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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리시스의 행복 (114/153)


114. 리시스의 행복
2022.09.04.



‘우리 공주님의 평화!’

비록 에드린에 있을 때 안락한 삶을 주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 삶을 지내고 있다면 지켜주고 싶었다.

렉싱턴이 비장하게 눈을 부릅떴다.

어딘가에서 ‘두둥!’ 하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말씀하셨지요?”

“어, 어? ……과일?”

리시스는 갑자기 전투태세에 돌입하는 듯한 렉싱턴의 눈빛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여기서 왜 싸울 기세가 되었지?

뭐랑 싸우려는 거지?

주변을 둘러보자…….


‘싸울 게 많네.’

여기는 쉬란이니까.

대표적으로 키에르트와 싸울 수 있겠고, 멀찍이 따라붙은 친위대도 있겠고, 곳곳에 배치된 황실군도 있겠고…….

그러나 렉싱턴의 전투태세가 향한 곳은 그쪽이 아니었다.


“말고, 그 전에 말입니다.”

“……? 아, 렌데일 공작가?”

확실한 이름을 들은 렉싱턴의 눈에 다시금 힘이 들어갔다.

우리 공주님의 평화를 방해하는 자는 자신의 적이다.

우선은 로구안이 제1의 적이겠고, 그에 협조하는 렌데일 역시도 적이다.


“렌데일을 작살……, 아니 없애버리실 작정이시라고요.”

“……어? 어……. 그렇긴 한……데.”

이건 쉬란 내부의 일이었다.

렉싱턴 장군이 왜 관심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던 리시스가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렉싱턴 장군의 눈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


“렌데일 이야기에는 왜 관심을 보이는 거지?”

잠자코 있던 키에르트가 날카롭게 끼어들었다.


“우리 공주님의 평화로운 삶에 가장 큰 장애물인 것 같아서입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에드린이지.”

“…….”

“두 번째 큰 장애물은 맞다.”

“……예.”

자존심 상하지만 키에르트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키에르트와 대적을 하려는 자리가 아니었다.

리시스를 위해 자존심에 살짝 난 상처는 모른 척했다.


“공주님께서 에드린을 버리셔도 저는 공주님을 위할 겁니다.”

그것이 렉싱턴의 진심이었다.

렉싱턴이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리시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전장에서는 잘 몰랐다.

당장 먹고 사는 것, 살아남아 버티는 것도 벅찬 삶이었으니 행복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렉싱턴 장군이 리시스의 먹을 것, 자는 곳,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써 준다고만 생각했지 행복까지 빌어줄 줄은 몰랐다.


“……고마워.”

“감사를 바란 건 아닙니다.”

렉싱턴 장군은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자신의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던 말을 하려니 심호흡이 필요했다.


“공주님이 꼭 에드린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지적할 것이 있군.”

막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감동적이려던 찰나에 키에르트의 꼬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키에르트의 얼굴에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불만이 있는 건 렉싱턴도 마찬가지였다.

누군 좋아서 적국의 황제와 얼굴 마주하고 있는 줄 아나……!

이게 다 우리 공주님 행복하라고 꾸역꾸역 참고 있는 것이다.


“……뭡니까.”

키에르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스러웠지만 렉싱턴은 리시스의 행복을 위해 한 번 더 참았다.


“황후는 공주를 그만뒀다. 호칭을 바로 했으면 좋겠군.”

“…….”

이건 키에르트의 말이 맞았다.

리시스는 스스로 에드린의 공주임을 포기했다.

에드린은 아직 이 소식을 모르고,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리시스가 선택했으니 존중한다면 더 이상 공주라고 불러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라고 부르면…….’

키에르트를 리시스의 남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남편이 맞기는 하지만, 렉싱턴의 마음은 아직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정략결혼 때문에 서류상 관계만 유지하는 부부였으면 했다.


“호칭이 뭐 그렇게 중요해요. 결국 저는 전데.”

“그건 부부간의 이야기고. 공주든, 황후든, 리시스든 그대가 내 아내라는 건 같지만 위계는 변화하니까.”

“위계라니…….”

리시스가 어색하게 뺨을 긁었다.

렉싱턴과의 관계에서 위계를 의식한 적이 없어서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만 렉싱턴은 리시스를 철저히 공주로서 예우해 주었다.

하지만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기도 했다.

이 두 관계가 동시에 유지되었기 때문에 위계는 모호해졌다.


“리시스 님.”

“어, 어? 어?”

리시스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호칭에 당황했다.

‘리시스’라는 이름은 엄마와 키에르트가 불러줬지만, 거기에 ‘님’이 붙은 건 정말 처음이었다.


“리시스 님이 에드린의 공주든, 쉬란의 황후든 관계없이 저는 리시스 님을 존중하고 예우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리 부르는 것이 맞겠지요.”

렉싱턴의 고집스러운 선언이었다.

키에르트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한 것처럼 독기어린 숨을 뿜었다.

기어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인정 못 하시겠다?

그러나 리시스는 키에르트와 달리 감동했다.


“왜? 에드린의 공주가 아닌 나는 그렇게 대해 줄 이유가 없잖아.”

렉싱턴이 키에르트를 제대로 된 황제 취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시스 역시 에드린의 이름을 떼어내면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막말로 ‘야’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렉싱턴은 끝까지 리시스를 귀하게 모시고 싶었다.


“그냥 제 마음입니다.”

리시스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렉싱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긋 웃었다.


