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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결혼무효 (108/153)


108. 결혼무효
2022.08.14.



 
이혼도 아니고, 무효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리시스는 겨우 노기를 누르며 물었다.

머리 위에 쓰고 있는 쉬란의 황후의 관이 겨우 폭주를 막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머리 뚜껑이 열려버릴 정도로 순식간에 화가 치솟았다.


‘이혼까지는 예상했지.’

그런데 무효?

지금까지 키에르트와 자신이 쌓아 온 모든 관계와, 그 결실을 없는 것 취급하겠다는 말이다.

더불어 리시스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무능함을 욕하는 짓이기도 했다.


“나머지는……, 직접 읽어 보십시오.”

렉싱턴 장군은 종이를 내밀었다.

전할 골자는 전했다.

그 이상 악역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지금 렉싱턴 장군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렉싱턴 장군은 까마득히 몰랐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리시스는 강제로 끌려가 신부의 드레스 가봉을 하며 울먹이고 있었다.


‘적국에 팔려가는 것보다 그냥 도망쳐서 숨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리시스는 그렇게까지도 말했다.

당연했다.

국혼 이야기가 오가기 직전까지도 둘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원수였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 자신의 병사를 지킨다는 명분이 앞섰지만 사람이 어떻게 명분만으로 살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냥 승패를 주고받는 것에서 불이 붙었다.

상대와 대화 한 마디 나눠보지 않았어도 철천지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행동이나 작전이 서로에게 큰 엿을 퍼먹여 준 덕분이었다.


‘원하시면 그러셔도 됩니다.’

렉싱턴 장군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 그렇게 편을 들었다.

말뿐인 위로는 아니었다.

리시스가 원한다면 정말 에드린과 군을 버리고 그렇게 해 줄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만큼 렉싱턴 장군에게도 에드린은 치 떨리는 적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적국에서 괴롭게 살았을 리시스에게 혼인 무효라면 탈출이나 마찬가지다.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좋아하시지는 않고 화를 내십니까?’

그는 명령에만 따르는 군인일 뿐이었다.

장군이라는 직함은 달았지만 전장에 실제로 투입되어 구르는 사람은 졸병과 다를 바 없었다.

알짜배기 요직을 맡은 사람들은 다 수도에서 잘해 먹고 편안히 살았다.

그래도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지 않았다.

성공을 하면 좋고, 못 해도 목숨 붙어 있으면 그만이고.

그 정도로 적당히 살았다.

그래서 리시스의 속을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쉬란의 황후로서 자신들을 누르려는 시도부터, 렉싱턴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저게 내가 알고 있는 리시스 공주님이 맞던가? 혹시 쉬란의 저 황제 놈이 이상한 수작을 부려 정신을 이상하게 만든 건 아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키에르트를 보는 렉싱턴의 눈빛이 한층 거칠어졌다.

입구에서 무기를 빼앗겨 던질 수 있는 것이 없어 안타까웠다.

허리에 칼만 있었더라면 이대로 목숨을 바쳐서라도 리시스를 탈출시켰을 텐데.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제롬이 다가와 렉싱턴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갔다.

렉싱턴은 잠자코 편지를 내어주었다.

새삼 거리가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보십시오.’ 하고 직접 들고 가 손에 쥐여 주었을 편지가, 이제는 사람의 손을 거치고 한참 먼 거리를 넘어야 전해졌다.

이윽고 편지가 리시스와 키에르트의 손에 들렸다.

두 사람이 각각 편지의 한쪽을 잡고 머리를 맞대며 함께 글씨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렉싱턴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저게 뭐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왜 적국의 황제와 저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인가.

혹시 등 뒤에 칼이라도 겨눠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맨몸이라도 날려야 하는 것은 아닌가 렉싱턴은 급기야 안절부절못하기까지 했다.


“초야를 정식으로 치렀다는 증거가 없음, 국교를 단단히 하는 의무를 책임지지 않음, 둘 사이에 후계가 없음. 따라서 제대로 된 결혼이 아니었음을 주장하며, 아울러 에드린에 대한 모욕에 대한 책임으로 이 혼인에 대한 무효를 주장한다.”

리시스는 읽으면서 표정이 점점 묘하게 꼬여갔다.

키에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제 기분대로 구나?”

“원래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기는 했죠…….”

에드린을 떠나 있었더니 이 ‘이렇게까지’를 너무 오랜만에 겪어서 얼떨떨하긴 하지만.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했다.

리시스가 지금까지 찢어버린 에드린 왕의 편지만 해도 몇 통인가.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리 각오를 했다 하더라도 공식적인 ‘혼인 무효’라는 글자는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내 마음이 내 생각 같지 않았네.’

황후 자리는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다 생각했다.

영원히, 당연하게 자신이 가질 자리도 아니었다.

키에르트가 너무 밑지는 결혼이지 않은가.

그를 위해서라도 내려놓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타의에 의해 끌려 내려오게 되니 그러기가 싫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저 돌려보내실 거예요?”

“아니.”

키에르트는 돌려 말하지도, 다른 말을 붙이지도 않았다.

그의 입장은 단호하고 간결했다.


“그대는. 돌아갈 건가?”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되물음에 잠깐 흔들렸다.

