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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충신 파업 (113/153)


113. 충신 파업
2022.09.01.


렉싱턴은 느린 걸음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포로니까 당연히 방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며칠 지켜보던 하녀장이 먼저 말을 해 줬다.


‘방에만 계시면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 나가도 되는 겁니까?’

‘손님이신데, 당연하지요.’

포로라는 건 그냥 명분일 뿐인 모양이었다.

렉싱턴의 외출을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궁의 정원, 도서관, 호수, 숲 등 마음껏 구경하셔도 됩니다. 다만, 너무 넓어 길을 잃으실 수도 있으니 유의하시고요.’

하녀장의 친절한 설명과 배웅을 받으며 렉싱턴은 떨떠름하게 건물을 나섰다.

에드린보다 한결 쨍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쨍한 햇빛 탓도 있지만 아직도 현실감이 생기지 않아 어질어질한 것도 있었다.


‘내가 지금 제정신인 게 맞나.’

아니, 살아 있긴 한 건가.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이 현실은 맞나.

터덜터덜 걸으며 황궁의 풍경을 바라보던 렉싱턴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방 밖으로 나오니 자신이 있는 이곳이 쉬란이라는 실감이 더 진하게 났다.

정신을 팔고 걷던 렉싱턴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쳤다.


“어, 어이쿠. 죄송……, 응?”

“어, 엇! 장군님!”

공교롭게도 맞은편 사람들도 렉싱턴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더더욱 공교롭게도, 그게 부하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길 한복판에서 부딪칠 뻔한 두 무리는 서로를 당황한 눈으로 마주보았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딱 마주칠 수가…….”

“……탈출한 건가?”

렉싱턴은 자유로운 거동이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아닌가 생각했다.


“엇, 아, 아뇨……. 산책 중이었습니다.”

“……산책.”

렉싱턴 장군이 하던 것과 똑같은 그것이었다.

적국의 황궁에서, 적국의 사절단이 각각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마주쳤다.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딱히 감금을 하지는 않았고?”

“예, 예에. 장군님께도?”

“……왜 안 나가냐고 묻더군.”

“허허허…….”

렉싱턴과 부하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그저 웃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황당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웃는 것뿐이었다.

각자 하루하루 경계하며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로가 잘 지내는지 확인을 할 생각조차 못 했다. 사실, 물어봐도 되는 건지도 몰랐다.

자신들을 살려주고 있으니 목숨은 붙어 있겠지 추측만 했다.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습니까?”

그래도 부하들은 렉싱턴의 몸을 한 번 더 살폈다.

안 그래도 큰 부상을 입었던 렉싱턴이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부상이 덧날수도 있고, 몸 상태가 전체적으로 악화될 수도 있었다.

……조금, 걱정의 시간이 늦은 것 같긴 하지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잘 지냈다.”

렉싱턴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잘 지냈다.

……아주 잘.

에드린에 있을 때보다 더 잘.

눈만 뜨면 사방에 먹을 것이 널려 있었다.

한시도 배가 고픈 순간을 만들지 않겠다는 하녀장의 의지인지, 언제 어디서든 군것질을 할 수 있게 방을 채워놓았다.

아침 식사를 하면 모닝 티타임, 그러다 소화가 겨우 될까 싶을 때 점심. 해가 저물 때까지 먹어야 될 성싶은 거한 양이 매번 차려졌다.

겨우 점심을 먹어치우면 또다시 티타임.

이번엔 제대로 된 간식 메뉴가 요리사의 손을 거쳐 나왔다.

성의를 보아 한 입이라도 먹어줘야 할 것 같은 예쁜 간식들이었다.

그렇게 또 배를 채운 데다 또 음식을 얹고 기다리면, 대망의 저녁식사였다.

저녁마다 거의 만찬이 차려졌다.

리시스가 와서 함께 식사를 하는 날에는 그 양이 곱절은 되었다.

그리고 저녁 티타임, 밤늦게는 나이트 칵테일,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먹고 배 따뜻하게 자라며 스프까지 제공되었다.


“어……, 그. 살이 좀 붙으셨습니……, 다.”

“……너희도.”

