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 그 새끼 죽이러 갑니다 (115/153)


115. 그 새끼 죽이러 갑니다
2022.09.08.



 
렉싱턴 장군의 얼굴에서 부는 찬바람 때문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전쟁터에서는 종종 불었던 찬바람이었다.

렉싱턴 장군은 자신의 병사가 다쳐오는 걸 보면 꼭 저런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저런 표정을 지은 다음 전투는 여지없이 치열했다.

그때는 이 찬바람을 맞아도 ‘다음 작전은 힘 좀 써도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평화로운 쉬란의 따뜻함에 오래 젖어 있기는 했나. 렉싱턴 장군의 표정이 꽤 시리게 느껴졌다.


“아, 그게, 그거는 사정과 배후가 있었어.”

리시스마저 그 살벌함에 식은땀을 흘리며 부연설명을 보탰다.

가끔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적군이 불쌍하다.’

물론 불쌍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 느끼는 최소한의 동정이랄까.

지금 그걸 세니아에게 느낄 뻔했다.


“사정과 배후가 뭐가 됐든 암살이라는 건 변하지 않지요.”

“그렇긴 하지만…….”

“……그냥 확 다…….”

렉싱턴은 무기는 없지만 칼을 쥔 것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리시스는 이걸 어떻게 말려야 하나 이마를 짚었다.

평소에 화 안 내고 온화한 사람이 한 번 화내면 무서운 것처럼, 평소에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이 눈이 뒤집히면 몇 배는 강하게 뒤집힌다.

렉싱턴 장군도 한 번 열받으면 어마어마했다.

많지는 않지만 몇 번 보았을 때 기가 질렸다.


“진정. 진정하세요.”

“……후…….”

렉싱턴 장군은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어 들썩이면서도 리시스의 명에 따랐다.

리시스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갔다.


“렌데일에서는 비상이었겠지. 모든 것을 세니아가 황후가 되는 것에 맞춰 놨는데 잠시 연기도 아니고 싹 엎어야 되었으니까. 나만 없어지면 모든 것이 다 원래대로 돌아가서 평화로울 수 있는데 얼마나 속이 탔겠어. 처음에야 우아하게 처리하려고 했다가 점점 급해지니 수단 방법 안 가리게 된 거……. 가만, 근데.”

객관적으로 상황 정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슬슬 머리에 열이 올랐다.

사정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세니아가 어떤 상황이고, 어떤 기분이었든, 리시스가 그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걸 내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잖아? 피해자인 내가 왜 가해자 입장까지 고려해 줘야 해?”

“그럴 필요 없습니다.”

“물론 고려해 줄 필요 없지.”

렉싱턴 장군은 물론 키에르트까지 동조하고 나섰다.

리시스는 거칠어진 숨을 쉬며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리시스가 원한다면 당장 검을 들고 일어날 두 남자.

자신을 위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나서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화가 좀 내려갔다.


“……어떻게 처단해야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처벌이 될지 생각부터 해 봐요.”

그래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바탕 분노를 터뜨린 뒤라 조금 더 냉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달랐다.

이번엔 키에르트가 설명을 이어갔다.


“직접 렌데일 가를 치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데 지금은 정황과 심증뿐이지.”

키에르트의 말을 가만히 듣던 렉싱턴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후 폐하를 끌어내리기 위해 타국의 병력과 손을 잡는 것 자체가 이미 반역 아닙니까?”

“증거만 있다면 반역이지. 그렇지 않으면 ‘교역’으로 포장할 수 있고.”

벌이고 있는 사업이 많은 렌데일 공작가는 여기저기 걸쳐 있는 다리가 많다.

로구안과의 연락도 ‘사업상 연락’이라고 잡아뗄 수 있다.

그러면 거꾸로 황실이 렌데일 가문을 핍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 말에도 렉싱턴은 의문을 표했다.


“반역이란 게 그렇게 철저한 준비를 해야 씌울 수 있는 혐의입니까? 우리 왕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던데.”

