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 제일 무서운 것 (118/153)


118. 제일 무서운 것
2022.09.18.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어? 어어?”

리시스는 자신을 반기는 하녀장의 말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어찌나 골몰하며 걸었는지 황후궁까지 돌아오는 길이 생각이 안 났다.


‘설마 중간에 황제 폐하를 스쳐 지나간 건 아니겠지.’

그랬다면 전쟁만큼 큰일이다.

리시스는 힘없이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어어……, 정신이 없었네.”

“일정이 많이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오늘은 푹 쉬시지요.”

“그래야겠다. 황제 폐하는?”

“아직 연락은 없으십니다.”

두 사람만 알콩달콩 놀 때는 부부궁이 제격이었지만 바빠지니 사정이 달라졌다.

식사준비 빼고 모든 것을 두 사람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을 들여 관리를 맡기면 부부궁의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결국 다시 리시스는 황후궁에, 키에르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황후궁을 찾는 것으로 돌아갔다. ……거의 매일이기는 했지만.


“목욕물 준비해 놓았습니다.”

리시스는 욕실로 직행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어 하녀장이 하는 말대로 멍하니 움직였다.


“……하? 폐하?”

“어? 어?”

리시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따뜻한 물에 들어와 있는 자신의 몸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언제 들어와 앉은 거야?’

가넷이 하녀들과 함께 리시스의 대답을 기다리며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무슨 질문을 들었는지가 기억이 날 리가 없다.


“……뭐 물어봤어?”

“어휴……, 엄청 바쁘신 모양이에요. 비누는 어떤 거 쓰시겠냐고 여쭤봤는데…….”

“알아서.”

“예, 다른 것들도 알아서 끝내겠습니다.”

리시스는 자신의 몸을 꾸미는 데 크게 관심이 없었다.

가넷은 마음 편히 늘 하던 대로 자신의 선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결정했다.

리시스는 결정권을 가넷에게 넘겨버린 후로는 아예 마음을 놓고 멍해졌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저 허공을 쳐다보는 것이지만 리시스가 바라보고 있는 허공은 복잡하고 치열했다.


‘에드린의 병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리시스의 머릿속엔 내내 알헨크를 상대할 방법만 맴돌았다.

이렇게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에드린에는 나라에 소속된 직업군인이 거의 없었다.

이는 에드린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었다.

군대를 유지하는 것도 다 돈이다. 전쟁도 없는데 군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국고의 낭비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는 전쟁이 나면 병사를 차출하거나 모집해서 군대를 만들었다.

에드린이 가진 상비군은 에드린 왕 직속의 왕실군, 렉싱턴 장군을 필두로 무아렌 강변을 지키는 군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쉬란과의 전쟁이 종료되며 렉싱턴의 군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다.

나머지는 각 귀족이 키우고 있는 사병뿐이다.


‘그 사병들을 다 모아도 알헨크가 끌고 다니는 병력을 상대하는 건 어려워.’

알헨크의 군대는 강했다.

기동력도 상당했고, 지금까지 거의 쉼 없이 싸워왔기 때문에 전투력도 굉장할 것이다.


‘렉싱턴 장군님이 상대하면 백전백패.’

어떻게 계산해도 이길 가능성은 없다.

지금 렉싱턴을 보내주는 것은 죽으라고 등 떠미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운 좋게 살아남아 알헨크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쳐도, 그 후가 문제다.


‘이건 진짜 반역이지.’

아무리 자신의 부하여도 왕의 병사.

왕의 허락 없이 그 병사를 이끌고 멋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왕의 군대를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이다.

이건 에드린 왕이 아니라, 키에르트라도 반역으로 처단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렇다고 쉬란의 군을 보내는 건 국경 침범. 그야말로 전쟁의 시작이고……. 그거야말로 로구안 놈이 기다리는 일이지. 그럼 에드린 지방 귀족들의 사병은? 그걸 어떻게 설득하지……? 아니, 설득해서 끌어낸다고 이길 수 있을까?’

……결론은 역시나, 리시스가 떠올린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내가 나서면……?’

렉싱턴과 이야기하며 떠올렸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쉬란의 황후로서 공적으로 출정하는 것이 아니라, ‘리시스’라는 여인이 사적으로 싸운다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만 로구안과 똑같은 수였다.

‘알헨크’라는 왕자가 제멋대로 한 짓이니 ‘로구안’은 책임이 없다.

‘리시스’라는 여자가 제멋대로 한 짓이니 ‘쉬란’은 책임이 없다.

그 ‘리시스’라는 여자는 ‘에드린 사람’이니 쉬란에 책임을 물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내 목숨이 위험해질 일도 없을 테고.’

이 난리가 난 이유는 알헨크가 리시스를 요구해서였다.

그래놓고 리시스가 막상 나타나면 태도를 바꾸어 죽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최소한 리시스 한 사람을 죽여서 로구안이나 알헨크가 이득을 볼 것이 없었다. 국제관계에 있어 리시스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이게 맞는 걸까.’

리시스는 빠른 기동과 온갖 수를 쓴 효율적인 전투가 주특기였다. 알헨크의 소수정계 병력을 상대하는 것에는 제격이었다.

작전상으로는 이게 맞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자꾸 손톱 옆 거스러미 같은 것이 일었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이래선 안 될 것 같은데.


‘폐하는 싫어하시겠지.’

거스러미의 정체였다.

키에르트가 싫어할 수도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 효율적인 작전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비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인간은 합리성만으로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리시스의 머릿속은 터지기 직전까지 가득 찼다.


“폐하, 폐하!”

“어! 어?”

터지기 직전, 가넷의 다급한 부름에 리시스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욕실은 정리가 다 끝나 있었고 목욕물도 식어 있었다.