렉싱턴만 그런 생활을 했을까?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부하들 역시 이동할 때 빠졌던 살이 돌아와 포동포동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로는 이 뽀얘진 얼굴이 낯설어서, 라는 이유도 분명 있다.


“험, 흠. 그래도 굶기진 않아 다행입니다.”

“공주님의 영향력일 수도 있겠지.”

리시스를 떠올리니 쉬란의 호감에 날카롭게 세웠던 경계도 허물어진다.

우리 공주님이 잘 하셔서 덕분에 우리가 잘 먹는 거라면야…….

우리 공주님 여기서도 잘 하고 계셨구나. 역시 과연 우리 공주님.


“하지만 내내 이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잘 먹고 잘 놀고는 있지만 이대로 쉬란에 주저앉을 수는 없다.

리시스는 쉬란에서 잘 적응해 사는 것이 의무였지만, 렉싱턴 장군 일행의 의무는 달랐다.

언제까지고 의무를 방기할 수는 없었다.

당장은 포로의 신분이라고 해도,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방법을 찾아보지. 당장은 공주님의 마음이 중요하니까.”

“예.”

“나는 산책이라도 하며 생각을 좀 정리할 테니, 황궁을 돌아다니며 눈에 새겨둘 것이 있는지 탐색하도록.”

렉싱턴 장군의 명에 부하들의 눈에 예기가 돌아왔다.

과연 에드린 군이 쉬란의 황궁까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올 일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적국의 정보는 하나라도 더 가지고 있어 나쁠 것은 없다.

부하들을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된 렉싱턴 장군은 정처 없이 황궁을 걸었다.

자신도 여차하면 탈출할 경로를 찾아놔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그런 작전이 머리에 떠오르지를 않았다.


“……여긴 어디지.”

다리가 아파질 때까지 걸었다.

하녀장의 경고가 이제야 떠올랐다.

황궁은 너무 넓으니 길을 잃지 말라고 했던가.

과연 그 말이 진짜였다.


“웬 놈의 황궁 안에 산과 숲과 호수가 다 있어?”

이쯤이면 ‘궁’이라는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건 구조를 알아도 공략을 할 수가 있기는 한가 싶었다.

렉싱턴은 어이가 없어 걸음을 멈췄다.

마침 호수 근처라 엉덩이를 걸칠 바위도 있었다.

막 바위에 엉덩이가 닿으려던 찰나였다.


“아하하하……. 폐하도 참!”

맑은 웃음소리가 렉싱턴의 귀에 파고들었다.

그냥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의 목소리였다면 ‘좋을 때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아주 익숙한 목소리라 그러지 못했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렉싱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조금 떨어진 호숫가에 파라솔을 펼치고 피크닉 중인 황제 부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한 번에 쓸어버리는 쪽이 깔끔하지 않을까요?”

“……?”

파란 하늘, 싱그러운 나뭇잎, 그 밑의 시원한 그늘.

반짝이는 호수의 수면, 찰랑이는 물소리.

예쁜 체크무늬 돗자리 위에 놓인 라탄 바구니, 탄산이 들어간 음료와 예쁜 핑거푸드.

거기에 수려한 외모의 남녀까지.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피크닉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영 해괴했다.

렉싱턴은 리시스가 반가워 일단 다가가려다 둘의 대화에 멈칫했다.


“그게 깔끔하기는 하지만 렌데일 가가 황도 내에 사병을 얼마나 주둔시켰을지가 관건이겠군.”

“아, 하긴. 우리는 렌데일 가의 구조도 모르니까요. 여차하면 놓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렌데일 가에 붙어 있는 다른 가문의 반발도 고려해야 하고.”

“적법적인 절차를 거쳐 해결하자니 증거가 살짝 애매하네요. 심증은 이렇게나 확실한데.”

“결정타가 부족해. 결정타가…….”

“으음…….”

두 사람은 예쁘게 장식된 과일을 한 개씩 입에 가져가 우물거리며 제각기 고민에 빠졌다.

호수를 바라보았다가, 풀밭을 바라보았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가.


“어?”

다시 내려온 리시스의 시선에 렉싱턴이 걸렸다.


“장군님! 산책 나왔어?”

