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키워준 은인과 살려준 남편
(109/153)
109. 키워준 은인과 살려준 남편
(109/153)
109. 키워준 은인과 살려준 남편
2022.08.18.
홀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황후, 리시스의 말에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반응할 수 없었다.
방금 리시스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에드린의 피를 부정했다.
평생을 몸담아 온 에드린이라는 나라를 부정했다.
마땅히 따라야 하는 왕의 명령을 무시하다 못해 능멸했다.
“고, 공주님…….”
“황후.”
렉싱턴의 부들부들 떨리는 부름을, 리시스는 차갑게 수정했다.
그것에 렉싱턴의 떨림은 더욱 커졌다.
너무 놀라서 몸이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입장에서 이 사태는, 어제까지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가 갑자기 적진으로 넘어가 칼을 겨눈 수준으로 받아들여졌다.
“황후 폐하께서…….”
쉬란의 귀족들도 충격은 만만치 않았다.
리시스가 실세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이 알았다.
그럼에도 눈앞에서 몰아치는 박력에서 오는 위압감은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들 역시 적이었기 때문에 렉싱턴 일행이 느끼는 충격과 배신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양쪽 모두 뭐라 반응할 수 없어 삼엄한 침묵만 길어졌다.
공기가 납처럼 굳어갔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공기의 무게가 폐에 들어찼다.
사람들은 숨 쉬는 것마저 불편해졌다.
“이렇게 됐으니, 렉싱턴 장군의 계획은 어때?”
리시스는 다시 왕좌에 털썩 앉으며 한쪽 턱을 괴었다.
이 와중, 리시스는 납의 호수에서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기를 내리누르는 무게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리시스였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그것에서 자유로운 타인은 키에르트였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선언 이후로 이미 온몸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사절이 보이지도 않는지 리시스만 쳐다보고, 리시스를 향해 미소 짓고, 리시스가 다가와 앉으니 바로 손부터 찾아 쥐었다.
정말 ‘이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는 굉장한 주접이었다.
렉싱턴의 눈에도 그 모습이 보였다.
‘왜?’
저건 예우를 넘어선 친밀감이다.
일부러 손을 잡고 리시스를 통제하려 드는 것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리시스도 키에르트의 손을 맞잡는 것까지 렉싱턴의 눈에 보였다.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둘 다 서로 철천지원수처럼 맹렬하게 싸워댔던 사이가 아닌가.
결혼 직전까지도 여차하면 죽거나 죽여버리겠다고 이를 갈았었다.
그런데 저 모습은 대체 뭔가.
‘친해서’라는 이유를 떠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렉싱턴에게는 황당한 모습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렉싱턴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리시스가 질문을 했다. 대답할 차례였다.
“……돌아가야지요.”
“납치라도 할 줄 알았는데.”
렉싱턴 장군의 무서운 점이 그것이었다.
에드린 왕의 명령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1대 10의 싸움이 되어도 공격해. 이번엔 자존심이 걸렸다.’라고 에드린 왕이 무턱대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려도 일단 공격을 나섰다.
그것이 충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제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충심이 깊어도 리시스에 대한 정이 더 깊었다.
파랗게 독이 올라 있던 렉싱턴의 눈가에서 힘이 빠졌다.
어깨도 축 처졌다.
그 모습을 본 리시스 역시 당장 전투 개시라도 할 것 같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리시스라고 가장 가족 같던 사람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내가 남으라면?”
“그래도 돌아가야지요. 제 조국은 에드린입니다.”
리시스를 향해서는 무른 시선을 보내는 주제에, 돌아가겠다는 답변만큼은 단호했다.
리시스는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키에르트가 상황 정리에 나섰다.
“국혼 무효는 받아들인다.”
리시스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손을 꾹 잡은 채 앞만 바라보았다.
놀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이혼 요구가 올 것까지는 두 사람도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 대책도 어느 정도는 세워 두었다.
결혼 무효라는 패가 나올 줄은 몰라서 잠시 허둥대기는 했지만 그 이후의 방침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후가 말한 대로 에드린의 공주가 아닌, ‘리시스’와의 결혼은 유지한다.”
이건 리시스의 재치였다.
키에르트는 그 재치 있는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여 반복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슬쩍 돌아보며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보였다.
키에르트도 리시스를 돌아보며 눈웃음으로 답했다.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짧은 순간이었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키에르트가 이어 말했다.
“따라서, 국혼의 조건이었던 양국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도 취소됨을 알린다.”
키에르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호를 받은 황실군이 움직였다.
“이, 이게 무슨……!”
렉싱턴은 사절단을 둘러싼 황실군을 보며 당황했다.
황실군은 제각기 무기를 들고는 있으나 사절단을 겨누지는 않았다.
하지만 둘러싼 병력 자체가 압박이었다.
여차하면 이대로 몰살을 시킬 수도 있다는 협박이 담긴 압박.
“사절단을 해하는 것은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입니다!”
렉싱턴이 키에르트를 향해 거칠게 외쳤다.