“헤헤. 좋다.”

“……예?”

“이런 게 행복이구나.”

리시스는 활짝 웃었다.


“나를 소중히 해 주는 사람들과 이 화창한 날씨에, 맛있는 것 먹으며 같이 있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의무와 책임 덩어리가 아닌, ‘리시스’로도 누군가에게 소중할 수 있는 것. 전부 다.”

행복이라는 것은 불현듯 느끼는 것인가 보다.

지금까지 그 단어를 떠올리지조차 못했다.

자신이 이미 행복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한참 뛰어놀다 보니 어느샌가 행복의 땅이었다.


“……리시스.”

키에르트도 리시스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은 사람들의 이목이 있어 자주 부르지는 못하는 이름이었다.

리시스가 리시스일 때 가장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부름에 리시스의 미소가 깊어졌다.


“리시스 님.”

이번에는 렉싱턴의 부름이었다.

키에르트와 마찬가지였다.

‘리시스’는 행복했다.


“응!”

 

 
리시스는 다시 한번,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의 부름에 답했다.

두 사람에게도 리시스의 웃음이 옮았다.

한때는 죽도록 싸웠던 적과의 동맹이 또 하나 이렇게 체결되었다.


“자, 그럼 감히 우리 리시스 님의 행복을 망치려는 렌데일을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화기애애한 웃음으로 동맹 체결을 마친 렉싱턴이 냉큼 본론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도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매일 이렇게 놀고먹는 행복이 유지되면 참 좋겠지만, 이 행복을 유지하려면 방해요소들을 처단해야만 했다.

벌레는 알을 까기 전에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장군의 협조 의사는 감사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키에르트가 생각이 깊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감사한다고?’

렉싱턴은 의외의 말에 신기했다.

키에르트는 의외로 렉싱턴의 개입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아무리 리시스를 위한 일이라 한들, 황제로서의 자존심이 그를 막을 수도 있었다.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며 노발대발할 줄 알았는데, 키에르트는 당연한 것처럼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먼저 챙겼다.


‘다시 보게 되는군.’

세상 모든 왕이나 황제가 다 제멋대로, 성질대로 사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본 것이 에드린의 왕족밖에 없으니 단단히 박힐 수밖에 없는 선입견이었다.

키에르트는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사고했다.

하긴, 적국의 공주를 황후로 받아들이는 것도 했는데 장군이라고 못 받아들이겠는가.

여기서 풀어져야 할 것은 렉싱턴, 본인뿐이었다.

렉싱턴도 키에르트를 적국의 황제가 아닌, 리시스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남편으로 보려 노력하며 진지하게 말을 받았다.


“어떤 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렌데일 가문의 일은 쉬란의 일이다. 에드린의 장군이 깊게 관여하는 건 내정 간섭이 될 수 있지. 뭐든 다 한다는 식으로 덤비지 말고, 우선은 한계를 따져보는 건 어떤가.”

키에르트의 조언은 꽤 이성적이고 조리 있기도 했다.

렉싱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서서 할 수 있는 일, 뒤에서 할 수 있는 일, 드릴 수 있는 정보,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정황에 따라 움직이면 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것도 그렇고.”

두 사람 다 리시스에게서 융통성이라는 것을 배웠다.

배운 것을 훌륭히 써먹는 두 사람을 보며 리시스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이래야 내 사람들이지.


“우선 상황부터 들어봐.”

“아, 예. 그러겠습니다.”

“렌데일 가문은 들어본 적 없어?”

“예, 저는 없습니다.”

사교계나 무역에 깊숙이 발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타국의 귀족 이야기에 관심 가질 사람은 없다.

특히나 쉬란에 대한 것이라면 황제에 대한 이야기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 만큼 교류가 없으니 더욱 그랬다.

리시스와 마찬가지로 전선에만 오래 있던 렉싱턴 역시 이런 정보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우선 간단히 이야기해주자면, 렌데일 공작가가 쉬란에서는 제일 힘 센 가문이야. 개국공신인데다 사업도 크게 여러 개 하고 있거든. 사교계도 꽉 잡고 있고.”

“다 갖췄군요.”

“그렇지. 권력, 돈, 명예.”

“그렇다면 타국의 황후를 견제할 만한 입장이기도 하겠고요.”

렉싱턴은 리시스의 말을 바로바로 이해했다.

권력싸움도 결국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기고 상대를 누르는, 동일한 목적이 있었다.


“정확해. 거기다가 렌데일에 세니아라고 영애가 하나 있거든. 유력한 황후 후보이기도 했어. 나만 없으면 바로 황후자리가 자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밀렸어.”

“동기는 완벽하군요. 그럼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로구안과 손을 잡은 겁니까?”

“에이, 그럴 리가. 그동안 별일 다 있었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동안은 이미 지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는데, 렉싱턴 장군이 물어봐서 생각해 보니 꽤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

그래도 지난 일이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었다.

내가 다 이런 역경을 헤치고 황후로 자리를 잡았다 이거야.


“처음에는 티파티를 망치려 들기도 했다가, 파티에서 망신도 주려고 했다가. 하녀들 뒷공작에, 암살 조력에…….”

리시스가 흠칫 말꼬리를 흐렸다.


“암. 살. 말입니까……?”

그러나 이미 늦었다.

렉싱턴 장군의 목소리에서 얼음이 뚝뚝 떨어졌다.

죽일 상대를 찾았다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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