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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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기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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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기어이
2022.09.25.
자꾸만 스스로 허락한 유예가 길어졌다.
“아침 먹어야지.”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낮고 부드러운 음성에 잠에서 깨어났다.
며칠째 반복되고 있는 아침이었다.
“으응…….”
“졸려? 더 잘 텐가?”
“모르겠어요…….”
리시스는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키에르트가 옆에서 잠을 깨워주듯 팔다리를 주물렀다.
이대로 더 잘까말까 잠시 고민하던 리시스는 눈을 떴다.
키에르트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입술을 마주댔다.
“아침 먹어야지.”
“……눈 뜨자마자.”
“차려만 놓고 먹고 싶을 때 먹어.”
말은 저렇게 하면서 리시스가 결국 입에 넣을 때까지 끝까지 권할 거다.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한 순간이라도 먹는 것을 멈추면 죽을 것처럼 챙겨댔다.
며칠째 황제 부부의 업무는 중지된 상태였다.
축제도, 전쟁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무도 그 이야기를 재촉하지 않았고 두 사람 역시 암묵적으로 피해갔다.
그러나 스며들고 있는 긴장감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모른 척 늘어졌다.
“누워 있을래요.”
“그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팔을 끌어와 벴다.
키에르트는 순순히 팔을 내어주며 다른 손으로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가슴 위를 토닥거리는 묵직한 손길을 느끼며 리시스는 다시 무거워지려는 눈을 깜빡였다.
“더 자도 돼.”
“네…….”
자고 싶을 때 자도 된다.
자는 동안 방해하는 사람도 없다.
잠자리는 향긋하고, 부드럽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어느 것 하나 불만스러운 것이 없었다.
늘 최선을 고르며 나아가는 것이 인생인 줄 알았는데 최고가 있었다.
한 번 쥐어버린 최고의 것을 손에서 놓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리시스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가진 것을 누리기로 했다.
몸을 비틀어 키에르트의 가슴 쪽으로 얼굴을 묻고 본격적으로 잠을 청하자, 키에르트가 등을 끌어안아 주었다.
“폐하.”
“쉿.”
깜빡 다시 잠이 들었던 리시스는 몸을 울리는 키에르트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오늘도 회의를 취소하실 겁니까.”
“그래.”
“밀린 사안이 꽤 됩니다.”
제롬이 황제의 땡땡이를 참다못해 찾아온 모양이다.
키에르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더 이상은 리시스가 참아줄 수 없었다.
“갔다오세요.”
“깼나.”
키에르트가 제롬을 째려보았다.
충신은 언제나 욕을 먹는 법이다.
리시스는 잠기운이 덜 가신 눈으로 배시시 웃으며 키에르트의 가슴을 툭 때렸다.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마시고요.”
“감히 황후의 잠을 깨웠는데 괜한 사람이라니.”
“일어날 때 됐어요. 이제 진짜 일어날 거니까 폐하도 얼른 갔다오세요.”
“그대 아침만 챙겨 먹이고.”
평소였다면 어림없는 소리라며 내쫓았겠지만, 리시스는 승락했다.
어차피 며칠째 치고 있는 땡땡이, 아침에 가나 점심에 가나 크게 다를 것 없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아침식사에, 차, 디저트, 과일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이고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점심 거르지 말고. 무리해서 돌아다니지도 말고. 누가 일이 급하다고 찾아와도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예에에.”
몰랐는데 키에르트는 정말 잔소리가 심했다. 딱 전선에 있을 때의 렉싱턴 같았다.
‘둘이 닮아서 서로 더 싫어하나?’
일리 있는 추측이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며 손을 휘저었다.
“가실 거면 빨리 갔다 빨리 오세요.”
“……그러지.”
대답은 하면서도 발이 선뜻 문을 향하지 않는다.
리시스는 결국 키에르트의 등을 밀었다.
“다녀오세요.”
직접 문까지 열고 내보내자, 키에르트가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차피 황궁 안에서의 짧은 이동이다. 아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 거고, 리시스는 그 동안 내내 황후궁을 지키고 있을 건데.
그런데도 키에르트는 평생을 헤어지는 것처럼 아쉬워하며 질척거렸다.
진짜로 헤어져야 하는 상황엔 어쩌려고.
그때가 되면 이렇게 질척거릴 수도 없을 텐데.
불현듯 그 순간이 온 것처럼 가슴이 울컥했다.
“폐하.”
“응?”
미련을 떨치고 막 돌아서려는 키에르트의 소매를, 리시스의 손이 겨우 붙잡았다.
스쳐 지나갈 뻔한 손길에도 키에르트는 즉시 돌아보았다.
자신의 말을 친절히 기다리는 저 눈빛이 언제까지 자신의 것일 수 있을까.
리시스는 충동적으로 키에르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쪽.
“……?”
키에르트가 한순간에 멍해졌다.
“잘, 다녀오시라고요…….”
리시스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설명했다.
황제 부부는 다를지 몰라도 보통 부부는 출근하는 사람에게 키스로 배웅한다고 들었다.
그냥 그 흉내를 좀 내 보았을 뿐인데……. 키에르트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걸 목격한 것 마냥 넋이 나가버렸다.
키에르트는 얼떨떨하게 리시스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만졌다.
여기에. 자신의 뺨에.
리시스가 무려 ‘자발적으로’ 키스를 해 주었다.
“……한 번 더…….”
“예?”
“한 번만 더.”
“무슨 소리세요. 했잖아요. 끝.”
“키스에 끝이 어디 있나.”
키에르트는 고집을 부리며 리시스의 허리를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키스를 해 주기 전에는 풀지 않을 각오가 서려 있었다.