다급한 외침과 상반되게, 키에르트는 느긋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맹수의 사냥 같은 느긋함이었다. 이 자리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태도였다.
“에드린은 이미 전쟁 선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공격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전쟁 선포가 됩니까.”
“언제든 공격을 할 수도 있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쪽도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지. 더구나 그대는 에드린의 주요 병력이 아닌가. 이대로 얌전히 돌려보내면 상대의 손에 칼을 쥐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다 보면 살아남기 어렵다.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해도, 결국 살아남으면 영웅도 될 수 있고 좋은 사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군주는 치사할지언정 결국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 좋은 군주다.
렉싱턴은 키에르트가 그런 군주일 줄은 몰랐다.
‘그런 부끄러움도 모르는 치사한 수는 우리 리시스 공주님만 쓸 줄 아는 줄 알았지!’
리시스의 경우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수 있다고 너그러이 생각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가진 것도 많은, 강대국의 황제면서 저렇게 치사할 수가 있나.
‘설마 배웠나?’
옆에서 키에르트와 비슷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리시스를 보며, 렉싱턴의 속이 복잡해졌다.
아군일 때는 리시스의 저런 표정이 그렇게나 듬직했는데.
반대편에 서서 보니 진짜 미웠다.
“……그럼 어쩌실 겁니까.”
“어쩔까.”
“투항은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죽이십시오.”
키에르트는 렉싱턴의 비장한 눈빛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자신이 곧 죽을 수도 있는 위기 앞에서도 렉싱턴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키에르트는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리시스가 늘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대상이라 속이 좀 뒤틀리기는 했지만, 그래서 만나면 실수인 척 한 대 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리시스에게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죽이기야 하겠는가.
조금 놀려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서로 만만치 않은 상태일 때에나 가능했다.
지금은 키에르트가 너무 우위에 있어 괴롭히는 재미도 없었다.
“그게 제국을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이겠지.”
키에르트의 말에 리시스가 홱 돌아보았다.
아무리 리시스가 황후여도 사절에 대한 처리권한이나 동맹에 대한 협상은 키에르트의 의견이 우선이었다.
키에르트가 렉싱턴을 죽이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한다면 리시스도 말릴 수는 없었다. 리시스도 감정을 모두 제하고 계산한다면 지금 당장 렉싱턴을 제거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은 계산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키에르트에게 매달릴 수밖에.
리시스는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대 아주 얄미워.’
함부로 장난도 못 치게 하는 저 눈빛.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한 번 흘겨보고 다시 렉싱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황후를 보호해 주었던 그대 개인의 공을 높이 사, 돌려보내주도록 하겠다.”
“하아…….”
사절단 중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긴장으로 차올랐던 숨을 터뜨렸다.
렉싱턴은 안도하는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빚을, 진 기분입니다.”
“빚 맞아. 앞으로도 리시스를 위해 살라는 부담주기지.”
“제 주군은 에드린 왕이십니다.”
하지만 만약 에드린 왕이 리시스를 죽이라는 명령을 한다면?
그때도 계속 에드린 왕이 자신의 왕일 수 있을까?
렉싱턴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새로운 고민에 맞닥뜨렸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라면 선뜻 그러할 것이다.
왕을 위해 죽는 것은 오히려 영예였다.
그때, 리시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 에드린 왕이 임무에 실패한 렉싱턴 장군을 살려둘까?’
렉싱턴 장군의 부하나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에드린 왕이라면 홧김에라도 죽여버릴 수 있었다.
“……안 돼.”
리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지 마.”
“황후?”
“……공주님?”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리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렉싱턴에게 달려가 팔을 붙잡았다.
렉싱턴은 엉거주춤 리시스의 손을 뿌리치지도 못했다.
“가지 마! 가면 죽어!”
“……예?”
렉싱턴은 리시스의 절박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는 길에 기습이라도 준비해 두셨습니까?”
“내가 그럴 사람이……, 기는 하지만! 내가 아니라!”
기습은 리시스의 주특기였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면 에드린 왕이 장군을 죽일 거야.”
“설마 그러시겠습니까.”
“내가 매번 그 설마에 당하는 걸 보고서도 못 믿어? 에드린 왕은 당연히 자기 뜻대로 될 거란 생각밖에 안 해. 그런데 그게 안 된다? 그 화풀이를 누구에게 하겠어?”
“음…….”
렉싱턴 장군도 에드린 왕의 성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리시스의 말을 그냥 웃어넘기지 못했다.
그렇다고 리시스의 말대로 에드린에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제 나라는 에드린입니다. 저는 에드린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황후 폐하.”
쉬란의 황후인 리시스와 렉싱턴의 입장은 달랐다.
죽을 것을 알아도 에드린을 배신하고 쉬란에 주저앉을 수 없었다.
리시스는 렉싱턴을 설득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황후가 되었어도 사람 하나 자기 맘대로 할 수 없었다.
‘……아니지?’
리시스에게도 힘이 있었다.
렉싱턴을 잡아놓기 위해서라면 굳이 설득 말고 쓸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리시스는 심호흡을 하고, 질렀다.
“체포해! 적국의 병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