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아주 잠깐, 음흉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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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아주 잠깐, 음흉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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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아주 잠깐, 음흉한 생각
2022.09.11.
“알헨크 왕자가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미하엘은 전서조와 거의 동시에 달려와 보고했다.
산책 중이던 황제 부부의 평화로운 시간이 멈췄다.
키에르트는 곧 날아든 전서조의 쪽지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로구안의 왕자 알헨크가 에드린의 공주에게 청혼의사 밝힘. 혼인 무효를 선언했음에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감금이라 확인, 돌려받기 위한 정당한 싸움을 선언.’
“‘로구안’이 아니라 ‘로구안의 왕자, 알헨크’가 했네요.”
리시스가 쪽지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되면 로구안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왕자의 독단적인 행동이 된다.
선전포고를 했지만 국가 간의 전쟁은 아니다.
하지만 리시스를 빼앗아 간다면 쉬란은 국가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상황이 찝찝하게 돌아갔다.
“로구안 측은?”
“의사표현 없습니다.”
“치사하네요. 알헨크가 가져오는 실익은 다 챙기고, 문제가 되면 ‘이건 왕자의 독단이다.’라고 발뺌하고.”
정정당당한 전쟁이 세상 어디에 있겠냐마는,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들이 벌이는 짓이 다 하나같이 치졸했다.
“작정하고 군사를 보내면 쉬란의 선공이 될 수 있겠죠.”
“로구안에서는 그렇게 기회를 잡고 물어뜯을 수 있지.”
알헨크는 로구안의 왕자지만 로구안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키에르트’라는 한 남자로서 움직여도 쉬란 그 자체였다.
이걸 이렇게 이용해서 공격할 수도 있구나, 리시스마저도 그 교활함에 혀를 내둘렀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칼이 계급 보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신분이 높다고 목숨이 다섯 개 달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투와 관계없는 민심과 소문, 평판에는 크게 작용할 것이다.
“그깟 소문 하나에 휘둘리는 황제, 모욕을 듣고서도 참기만 하는 황제. 어느 것이든 다 별로네요.”
“……그렇지.”
키에르트도 쓰게 웃으며 부정하지 못했다.
가볍게 날아다니는 소문의 무게는 그만큼 다른 소문으로 덮기도 쉽다.
하지만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곁에 있는 한, 알헨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문은 길어질수록 저 혼자 덩치를 불려 끝없는 추문이 된다.
지금은 리시스를 놓아주지 않는 정도지만 나중에는 리시스를 감금해서 이상한 짓을 시킨다더라, 이 이상으로 갈 수도 있다.
‘그 꼴까지는 볼 수 없어!’
마냥 참고 기다리는 건 상책이 아니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했다.
“황제의 군대가 아니면…….”
리시스가 문득 떠오른 것을 중얼거렸다.
불명예라는 공격을 받았으니 불명예 역시도 갚아줘야 할 원한이다.
“우리도 똑같이 굴면 어떨까요?”
“?”
“쉬란의 군대로 싸우되 쉬란이 아니라고 눈만 가리면.”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
도적인 척 할 수도 있고, 어느 지방의 사병이라 둘러댈 수도 있다.
모든 사람들이 황제의 군사라는 것을 알겠지만 공식적으로는 아니라 잡아떼면 그만이다.
“똑같이 치사하게 나가는 거죠. 로구안이 항의하면 우리도 ‘공식적으로 황제는 군대를 보낸 적이 없다. 유감이다. 철저히 조사하겠다.’고 대응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리시스의 작전에 키에르트는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쿡 웃어버렸다.
“……괜찮은데?”
“그쵸?”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지.”
거기까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야기 소리가 들리지 않게 멀찍이서 따라오고 있던 제롬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폐하, 다음 일정에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벌써?”
중대한 일이 있다고는 하나 사소한 일을 모두 무시해 버리고 살 수도 없다.