리시스는 괜한 짓을 했나 후회하며 키에르트의 가슴을 밀었다. 당연하지만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리시스가 졌다.
먼저 도발해 놓은 주제에 모른 척 발을 빼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치사하다 생각한 탓에 밀려버렸다.
결국 다른 쪽 뺨에 키스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내려 했던 리시스는, 입술이 부르트도록 입술을 마주쳐 오는 키에르트에게 밀려 다시 침대에 눕혀지고야 말았다.
***
키에르트가 남겨 놓은 열기의 후폭풍을 감당하느라 리시스는 한참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빈둥대려면 해가 질 때까지도 빈둥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하녀들이 그렇게 두지 않았다.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기필코!”
키에르트의 신신당부도 있었겠지만 하녀들 스스로의 의지도 있었다.
리시스의 공복이란 이들에게 세상의 빛이 꺼져버리는 정도의 두려움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먹어, 먹는다고. 먹을게.”
리시스가 몇 번을 강조하고서야 하녀들은 안심한 표정으로 식사 준비를 하러 물러났다.
리시스의 곁에는 언제든 잔심부름을 하기 위한 하녀 한 사람만 앉아 대기했다.
‘그 아이네?’
세니아의 저택에서 일했던 율라였다.
“율라였지?”
“예, 황후 폐하!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율라는 감격해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여차하면 울 기세였다.
“진정해 봐.”
“예! 황후 폐하! 진정하겠습니다!”
대답은 그러겠다고 하는데 눈가에 고인 눈물방울은 더 커졌다.
디아린은 난감하게 율라를 바라보았다.
율라는 하녀들 중 가장 열과 성을 다하는 아이였다.
더구나 렌데일에서 가지고 온 정보 덕분에 알헨크의 위험성을 재확인 할 수도 있었다. 그 공적을 물론 잊을 리 없다. 그리고 그 공만큼의 실적을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디아린은 주변에 케레스에게 얘기를 물어 나를 사람이 없는지만 확인했다. 일을 하면 혼날 테니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뭐든 하문하십시오!”
“혹시 요즘에도 렌데일 가문과 연락이 닿아?”
“저, 저 이제는 그런 짓 안 합니다! 정말입니다!”
율라는 대번에 파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내 정보 가져 가냐고 따지는 게 아니고…….”
“황후 폐하의 정보는 물론, 황궁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정보도 나르지 않습니다!”
“그럼 연락도 아예 끊겼어?”
리시스의 이어지는 질문에, 율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쥐새끼였던 과거를 생각난 김에 패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세니아 밑에서 일했던 경력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율라는 바로 리시스가 뭔가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하녀들은 율라의 성화에 식당과 다른 곳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방 안에 있는 하녀는 율라뿐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누가 훔쳐 들을지 몰랐다.
율라는 습관처럼 은밀하게 물었다.
이번에는 그 처사가 정답이었다.
리시스는 보일 듯 말 듯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긴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렌데일 공작가 내부 상황이 어떤지 좀 알고 싶거든.”
렌데일 공작가는 어지간해서는 밀정을 넣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황제와 황후의 가장 최측근에 밀정이 끼어들지 못하는 것처럼, 렌데일 공작가도 엄중하게 사람을 골랐다.
최근, 렌데일 공작가는 완전히 침묵 중이었다. 그 외의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이상한 일이었다.
리시스의 물음에 율라의 눈빛이 바뀌었다.
“예, 간간이 소식 전달받고 있습니다.”
“잘 이어놓고 있었네?”
리시스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율라가 궁에 다시 들어왔을 때 당부해 놓았던 것이다.
적당히 정보를 내어주어도 괜찮으니 연락은 유지해 놓으라고.
되면 좋고, 안 되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기대보다 나은 소식이 돌아왔다.
“최근 황후 폐하의 세가 커지는 걸 하녀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점점 더 협조적으로, 많은 정보를 주고 있습니다.”
제 이득만 좇아 움직이는 사람은 결국 힘을 따라간다.
아무리 세니아의 위세가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다 한들, 사람의 진심을 거저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진심으로 모시는 율라 한 사람을 얻은 리시스의 승리였다.
“잘됐네. 그럼 렌데일 영지 쪽 소식, 들어온 것 있어?”
“……예.”
율라가 한층 더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안에서는 렌데일 공작님이 황제가 되려 한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세니아 아가씨와 최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오히려 두 분이 황제 자리를 두고 싸울 수도 있다고…….”
“……하하하?”
그 집안도 굉장한 집안이었다.
손에 쥐지도 않은 황제 자리를 가지고 부녀간에 싸움을 벌이다니.
그러다 자멸해 주면 참 고맙겠지만, 그렇게까지 멍청한 이들은 아니다.
“무슨 수로 황위를 가지겠대?”
“그것까지 정확한 정보는 넘어오지 않았습니다.”
“……아, 하긴 그렇겠지.”
그 정도면 하녀의 귀에는 닿지 않을 극비다.
“하지만……, 하나 들려오는 소식이. 세니아 아가씨가요.”
“음?”
“영지에 내려가 계시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영지.”
리시스의 얼굴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율라는 미처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리시스는 그 의미를 한 번에 꿰어 맞출 수 있었다.
“기어이…….”
로구안과 손을 잡고, 제 나라를 치겠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그런 선택까지 할 수 있지?
아무리 적당히 괴롭혀 쫓아내는 수로는 리시스를 황후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 판단해도 그렇지, 적국에 나라를 팔아먹는 짓까지 불사할 줄은 몰랐다.
리시스는 입술을 물었다.
자신은 이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점점 더 전장이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코끝에 전장의 비릿한 바람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