“아, 예에, 공주님. 그……. 폐하도, 뵙습니다.”

렉싱턴은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하는 키에르트의 시선에 어쩔 수 없이 인사를 했다.

리시스는 두 사람의 어색한 기류를 싹 무시하며 반갑게 팔을 붕붕 흔들었다.


“장군님도 이리 와! 같이 먹자!”

“예? 아니, 저는 괜찮…….”

“많아! 얼른!”

전장에서는 먹는 것으로는 절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이니 말만 하고 안 주면 정말 못된 헛소리가 되는 거라.

마찬가지로 괜찮다고 사양하면서 왜 안 주나 눈치를 보는 것도 금지다. 권하는 사람도 두 번 권할 만큼의 여유가 없어서.

렉싱턴은 반사적으로 다가가 앉고 나서야 정신이 났다.


‘내, 내가 원수와 또 티타임을!’

키에르트도 렉싱턴을 보는 눈빛이 딱히 곱지는 않았다.

뭐가 예쁘다고 방긋방긋 웃으며 쳐다보겠는가.

렉싱턴은 떨떠름하게 리시스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기서 볼 것은 우리 공주님뿐이다.

리시스는 렉싱턴의 기대대로 눈을 마주치며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장군님이랑 피크닉이라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전장은 대체로 추웠고, 이렇게 화사한 햇살과 풀밭이 없었다.

밖에서 뭘 먹는 건 급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후르륵 마시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다.

그래도 ‘피크닉’이라는 것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자, 이거. 잔 받고.”

여분의 잔이 있었는지 리시스가 렉싱턴의 잔을 챙겨주었다.

졸졸졸 채워지는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음료.

렉싱턴의 마음도 설렘으로 흔들리고 말았다.


“이것도 맛있어. 에드린에는 없는 과일이야.”

리시스가 과일도 내밀었다.

처음 보는 과일이었다.

렉싱턴은 두근거리며 과일을 받아 입에 넣었다.

새콤달콤한데, 씹을수록 단맛이 진하게 우러나왔다.


“맛있지?”

“예.”

“쉬란은 과일이 맛있더라고.”

리시스의 쉬란 칭찬에 잠시 멈칫했지만 역시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전선에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어 외면하고 있었지만 쉬란은 좋은 점이 많은 나라였다.


“나는 이것도 좋아해. 따뜻한 곳에서만 나는 과일이니 에드린에서는 키우기 어렵겠지?”

쉬란의 과일을 맛있게 먹는, 청명한 하늘 아래의 리시스.

추운 전선에 있었을 때는 언제나 푸석거리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금실처럼 찬란하게 햇빛을 반사한다.


“폐하도 드실래요?”

“음.”

“……손은 어따 두시고?”

“없네.”

“참나.”

별것 아닌 대화로 시시덕거리며 오후의 시간을 보내는 공주님.

몸에는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든 화려한 드레스를 걸치고, 머리카락도 섬세하게 장식해서 땋아 내리고 있다.

거기에 생긴 것만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착한, 능력 좋은 남편과 과일 하나를 두고 귀엽게 아웅다웅하며 웃는다.

전선에서는 꿈만 꾸던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우리 공주님, 이렇게 살게 해 드리고 싶었는데.

렉싱턴은 순간 울컥했다.


“어? 장군님 왜 그래?”

“아,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가서…….”

“괜찮아? 봐봐.”

“아닙니다.”

렉싱턴은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겨우 눈물을 삼켰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공주님다운 공주님.

세상물정 하나 모르고, 해맑기만 해도 되는.

그 자체로 사랑받고 아름다운 공주님.

에드린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그 모습을, 적국에 와서 이루고 있었다.


“엥? 장군님 울어?”

“아, 아닙니다! 이건! 콧물이 역류해서!”

“……뭐래.”

렉싱턴은 커어억, 하고 숨을 들이켜 눈물을 숨기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제야 겨우 각오가 섰다.

나라가 뭐가 중요한가.

리시스가 이렇게 찬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상관없다.

꼭 그곳이어야 한다면 렉싱턴은 그곳을 지켜주고 싶었다.

에드린의 충신은 잠시 파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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