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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성질대로 해 버리니 아주 개운 (110/153)


110. 성질대로 해 버리니 아주 개운
2022.08.21.


리시스의 명령에 황실군이 즉시 움직였다.

황실군은 말 그대로 ‘황실’을 위해 움직이는 군대이기 때문에 황제의 명에 상충되지만 않으면 황후의 명에도 따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위계를 따지기 이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달달 굴려준 사람의 목소리에는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체포한다!”

“다치지는 않게.”

“다치지는 않게 체포한다!”

리시스의 명을 복창하며 황실군이 사절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억?! 공주님?!”

“자, 잠깐, 잠깐!”

“아니, 이건! 좀!”

아무리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지만 손에 무기 하나 없이 몇 배가 되는 인원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제압당한 에드린의 사절단은 거미 먹이처럼 밧줄에 꽁꽁 묶여 끌려갔다.


“미안해. 그렇게 됐어.”

이렇게 해 버리면 될걸.

성질대로 해 버리니 아주 개운했다.

리시스는 끌려 나가는 렉싱턴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아니, 이게, 대체……!”

렉싱턴은 방 안을 서성이며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는데 가둬놓은 곳은 깔끔한 방이었다.

그러나 한숨만 나왔다.

몸만 편하면 무얼 하나. 마음은 가시밭인데.

왕의 명을 따르지 못한 죄인이, 몸까지 호강을 하게 생겼다.

이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에드린에 몸을 의탁할 수는 없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적국의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니 한순간도 견딜 수가 없었다.

여차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명예를 지켜야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럴 바엔 차라리 지금 당장…….


“허튼 생각하지 마, 장군님.”

그때 리시스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주님…….”

전선에 있을 때로 돌아간 리시스의 말투에 렉싱턴의 호칭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리시스도 정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돌아간 것처럼 전쟁터의 공주님이 되어 렉싱턴을 마주했다.

다시 한번 가까이에서 마주한 리시스는 옥좌에 앉아 냉엄한 명령을 내리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툭하면 눈물을 보이던, 연약한 우리 공주님이었다.


“렉싱턴 장군님.”

“공주님…….”

그래도 그새 많이 강해지셨는지, 눈물을 보이는 대신 눈에 힘을 꽉 주고 버틴다.

홀에서는 정말 황후로 보일 만큼 위엄도 갖추고 있었다.

대견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기까지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응.”

“적국에서 고생은 많이 안 하셨고요.”

“응.”

“다행입니다.”

리시스도 말을 많이 하면 눈물이 날까 봐 일부러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홀에서는 황후로서의 입장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감상에 젖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보고 싶었던 사람인가.

리시스에게는 유일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군님은. 좀 괜찮아?”

리시스가 렉싱턴 장군의 팔을 곁눈질했다.

막 다쳐서 돌아왔을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상처가 너무 깊어 온몸에서 열이 펄펄 끓고 사경을 헤맸다.

그때는 렉싱턴 장군을 잃는 건 아닐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사절로 올 수 있게 될 만큼 나아진 것이 기적이었다.


“예, 불편한 것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부상을 입은 팔은 영원히 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통증은 사라졌다.

렉싱턴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리시스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는 여기 평생 가둬두실 겁니까?”

“응.”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저의 자리가 있습니다.”

“내가 보내주면 그 팔로 나와 싸우려 들 거잖아. ……물론 에드린 왕이 살려준 이후의 말이지만. 아니지, 죽으라고 싸우라 내보낼 수도 있고.”

리시스의 지적에 렉싱턴도 할 말이 없어졌다.

반박할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에드린 왕이 죽으라면 죽을 테고, 싸우다 죽으라면 이 몸으로도 전쟁터에 설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리시스와 싸우려 들까? 그것만큼은 머뭇거려졌다.


“……공주님은 진짜로 쉬란의 편에서 싸우실 겁니까.”

리시스의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졌다.

렉싱턴이 오기 전까지는 쉬란과 함께, 쉬란을 위해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여겨졌다.

그러기 위해 특수부대를 뽑아 훈련도 시켰고, 전략도 함께 짰다.

로구안을 상대로 한다면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로구안과 함께 에드린이 공격을 해 온다면?

그 공격의 선두에 렉싱턴이 있다면?


“나는, 사실…….”

겨우 입술을 달싹였지만 헝클어진 마음에서는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말을 해야 전달이 된다.

리시스는 마음을 다잡고 눈을 똑바로 떴다.


“에드린의 공주였을 때보다 쉬란의 황후로 지내는 지금이 더 좋아.”

“……제가 없어도요?”

“그건 반칙이지!”

결국 리시스는 빽 소리를 지르며 렉싱턴 장군을 한 대 후려치고 말았다.

그제야 렉싱턴 장군은 웃으며 엄살을 떨었다.


“아이고, 쉬란의 황제가 잘 먹이기는 했나봅니다. 아파 죽겠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퍽, 퍽!

리시스의 야무진 주먹이 연달아 렉싱턴 장군의 가슴에 꽂혔다.

솔직히 진짜 아프긴 했다.

그래도 맞는 것조차 즐거웠다.

이렇게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노릇이었으니까.

이제 영원히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다.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리시스의 주먹이 멈췄다.

다시 울컥 눈물이 솟을 뻔했다.

애틋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 두 사람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

혼자서 전쟁터에 들어선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키에르트였다.

