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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그분 등장 (107/153)


107. 그분 등장
2022.08.11.


웬 새가 창문을 쪼나, 무심결에 돌아보았던 리시스는 기겁했다.


“티티?!”

분명히 에드린으로 달려가고 있어야 할 티티가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

키에르트도 멈칫해 나가려던 발을 멈추고 돌아왔다.


“너 여기서 뭐 해?! 어떻게 된 거야?”

리시스가 창문을 열고 티티를 안으로 들였다.


“삣!”

티티는 창문이 열리자마자 호다닥 뛰어들어와 리시스의 품……에 안기지 않고, 키에르트에게 직행했다.


“…….”

“…….”

배신감 가득한 리시스의 눈빛과, 당황한 키에르트의 눈빛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심정이 어떻든 티티는 솔직한 짐승이었다.


“삐잉!”

 

 
키에르트의 팔에 몸을 문지르며 호두를 재촉했다.


“……혹시 호두, 있나?”

“일도 제대로 안 하고 왔을 수 있는 짐승한테 뭐하러 호두를 먹여요. 이리와, 너!”

원한을 가진 리시스는 무자비하게 티티를 끌어냈다.

티티는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리시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뱉어봐, 너. 씁!”

리시스의 다그침에 티티는 씩씩거리더니 구슬을 퉤 뱉었다.

그리고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다시 키에르트에게 달려가, 아예 소매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키에르트가 소매를 토닥이며 리시스에게 다가갔다.


“티티가 중간에 일을 포기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나?”

“아뇨……, 시간이 오래 걸리면 걸렸지 포기하는 일은 없는데. 너무 멀어서 그랬나?”

티티는 굉장히 집요한 성격이었다.

끝없이 호두에 집착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 티티가 한 번 목표로 한 대상에게 가지 않고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에드린의 국경은 쉬란의 황도에서 어느 길로 가도 멀다.

티티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직선거리로 달리기만 했다 하더라도 도저히 왕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일단 구슬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죠.”

리시스는 티티의 입에서 꺼낸 구슬을 열었다.


“어……?”

구슬 안에 들어 있는 쪽지 종이가 달랐다.

누군가는 받아서 쪽지를 바꿔 넣었다는 의미다.

리시스는 서둘러 돌돌 말린 쪽지를 펼쳤다.

『곧 도착합니다.』

렉싱턴 장군의 짧은 전언이었다.


“곧……?”

리시스는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듯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키에르트도 금시초문이었다.

황제의 손에도 들어오지 않은 정보는 제국의 그 누구도 모르는 정보라는 뜻이다.

그때 창문에서 다시 한번 톡톡 소리가 울렸다.


“전서조도 왔네요?”

이번엔 새가 날아들었다.

창문을 열자 새는 키에르트의 팔뚝에 달라붙듯 착 내려앉았다.

누구도 거치지 않고 키에르트에게 직접 정보를 전할 때 이용되던 새였다.

티티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황제의 전서조.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전서조가 가지고 온 소식을 함께 읽었다.

『렉싱턴 장군, 사절로 황도 향하는 중. 오후 도착 예정.』

리시스와 키에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글자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글자는 변하지 않았다.


“오후라고요……?”

“그럼 거의 다 왔다는 소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보통은 사절을 보낼 때, 사절을 보내겠다는 알림을 먼저 보낸다. 그래야 상대국에서도 사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니까.


‘이건 에드린 왕 성격상 무시했다 치고.’

분명 좋은 일로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헨크가 흘린 리시스의 언행에 대한 항의와 경고차 보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국경을 소리 없이 지나기는 어렵다.

사절로 오는데 일부러 국경초소가 없는 곳을 골라 들어올 이유도 없었다.

국경초소가 없는 곳은 보통 길이 닦이지 않은 황무지거나 사람이 오가기 힘든 지형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맞아보면 되겠군. 빈틈없이 준비해. 서둘러서.”

키에르트는 문밖에서 대기하던 제롬에게 신속한 명을 내렸다.

에드린에서 언질도 없이 보낸 사절이니 정성스레 맞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엄격한 형식은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렉싱턴 장군님이니까…….”

“‘그’ 렉싱턴 장군이니까야.”

그리고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리시스와 키에르트의 마음이 그 부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키에르트는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때 아닌 사절 맞이 준비로 황궁이 붐비기 시작했다.

***

리시스는 조금 긴장했다.

유일한 가족처럼 지냈던 렉싱턴 장군을 다시 보게 되는데 반가움보다 긴장이 앞서다니.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랬다.


“별일 없겠죠……?”

“별일이 생길 수도 없지.”

이곳은 쉬란의 황도.

에드린으로서는 적국의 한복판, 적으로 우글우글한 본거지였다.

아무리 렉싱턴 장군이 용맹하다한들 이곳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하필 렉싱턴 장군님이 사신으로 온다니까 더 긴장이 돼요.”

“그러게. 하필.”

“……?”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말에 적극 동의했다.

그러나 말과 다르게 느끼는 방향은 몹시 다른 것 같았다.

리시스는 ‘어쩌지’였다면 키에르트는 ‘어쩔까’였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리시스.

이걸 죽여도 되나, 한 가지만 고민하는 키에르트.

둘은 엄청 달랐다.