“생각이 깊으신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이 이상 물이 식으면 감기에 걸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만 나오시지요.”

“……아. 그래야겠다.”

이 물이 다 식을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는 것에 미안해진 리시스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어……?”

그런데 시야가 기우뚱 기울었다.

욕조가 기울었나? 세상이 기울어졌나?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황급히 욕조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귓가에 윙윙 도는 소리가 울렸다.

순간적으로 까맣게 덮였던 세상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폐하!”

“황후 폐하!”

새파랗게 질린 하녀들의 비명 같은 고함소리도 차차 귀에 닿았다.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며 생각도 돌아왔다.


‘나 지금 쓰러질 뻔했어……?’

“괘, 괜찮으십니까? 팔을 이리 주십시오!”

“저희가 업어 나르겠습니다.”

“아니, 괜찮…….”

“저희가 괜찮지 않습니다!”

하녀들의 성화에 못 이겨 리시스는 업혀 나왔다.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지 정신을 차리자 곧 멀쩡해졌다.

하지만 하녀들의 한 번 날아갔던 정신은 멀쩡해지지 않았다.


“어의를 불러 오겠습니다!”

“우선 누워 계십시오!”

“저는 기도라도 하겠습니다!”

리시스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혀졌다.


“여기 가만히 누워서 손끝 하나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아셨죠, 폐하?”

“어, 응…….”

“혹시 뭐 필요하신 것 있으실까요?”

리시스는 천천히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생각에 골몰하느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까…….


“……배고픈데.”

“……예?”

우왕좌왕하던 하녀들의 동작이 뚝 멎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어버린 것 같은, 공포 반응에 가까웠다.

리시스는 해선 안 될 말을 했나 싶어 눈알을 굴렸다.

그때 배 속이 시기적절하게 부연설명을 더했다.

꼬로록.
 

 


“……바, 밥…….”

“밥!”

“밥 대령해, 얼른!”

다시 한번 하녀들이 우당탕탕 움직였다.

자신의 밥을 저렇게 열심히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배고파도 행복했다.

리시스는 하하 웃으며 침대에 누워 숨을 쉬었다.


“참 잘하셨어요, 황후 폐하. 그렇게 계속 숨을 쉬고 계세요!”

“절대 멈추시면 안 돼요!”

“후, 하! 후, 하!”

리시스가 숨만 쉬어도 하녀들은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조금 더 열심히 숨을 쉬고 싶다는 열망마저 생겨났다.

그러나 숨을 열심히 쉬는 방법은 없었다.

리시스는 가만히 누워서 그냥 숨만 쉬었다.

숨을 쉬면서 배 운동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꼬륵 소리가 울렸다.


“아니, 왜 이렇게 늦어!”

리시스의 주변에서 호흡을 돕던 하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정 섞인 목소리에 리시스만 민망해졌다.

렉싱턴과 이야기를 하느라 저녁 한 끼 건너뛰었을 뿐이지 열흘 간 금식을 한 건 아닌데…….

그냥 좀 배가 고픈 것이지 위가 소멸하고 있는 중인 건 아닌데…….

온 하녀궁이 작심하고 리시스를 굶긴 것처럼 그러면 어떡해…….


“황후 폐하, 사탕이라도 먼저 드릴까요?”

“어……, 그래……. 응.”

사탕을 안 먹어주면 울지도 모른다. 밥이 올 때까지 못 기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리시스는 하녀를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탕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리시스의 입에 넣어 주었다.

사탕 정도는 자신의 손으로 먹을 수 있지만 리시스는 굳이 지적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먹었다.


“좀, 괜찮으세요?”

“어어…….”

한 끼 굶는다고 안 죽는다니까…….

하지만 자신의 한 끼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마음은 고마웠다.

리시스는 문득 하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상함이 한가득했다. 자신의 배가 비어도 이렇게까지 속상한 표정은 안 지을 텐데.

하녀는 리시스를 기아에 허덕이다 죽는 사람처럼 안타까워했다.

황후궁의 하녀들은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갈아넣어 리시스를 관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제 이전처럼 괜한 수를 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황후궁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물어나르는 기색도 없었다.

이제는 진짜 자신의 사람이 된 것이다.


‘내 사람.’

렉싱턴도 리시스의 사람이었다.

리시스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처럼 염려하고 챙겨주는 사람.

마찬가지로 리시스 역시 렉싱턴의 인생이 중요했다.

제 발로 사지에 가겠다는 걸, ‘장군의 선택과 신념을 존중합니다.’ 보내주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렉싱턴의 결심은 상당히 단단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처할 수 있을 만한 자신의 선택을 입 밖에 내어놓는 것도 겁이 났다.


“하…….”

다시 심란함이 엄습해 왔다. 리시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감으니 세상이 온통 깜깜했다.

당장은 생각을 계속하는 것도 벅찼다.

그냥 다 잊고, 놓아버리고 싶기까지 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고민과 현실도피가 동시에 몰려왔다.

그때였다.

쾅!

그대로 배고픔도 잊고 잠들어버릴 뻔했던 리시스는 바깥에서 들려온 엄청난 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다.


“뭐, 뭐야?”

“알아보겠습니다.”

하녀도 놀라 벌떡 일어섰다.

황급히 밖으로 향하던 하녀가 손잡이를 잡기도 전에 방문이 양 옆으로 활짝 열렸다. 아주 부숴버릴 듯 흉흉한 기세였다.


“쓰러졌다고?!”

열린 문으로 들이닥친 것은 키에르트였다.

리시스는 쫄았다.

로구안이 백만 대군을 끌고 쳐들어와도 지금 키에르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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