손을 마주잡고 찡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주춤주춤 손을 놓고 머쓱하게 떨어져 앉았다.

지은 죄도 없는데 이상하게 찔리고 아팠다.

삼 일 굶은 사람 앞에서 진수성찬 차려놓고 혼자 먹는, 그런 느낌이랄까.


“제가 알아서 한다니까요.”

“그대를 못 믿는 건 아닌데…….”

키에르트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그에 맞서 렉싱턴도 반사적으로 차갑게 눈빛을 빛내며 키에르트를 노려보았다.

두 남자의 팽팽한 살기가 부딪쳤다.

다가온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앞을 막아섰다.


“에드린의 장군까지 믿을 수는 없지 않은가.”

“렉싱턴 장군님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나는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키에르트는 아예 직접 의자를 끌어다 둘 사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마음껏 대화를 나눌 자유조차 허락하시지 않는 겁니까.”

“다른 사람과는 다 돼도 장군, 그대만은 안 돼.”

키에르트가 대놓고 꼭 집어 말했다.

이에 렉싱턴의 분노에 불이 붙었다.


“폐하가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의 몸에 흐르는 에드린의 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리시스라면 그걸 다 뽑아 없애버리고 싶을 텐데. 그 말로는 점수 못 따.”

렉싱턴이 리시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설마요? 아니죠? 저 개소리가 진짭니까?’

아무리 열이 받아도 차마 황제 앞에서 개소리 운운을 실제로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눈빛으로 열심히 외쳤다.

리시스도 그걸 알아보지 못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니라고도 못 했다.

리시스는 그냥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

렉싱턴은 리시스의 반응에 거한 충격을 받았다.


“어, 어떻게, 공주님이……, 공주님이……!”

“폐하는 적어도 에드린 왕처럼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리거나 물건 취급은 하지 않아.”

이번에는 키에르트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마음이 고작 그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취약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못하는 줄은 몰랐다.

프러포즈는, 무슨 수를 써서든 리시스가 ‘세상에서 이 이상은 없다!’고 감동받을 정도로 성대하고 굉장하게 해내고야 말겠다.


“언제까지 그럴 것 같습니까.”

“……!”

“지금 지내 봐야 몇 년을 지내셨습니까. 사람이 잠깐 마음이 동해 잘해 줄 수야 있지요. 하지만 원하는 것을 다 얻은 남자는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키에르트는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영원히 좋은 사람일까?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확신할 수 없었기에, 언젠가 떠날 순간을 매번 상기시켰다.

지금도 영원히 키에르트의 곁에 붙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 믿는 거 아니라고,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었지요. 기억나십니까?”

“……응.”

“그랬는데도 이렇게 홀려서 나라고 뿌리고 다 버리시면 어떡합니까.”

“그치만 폐하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그냥, 느낌이, 겪어보니까.

다 애매모호하고 근거 없는 답변들이었다.

리시스는 답이 궁해져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장군은 어떻게 믿나?”

그때 듣다 못한 키에르트가 끼어들었다.

한 번 원수는 영원한 원수인가.

렉싱턴의 입이 열릴 때마다 원한의 골이 깊어졌다.


“저는 생사를 함께 한 지 십 년이 넘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가족들도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마당에, 가족도 아닌 사람은 어떻게 믿지?”

“…….”

뿌드득.

렉싱턴 장군의 주먹 안에서 요란한 뼈 소리가 났다.

키에르트는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대는 남자가 아닌가?”

“어떻게 제가 감히 공주님께 남자로서 다가간다 생각하십니, 아니, 그 전에 나이 차이가……!”

“남녀 사이에 그런 게 뭐가 중요하지?”

키에르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시비 걸 듯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렉싱턴 본인이 리시스에게 숱하게 했던 잔소리여서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어리다고 남자 아닌 것 아니다, 늙었어도 남자다, 남자는 그냥 남자다, 아예 믿지를 말아라…….

하지만 신께 맹세코, 남자로서 리시스를 바라보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건 모욕이었다.


“장군이 지금 억울한 것만큼 나도 억울해. 앞으로도 내가 리시스의 뒤통수를 칠 일은, 장군이 리시스를 여자로 볼 확률보다 낮을 거야.”

렉싱턴의 완패였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만족하지 않았다. 완전무결한 승리를 원했다.


“그리고 장군, 결혼 해 봤나?”

“……안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생각 없고요.”

키에르트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어딜 결혼도 안 해 본 주제에, 결혼한 남녀 사이에 잔소리를 해?”

“정략결혼을 어떻게 보통 결혼과 같이 놓고 말씀하십니까! 정략결혼은 계약이나 마찬가집니다!”

“남녀 사이는 모르는 일이야.”

“……뭐라고요? 고, 공주님……, 잠깐. 그러니까, 남녀 사이에 뭐가 있으셨던……, 겁니까?”

렉싱턴은 이제 막 알에서 나와 삐약거리던 병아리가 갑자기 퍼덕이며 하늘을 나는 것을 본 것만큼 현실을 믿지 못했다.

혼란으로 가득 찬 렉싱턴의 시선을 받은 리시스가 쑥스러움에 뺨을 긁었다.


“아니, 뭐……. 남녀 사이가 그렇더라고. ……그렇게 됐어.”

 

 
기어이, 렉싱턴이 앉아 있던 의자의 팔걸이가 뜯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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