에드린 왕은 기분 따라 반역자를 찍었다.

충신이 충언을 올려도 기분이 상하면 왕실의 뜻에 반했다며 반역자라고 몰아갔다.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에드린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일이었다.


“폭군이잖아.”

그걸 보고 자라고, 당하기까지 한 리시스는 간단히 정리했다.

키에르트도 단호하고 엄한 군주이기는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폭군은 아니다.


“그렇긴 한데, 일단 귀족 가문과의 문제 해결은 힘겨루기 아닙니까?”

“어…….”

리시스도 생각지 못한 관점이었다.

세상에 공정한 싸움은 없다.

특히 자존심과 실리가 걸린 싸움은, 전쟁보다 더한 진흙투성이다.

사실이 어떻더라도 힘을 가진 쪽의 주장은 대개 진리가 된다.

지금까지는 리시스가 힘을 가진 쪽이었던 적이 없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기분’ 때문에 누군가를 공격하는 것은 키에르트답지 않았다.

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가 폭군이 되어야 할 만큼 우리가 궁지에 몰린 상태는 아니니까.”

“그렇지.”

키에르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작정을 하면 쉬란 제국의 황제인 그가 못 할 것이 어디 있을까.

렌데일을 무너뜨리는 것? 알헨크와 정면충돌하는 것?

다 할 수 있다.

다만 이쪽의 피해도 생기기 때문에 참는 것이다.

그 피해가 리시스에게까지 미칠까 봐.


“그러니 우리로서는 최대한 정보를 모아 정정당당하게 상대를 하려는 거지.”

“……알겠습니다.”

렉싱턴도 수긍했다.


“그럼 로구안과 렌데일이 얼마나 관계가 깊은지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까?”

“그게 문제야. 로구안 왕실의 내부 정보라면 어느 정도 손에 쥐고 있어. 하지만 그 로구안 놈, 알헨크 왕자에 대한 것은 알기가 어려워.”

알헨크가 끌고 다니는 것은 실체를 확인할 수도 없는 무력집단이었다.

실체를 모르니 정찰을 보낼 수도, 밀정을 침투시킬 수도 없다.


“아, 이미 알고 계신 정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로구안 이야기에 렉싱턴이 문득 이야기한다고 해놓고 미루다 미루다 잊어버릴 뻔한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응? 뭐가 있어?”

“리시스 님을 로구안에 넘기면 얻게 된 쉬란의 땅 중 반을 에드린에 넘기겠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가 돌기도 했습니다.”

“반을……?”

일단 차지를 하고 나서야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욕심 많은 에드린 왕이 들으면 솔깃할 만한 조건이었다.


“어차피 쓸모도 없고 말도 안 듣는 공주, 로구안에 넘겨 처리해 버리면서 땅도 공짜로 얻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겠네.”

에드린 왕은 로구안 군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국경만 열어주면 되니, 얼마나 날로 먹는 계산이 섰을까.

그날로 먹히는 것이 자신인 줄도 모르고.


“아하. 그렇게 생각하니 장군님까지 보내 날 어떻게든 끌고 오려고 했던 이유가 맞아 떨어지네.”

“……저는 일단은 공주님을 쉬란에서 빼내고, 에드린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원하시면 도망이라도 치자고 하려 했습니다.”

렉싱턴이 억울해하며 계획을 실토했다.

이 각오는 리시스가 쉬란과의 정략결혼이 정해졌을 때부터 하고 있었다.

리시스가 도망치고 싶어하면 왕을 배신해서라도 도망치게 해 주겠다고.

하지만 렉싱턴이 먼저 제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용당한다고는 하더라도, 지위가 주는 안락함은 분명히 존재한다.

암살에 노출될 때도 많지만 눈먼 화살에 맞아 죽을 만큼 최전방에 서지는 않는다.

독 든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죽을 만큼 굶지도 않는다.