황제로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리시스도 제 나름대로의 일정이 있어 모든 시간을 함께하자고 떼를 쓸 수도 없었다.
키에르트는 꺼내지 못하는 마음 대신 리시스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손을 떼고 가야 하는데 손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떨어지지가 않았다.
“폐하. 늦게 이동하실수록 끝나는 시간도 늦어집니다.”
제롬의 채근이 어린애 달래는 것처럼 되어갔다.
예전엔 이런 일이 없던 분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하지만 체통 문제를 떠나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이런 걸 인간미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 황제 폐하의 유일한 단점, 인간미의 실종이 채워진 것이다.
“……가야지.”
“네, 힘내세요.”
너무나도 상큼하게 돌아서려는 리시스의 반응은 키에르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는 나와 떨어지는 것이 아쉽지 않은가 봐?”
“음…….”
……어라.
제롬은 두 분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흠칫했다.
황후 폐하, 거기서는 ‘음’이 나올 때가 아닙니다.
‘아쉬워 죽겠는데 어쩔 수 없이 놓아드리는 거예요.’라고 해야 달래지지요.
그러나 인간미 없는 키에르트 이상으로 리시스도 감정에 있어서 냉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에야 그 점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안절부절못하시는 것이지만, 지금 그러시면 일정만 늦춰질 텐데요?
이럴 땐 대충 달래주고 보내셔야 옳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롬의 마음 속 외침은 리시스에게는 닿지 않았다.
“떨어진다고 생각을 안 해 봤어요.”
“……음?”
“서로 영영 다시는 못 봐야 떨어지는 것 아니에요?”
리시스의 대답에 치켜 올라가던 키에르트의 눈썹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잖아요. 그건 괜찮은데.”
회의를 하러 산 넘고 물 건너 저 먼 다른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건물 몇 개 건너 갈 뿐이다.
내키면 언제든 달려가 당장 다시 볼 수 있는 거리인데 새삼스레 헤어짐을 논하는 것이 리시스에게는 신기했다.
“잠깐 떨어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려고.”
“일은 무슨, 그 짧은 사이에 뭐가 일어나요.”
“하늘이 무너질 수도 있고, 땅이 꺼질 수도 있고.”
“아이, 진짜. 말도 안 되는……, 아?”
키에르트의 걱정을 헛소리 취급하며 웃어버리던 리시스가 문득 멈췄다.
진짜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까진 아니어도, 독 바른 암기가 날아온다든가……, 벼락에 맞는다든가……, 걷다가 재수 없이 돌 모서리에 머리가 찍힌다든가……, 최악의 경우지만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다.
이 정도의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말 들으니 걱정이 좀 되기도 하네요.”
이번에는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손을 꽉 잡았다.
언젠가 헤어질 사람이라는 전제를 아무리 둬도 그렇게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는 건 싫었다.
“그럼 다시 꼭 보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질까요?”
“약속으로 될까.”
“음…….”
약속한다고 모든 일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세상 모든 일은 약속으로 돌아가겠지.
리시스는 곰곰이 고민했다.
키에르트도 함께 고민했으나 답을 먼저 찾아낸 것은 리시스였다.
“물건을 서로 주고받는다든가?”
“물건.”
“네, 서로 물건을 주고받으면 같이 가는 기분이라도 들지 않을까요? 다시 만났을 때 돌려주는 걸로 하고.”
물건은 그저 물건일 뿐이다.
그러나 방금부터 물건은 그저 물건이 아니게 되었다.
누가 하고 있던 물건인지, 누가 준 물건인지에 따라서도 똑같은 물건도 달라질 수 있음을 키에르트는 깨달았다.
“그러지. 그럼 뭘 나누지?”
“어……, 저는 그럼 이걸 드릴게요.”
리시스는 팔찌 대신 묶었던 레이스 리본을 풀어 키에르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키에르트는 레이스 리본을 받는 대신 내밀었다.
