 겁니다.”
렉싱턴이 작정하고 탈출을 감행하면 성공확률은 반반이었다.
그만큼 렉싱턴과 동행한 사절단은 손발이 잘 맞는 정예이기도 했다. 적국에 가까운 쉬란에, 선전포고에 가까운 소식을 전하러 가는데 이 정도의 병력은 갖춰야 했다.
리시스도 같이 굴러봐서 그 솜씨를 익히 알았다.
쉬란의 특수부대로 만들어 보려고 한 원형이 바로 그들이니까. 그래서 반반이었다.
“도망칠 생각부터 하지 말고 설득이라도 해 봐.”
리시스로서는 뭐 하나라도 더 소식을 듣는 쪽이 이득이었다.
렉싱턴은 그 험난한 전쟁터에서도 리시스가 험한 소식을 듣는 것을 싫어했다.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작전을 짜는 건 오히려 리시스인데 세상에 그런 건 없는 것처럼 소식을 못 듣게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더는 렉싱턴이 보호해 주어야 할 어린 공주 리시스가 아니니까.
“리시스 님.”
이제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황후 폐하’는 고집 때문에 못 쓰고 있지만, 적어도 리시스는 이제 리시스로서 홀로 서고 있었다.
렉싱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리했다.
“예상하신 대로, 국경의 소식이 닿았습니다. 그 지역의 영주인 하웰 백작은 수도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영지를 방치하고 있어 사실상 민병대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국경을 그런 식으로 내팽개쳐두고 있었던 사실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심한 소식이 남아 있었다.
“최근 로구안의 병사와 마찰이 심해지고 있다가, 민병대가 와해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습니다.”
“……밀렸다는 소리야?”
“실질적으로는 로구안이 점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쉬란의 병사가 섞여 있다는 소문도 같이 돌고 있다 합니다.”
방금 전 율라에게 들은 세니아의 행방이 퍼뜩 떠올랐다.
“렌데일의 사병…….”
영지를 가진 귀족은 사병을 키울 수 있다.
그 사병은 영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사병이 다른 영지로 들어간다면 영지전의 시작이 된다. 더 나아가 무단으로 황도에 들어가면 반역이다.
그러나 타국이라면?
변경의 영지는 국경을 지킬 의무가 있다. 타국이 위협을 가해왔다, 그래서 응전했다. 이건 군사력을 움직일 완벽한 사유가 되었다.
지금은 마침 에드린에 로구안의 병사가 들어와 있으니 말을 맞추면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로구안의 위협에 맞서 싸우다가, 전선이 밀려 황도까지 오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명분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렌데일의 사병까지 합세한 것이라면……. 정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치려는 쪽이 에드린일지 쉬란일지 알 수 없을 뿐, 대대적인 공격은 분명 있을 것이다.
렉싱턴이 애가 닳아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이 사태에 조급해지는 것은 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장군이 가서 해결이 된다면 보내주겠어. 하지만.”
“적어도 사태를 지연시킬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판이 커지면 왕께서도 어떻게든 움직이시겠지요.”
“장군이 죽으면 판이 커지겠지.”
렉싱턴은 대답하지 못하고 쓰게 웃었다.
리시스는 결심했다. 이 이상은 미룰 수 없다.
내내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꺼내놓을 때가 왔다.
“내가 갈게.”
“예?”
렉싱턴은 리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날개 달린 물고기를 보는 양, 물갈퀴 달린 새를 보는 양, 별 해괴한 것을 다 본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만.”
“한쪽 팔 못 쓰는 장군도 전쟁터로 가겠다고 찡찡대는데, 두 팔 두 다리 멀쩡한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 그리고, 내가 가면 쉬란의 특수부대도 함께 가. 반드시 이길 수 있어.”
렉싱턴은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황당하고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든 해소해 보려는 움직임이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그러나 결국 터졌다.
“왜 말이 안 되는 소린데?!”
리시스도 같이 터뜨렸다.
그동안 이걸 고민하느라 얼마나 끙끙 앓았는데.
죽으러 전쟁터 가겠다는 사람이, 죽지도 않을 자신에게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어떻게 일국의 황후까지 되신 분이 전쟁터에 직접 나섭니까!”
“공주일 때도 나섰는데 황후라고 왜 못 나서!”
“제가 그 꼴을 보려고 여태 산 줄 아십니까! 지금껏 그 고생 하셨으면 예쁜 옷 입고,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만 보며 살아 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
“나도 렉싱턴 장군님이 안 죽는 게 소원이야. 내 소원은 왜 안 들어주려고 하면서 자꾸 우겨?!”
서로를 아끼는 만큼 물러날 수 없어 목소리가 커졌다.
전장에서 작전회의를 할 때는 종종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며 싸웠다.
워낙 긴밀하게 돌아가는 곳인데다 목숨까지 걸렸으니 감정이 절로 격해졌다.
쉬란에 온 후로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일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질질 늘어지던 리시스의 신경줄이 오랜만에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렉싱턴 장군님이 뭘 알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공주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는 자부합니다!”
“알면! 알아서 뭐!”
“전쟁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싫어하셨잖습니까!”
렉싱턴의 맞는 말에 리시스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면 거 보라고, 드러눕기라도 하겠는데 하필 정곡을 찔렸다.
우물쭈물하는 리시스를, 렉싱턴은 가차 없이 몰아붙였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희생자가 나오는 날엔 속상해서 잠도 못 잤으면서. 큰 전투 이후엔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우는 소리를 들었던 제가, 예, 이게 최선의 선택이니 전쟁터로 가시라고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만히 있는 건 더 싫다고! 내 에드린이 당하고만 있는 꼴을 어떻게 보고 있어. 갈 거야!”
같이 열이 오른 렉싱턴이 울컥한 마음에 다시 한번 소리를 치려던 순간이었다.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예의고 절차고 다 내다버린 키에르트가, 머리끝에서 김을 뽑아낼 것 같은 열기를 뿜으며 들이닥쳤다.
“어딜 가?”
그러나 그 목소리는 한겨울의 얼음처럼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