‘공주’도 ‘황후’도 아닌 ‘리시스’가 당장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야 하고, 잘 집이 없으면 별을 바라보며 자야 하는 생활을 하며 행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 계획을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날 위해 그렇게까지?”

리시스는 렉싱턴에게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렉싱턴은 더 자신을 아껴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마워. 그치만 이제는 도망갈 일은 없을 거야.”

렉싱턴도 고개를 끄덕였다.


“쉬란에서 잘 지내시는 걸 확인했으니……, 제가 다른 곳으로 모실 이유가 없지요. 같이 있어드리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쉬란에서 안전하실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로구안이랑 싸워야 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쉬란과 편먹고.

리시스의 염려에 렉싱턴은 어깨를 으쓱했다.


“싸우는 거야 본래 제 일인데 뭐가 문제입니까?”

국적이 문제지…….

에드린의 장군이, 쉬란의 황후를 위해, 쉬란의 군사와 함께 로구안과 싸운다는 게 보통 이해가 되는 일은 아니다.

꼬이고 꼬이고 또 꼬였다.

그 와중 렉싱턴만 간결했다.


“저는 그저 리시스 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할 뿐입니다.”

그 간결함이 맘에 들었다.

리시스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뭐든 시켜도 되지?”

“……아, 잠시. 진짜 ‘뭐든’은 아니고요…….”

“……왜.”

“적당히 뭐든…….”

리시스는 언제나 작전에서 ‘적당히’가 없었으니까…….

렉싱턴 장군도 인간이라 무서운 것도 있고, 약해질 때도 있었다.


“난 뭐든 괜찮아. 걱정말고 그대의 생각대로 개진해.”

그때 키에르트가 얄밉게 끼어들었다.

렉싱턴이 바람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려 키에르트를 노려보았다.


“……저도 뭐든 할 겁니다!”

“뭐든……, 음. 뭐든이라…….”

아무리 친한 렉싱턴이어도 에드린의 사절이자 포로다.

뭘 시켜먹어도 적당한 선은 지켜야 했다.

그러나 렉싱턴 본인이 ‘뭐든’이라고 했으니 정말 ‘뭐든’ 써먹고 싶어지는데…….


“만약에 내가 렉싱턴 장군의 병력을 빌려달라면?”

사절단의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렉싱턴이 직접 골라 온 최정예들로만 구성되었다.

숫자에서는 밀릴 수 있으나 리시스가 종종 쓰고는 한 특수전술에 활용하기에는 최적의 인원이라 할 수 있었다.

일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대강 짐작을 한 렉싱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제 부하들은 언제까지고 리시스 님과 함께할 겁니다.”

“좋아.”

 

***

다음 날, 아침부터 연병장은 술렁였다.


“뭐야, 에드린 군이야?”

“저거, 그, 렉싱턴 장군?”

쉬란의 병사들은 연병장에 등장한 에드린 사절단을 보고 기함했다.

칼 대고 싸웠던 적군이 연병장에 들어와 한쪽 자리를 떡하니 버티고 섰다.


‘이건 침략인가……?’

 

 
혼란스러운 쉬란의 병사들 앞에 황제 부부가 나타났다.


“폐하,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에드린 군이 대체 왜 연병장에.”

혼란이 일 것은 예상한 바였다.

리시스는 한 손을 들어 병사들의 입을 다물렸다.

그새 리시스에게 훈련된 병사들은 속에 불만이 있든 궁금증이 끓든 조용해졌다.


“오늘부터 병력 증강을 위한 합동 훈련에 들어간다.”

그러나 리시스의 폭탄선언에 다시 웅성웅성 목소리가 커졌다.


“황후 폐하, 에드린 군, 것도 렉싱턴 장군과요? 정말요?”

“아무리 그래도 어제의 적이지 않습니까. 군사 기밀이 유출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반발이 일었다.

예상했던 대로라 리시스는 침착히 제압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렉싱턴 장군이 움직였다.


“쫄리시나?”

“!”

병력 증강에 있어 최강의 수는 라이벌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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