“묶어줄 수 있나?”
“네, 어려울 것 없죠.”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목에 자신의 리본을 묶었다.
굵은 뼈에 단단한 근육, 핏줄이 불거진 손목에 레이스 리본은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음. ……괜찮으시겠어요?”
“이게 없는 쪽이 더 안 괜찮을 것 같군.”
키에르트는 자신의 손목에 묶인 레이스 리본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리시스 본인보다야 훨씬 못하지만 자신의 손목을 리시스의 손이 쥔 것 같았다.
“그럼 그대는…….”
키에르트는 자신의 몸을 두리번거리다 목에 매고 있던 타이를 발견하고 풀어냈다.
길고 넓은 타이는 리시스의 몸 어디에든 감을 수 있었다.
몸 어디에든…….
물건을 나누어 묶는 것이 서로의 몸에 닿아 있는 것과 같은 의미라면, 기왕이면…….
아니, 리시스의 몸 어디든 좋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들은 모르는 농밀하고 깊숙한 그런 곳도 있기는 하니까.
키에르트는 아주 잠깐, 음흉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흠, 흠!”
키에르트는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폐하?”
“아, 아아…….”
리시스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헛기침은 누구의 것이었나.
헛기침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리던 키에르트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자신을 향해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리고 있는 렉싱턴 장군을.
얼굴도 보일 듯 말 듯한 먼 거리였는데도 눈빛이 형형한 것만큼은 아주 선명하게 보였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섬뜩했다.
렉싱턴에게 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밀렸다. ……찔려서.
키에르트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며 뒤늦게 점잖은 체를 했다.
“……손목에는 너무 기니 머리카락에 매어주도록 하지.”
“아, 좋아요. 일할 때 치렁치렁하면 귀찮으니 아예 한데 모아 꽉 묶어주세요!”
강제로 순수해진 키에르트의 내면을 꿈도 꾸지 못한 리시스는 기뻐하며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리자 키에르트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쏘아대던 렉싱턴 장군이 있었다.
“어, 렉싱턴 장군님?”
“리시스 님.”
렉싱턴 장군의 눈빛은 순식간에 순하고 따뜻해졌다.
에드린의 황야에 불던 칼바람이 쉬란의 봄바람으로 바뀌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본 키에르트는 어이가 없었다.
사람이 어쩜 저러나?
따지고 보면 자신도 리시스의 남편이니 잘 대해 줘야 하는 사람 아닌가?
억울했지만 따질 수는 없었다.
“산책 중이야?”
“아, 긴히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 찾던 중이었습니다.”
“삡!”
티티가 렉싱턴의 어깨에서 소리쳤다.
티티는 황궁의 길안내에 요긴히 쓰이고 있었다.
황궁의 규율 때문에 렉싱턴에게 두 사람의 행선지를 알려줄 수는 없었다.
따로 시종을 붙이자니 렉싱턴에게 너무 많은 사람을 붙이는 것이 되어 이목을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정세와 급한 연락 때문에 찾아야 할 때가 많았다.
그때 눈에 띈 것이 티티였다. 티티라면 황궁 안에 있는 세 사람의 위치 정도는 금방 찾아낼 수 있으니까.
마침 리시스 다음으로 따르던 것이 렉싱턴 장군이라 별도의 훈련 없이도 티티를 이용할 수 있었다.
“저도 슬슬 가봐야겠네요.”
렉싱턴이 직접 찾아올 정도면 급한 용무일 수 있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하나로 묶어 준 머리카락을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그럼, 저녁에 뵐 수 있으면 봬요.”
“꼭 보지.”
보내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별일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렉싱턴 쪽으로 가 버리는 리시스의 모습이 못내 아쉬워 키에르트는 몸을 돌리지 못했다.
왜 이렇게 뺏기는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의 유치한 감정에 기가 막히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삣!”
그때 티티가 후다닥 렉싱턴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키에르트에게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