에드린 왕의 뜻대로 해 줄 의향은 전혀 없었지만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상황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허공에서 공이 날아와 품에 안착한 것 같았다.

받긴 받았는데 이 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언젠가 돌아가게 된다면 쫓겨나는 것도 아니요, 끌려 내려오는 것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떠나고 싶었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일 때에.


“……흐음.”

키에르트는 반쪽짜리 정답에 불만을 표했지만 다른 투정을 붙이지는 않았다.

리시스의 마음이 그렇다는데 자신이 어떻게 투덜거리겠는가.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노력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이 사안에 대한 대처는 제가 알아서 해도 돼요?”

“뭐든. 그대의 뜻대로.”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에 권한을 넘겨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리시스만큼 발언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결혼을 한 당사자에, 쉬란의 황후인 데다, 에드린의 공주이기까지 한 사람은 리시스뿐이었다.


“렉싱턴 장군. 먼저 물어볼 것이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혹시 잡혀 있는 인질이 있나?”

“……예?”

렉싱턴 장군은 멍한 눈으로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인질은 당신 아닙니까, 당신…….

적국에 와 있는 사람이 본국에서 온 사람한테 인질이 있냐고 묻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동안 결혼해서 가족이 생겼다든가. 소중한 부하들이 에드린 성에 갇혀 있다든가.”

아무래도 쉬란에 와 있는 동안 공주님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렉싱턴 장군은 기가 막혀 딱딱하게 답변했다.


“결혼은 안 했습니다. 저는 아직 혼자 몸이고, 부하들은 여기 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본국의 성에서 지내는 것은 갇혀 있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받았다고 합니다.”

“음, 그러니까 실패해도 에드린에서 쥐고 협박할 목숨은 없다 이거지?”

“……제가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건 제 목숨을 내놓을 일이지, 어째서 다른 이의 목숨을 쥐고 협박하신단 말씀입니까.”

리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렉싱턴 장군의 저 우직함은 여전했다.

그러니 그 긴 전쟁 중에 반기 한 번 들지 않고, 떨거지로 보내진 공주까지 맡아 키워준 것이다.

마지막 전투에서 팔을 심하게 다쳐 회복할 수 없게 되었어도, 그런 위험한 곳에 자신을 몰아넣은 에드린 왕을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렉싱턴 장군의 머릿속에 철저하게 박혀 있는 충성심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제가 이번 사절 임무에 실패를 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응.”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에드린 왕의 편지를 북 찢어버렸다.
 

 


“무, 무슨!”

“어억!”

렉싱턴 장군을 비롯, 그의 뒤에 함께 서 있던 병사들까지 파랗게 질려 비명을 질렀다.

리시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경악의 시선을 받으며 반으로 쪼개진 편지를 겹쳐 다시 한번 북 찢었다.


“어어억!”

에드린 사람들은 기절할 것처럼 놀랐다.

이래서 뼛속까지 충심으로 가득 찬 병사들은 곤란하다.

충심이란 배고픔과 추위에 물러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놓아서는 안 될 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충심이야말로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 목숨을 부지하는 희망 같은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런 이들에게 왕은 지고한 존재였다.

왕의 편지 역시도 차라리 자신의 가죽을 찢는 게 낫다고 여길 만큼 소중한 것이었다.


“자, 잘 봐. 이게 에드린 왕의 같잖은 소리에 대한 쉬란의 답이야.”

리시스는 두 번으로도 모자라 종이가 너무 작아 더 이상 찢어지지 않을 때까지 잘게잘게 찢었다.

두 손 가득 종이 조각이 찼다.

리시스는 움켜쥔 종이 조각들을 렉싱턴의 면전에 뿌렸다.

종이 조각 사이로 경악한 렉싱턴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에드린 왕의 인형이 아니야.”

“하, 하지만 에드린의 공주십니다.”

리시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이제부터 에드린의 공주 안 하지, 뭐.”

이전에는 에드린의 공주라는 신분이라도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나마 공주니까 주는 밥 먹고 목숨이라도 붙여 놓을 수 있었다.

쉬란에 온 후에도 황제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 내쳐질 수 있는 황후보다는, 적어도 혈연으로 묶여 있는 공주가 안전하다 여겼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였다.

에드린과의 인연은 착취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키에르트가 준 안정감은 그보다 훨씬 컸다.

거기에, 이제는 쉬란에 자신이 뿌리박아둔 일이 꽤 많았다.

적어도 리시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곤란할 일들이 꽤 생길 정도는 되었다.


“쉬란과 에드린의 국혼을 취소하고 싶다? ……그러라지.”

어차피 두 나라가 국혼으로 인해 주고받은 상호 계약은 ‘서로 침략하지 말기.’ 정도였다.

국혼을 취소하는 절차가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로 간략한, 결혼 같지도 않았던 결혼.

에드린의 공주를 쉬란의 인질로 보내는 것으로, 쉬란은 내부의 정보를 퍼다 나를지도 모르는 위험요소를 황궁에 들이는 것으로 서로의 약점 하나씩을 잡는 계약에 불과했다.

그 계약은 이미 무산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인간 ‘키에르트’와 ‘리시스’의 결혼은 마음대로 못 해.”

마음은 계약에 묶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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