“그냥 아무나 사절로 보내면 에드린 왕과 똑같이 취급해버렸을 텐데, 설마 렉싱턴 장군님을 보낼 줄은…….”

렉싱턴 장군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에드린 왕의 전언을 들고 왔다 한들 렉싱턴 장군은 렉싱턴 장군이었다.

아무나에게나 하듯 냉대를 할 수 없었다.

렉싱턴 장군이 들고 올 전언은 분명히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마냥 반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렉싱턴 장군을 반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야속하게 시간만 흘렀다.


“입성했습니다.”

시종이 알리는 말에 리시스는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것을 옆에서 본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파랗게 식어가던 리시스의 손이 키에르트의 온기를 받아 조금씩 녹았다.

오랜만에 쓴 황후의 관, 오랜만에 앉은 황후의 왕좌가 어색했다.

리시스는 굳어서 뻣뻣한 고개를 돌려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키에르트는 확신을 주듯 리시스의 손을 다시 한번 꾹 힘주어 쥐었다.


“그대는 쉬란의 황후야.”

키에르트의 말에 어색하던 자리가 조금은 편해졌다.

리시스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렉싱턴 장군을 마주하면 다시 에드린의 공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았지만, 키에르트가 곁에 있으니 자신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알현실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알현실은 황궁에서 가장 큰 홀 중의 하나였다.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위압적일 정도로 크게 만들었다.

그 앞에서도 이방인들의 걸음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만약 리시스가 그들 사이에 있었더라면 그 사실에 뿌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리시스는 적국의 황제와 나란히 앉아 이방인이 된 전우를 맞이하고 있었다.


“렉싱턴 장군 외, 에드린의 사절이 알현을 청합니다.”

“들라 하라.”

키에르트의 명령에 홀의 거대한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리시스가 익히 알고 있는, 누구보다 친숙한 이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렉싱턴 장군님.’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울컥 목이 메었다.

전장에서는 거의 모든 시간을 붙어 생활했던 이였다.

떨어진 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얼굴을 다시 보니 실감이 났다.

문 앞에서 눈을 내리깔고 있던 렉싱턴 장군이 천천히 눈을 들어올렸다.

쉬란의 황제가 정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렉싱턴 장군의 눈은 곧장 리시스를 향했다.

적진 한가운데라고 의식해서인지 렉싱턴 장군의 눈빛도 단단히 얼어 있었다.

그러나 리시스를 발견한 순간, 눈이 마주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풀어져 내렸다.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에드린의 사절 대표, 렉싱턴입니다.”

렉싱턴 장군은 홀의 중앙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가벼운 목례와 함께 먼저 인사를 올렸다.

그의 뒤로 늘어선 사절단에도 리시스가 아는 얼굴이 꽤 있었다.

리시스는 그리운 마음에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바라보다가 손을 꽉 쥐는 키에르트의 악력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눈에 힘! 힘!’

지금은 마냥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에드린의 공주가 아니다.

쉬란의 황후다.

리시스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았다.

독한 마음으로 보니 벌써부터 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엄하다!”

리시스는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키에르트가 나서도 되었지만 이런 건 옆 사람이 나서주는 것이 더 모양이 산다.

그리고, 리시스가 어떤 자세로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알려줄 필요도 있었다.

먼저 무례했던 것은 렉싱턴이었다.

쉬란의 황후는 그것을 못 본 척 넘어가줄 의향이 없었다.


“공주님……?”

렉싱턴 장군 쪽은 리시스의 호통에 술렁였다.

키에르트라면 몰라도 리시스가 소리를 칠 줄은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리시스는 그 술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강하게 몰아붙였다.


“나는 지금 쉬란의 황후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제국의 황제와 황후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갖춰라.”

그제야 렉싱턴 장군도, 사절단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눈빛이 바뀌었다.

그리움과 애틋함을 느끼던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선을 그은 것은 리시스였다.


‘어떻게 우리 공주님이 스스로 ‘쉬란의 황후’라는 말을 스스로 하실 수가 있지!’

배신감을 느낄 만도 했다.

리시스는 쉬란에 와서 키에르트 덕분에 마음이 많이 풀어졌지만, 이들에게 쉬란은 아직 매일같이 싸움을 벌이던 원수일 뿐이었다.

리시스를 향해서는 안절부절못하던 이들도 날카로운 눈을 했다.

렉싱턴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적대적인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표정에 실려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치켜든 채 두 사람에게 말했다.


“타국의 황제와 황후에게 내 왕에게 하는 만큼의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타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맹국의 황제야.”

리시스의 지적에 렉싱턴 장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까지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

리시스는 멈칫했다.

뻔하기는 했지만 아니기를 바랐던 그 예상이 적중할 것 같았다.

렉싱턴 장군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고급스러운 종이에, 큼직한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에드린 왕실의 인장이다.

리시스도 전장에 있을 때 몇 번 받아봐서 안다.

에드린 왕실의 인장이 찍힌 종이는 언제나 불길하고 불쾌한 내용만을 담고 왔다.

렉싱턴 장군은 종이를 앞에 꺼내들고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에드린은 쉬란과의 국혼이 무효임을 주장하며, 에드린의 공주 리시스의 반환을 요구한다.”

“무효?!”

리시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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