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프러포즈 대작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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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프러포즈 대작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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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프러포즈 대작전 (2)
2022.08.07.
앞에 말한 볼드윈 후작의 사례는 전혀 써먹을 수가 없었다.
굳이 꽃이 아니어도 의미를 담을 만한 기록이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서로 죽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였던 부부 사이에 그런 달콤한 기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전투 기록일지라면 있었다.
“전투 기록일지를 바탕으로 장기판 무대 위에서 그걸 재연하는 건 어떻겠는가.”
“프러포즈입니까, 선전포고입니까?”
“앞으로는 인생의 그 어떤 전투도 함께하겠다는 선전포고인 것이지.”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듣고 보니 은근 괜찮은 것 같아서 허멀 후작은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두 유부남들은 영 찝찝한 표정을 거두지 못했다.
“프러포즈에 꽃이 꼭 들어가는 건 앞으로 인생을 꽃밭으로 깔아 주겠다는 의미도 있는 겁니다만…….”
“장기판 위에 꽃을 깔아두면 되나?”
이번에는 두 유부남들도 흔들렸다.
두 사람의 추억(?)이 담겨 있고, 꽃도 있다. 지향점도 있다.
프러포즈의 요건에 들어맞기는 한다.
그런데 이게 맞는 건가? 정말 맞는 건가?
너무 일반적인 프러포즈와 달라서 상식에 혼란이 왔다.
“일단 하웬 백작의 프러포즈도 한 번 들어보지요.”
“그러지.”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자신의 순서가 된 하웬 백작이 목을 가다듬었다.
“흠, 흠. 제 아내는 워낙 화려한 사람이었어서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언제나 눈에 띄고, 또 사람을 좋아하기도 했고요.”
하웬 백작의 부인은 지금도 사교계에서 꽤 인기 있는 명사 중 하나였다.
세니아만큼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사람들의 이목과 호감을 사서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는 늘 중심에 있었다.
“우리 황후도 어디에 갖다 놓아도 반짝거리지. 태양처럼 눈이 멀게 밝지는 않지만 밤하늘의 별빛이나 나뭇잎의 이슬처럼 묘하게 눈이 간단 말이야.”
키에르트가 또 빠지지 않고 끼어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객관적으로도 리시스가 귀엽고 반짝거리는 외모라는 것은 인정했으나 그걸 늘 지엄하신 황제 폐하의 입으로 들으니 기분이 참 그랬다.
그래도 하웬 백작은 신하된 도리로 맞장구를 쳤다. 속으로는 자기 부인이 훨씬 더 빛난다고 구시렁대면서.
“아무튼, 그래서 프러포즈도 성대하게 준비했습니다. 아예 프러포즈 파티를 한다고 초대장을 돌리고, 드레스코드도 맞췄고요. 모든 사람들이 흰옷을 입은 가운데 저희 아내만 새빨간 드레스에 루비를 달고 등장했지요.”
하웬 백작은 그날을 생각하기만 해도 흐뭇한지 허공을 바라보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사람들이 미리 준비한 붉은 꽃잎을 홀 가운데에 선 아내에게 던졌지요. 아, 건물도 일부러 새하얀 대리석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거 요즘도 잘 써먹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가문의 자랑이지요.”
“그 덕분에 가문 문 닫으실 뻔했는데, 그러셔야죠.”
“…….”
프러포즈를 위해 대리석으로 저택을 짓고, 파티를 열고……. 거기까지는 다 돈의 힘이었다.
키에르트는 ‘그 정도면 할 만한데?’라고 계산을 하며 경청했다.
하웬 백작가의 재력이 해변의 모래성이면 키에르트의 재력은 산맥의 바위산이었다.
“그리고 신전의 합창단을 초대해 축복의 노래를 부르게 했죠. 그러면서 흰 비둘기를 날려 올리고, 사람들이 아내를 감싸고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제가 등장해서 ‘내 세상의 중심, 그대가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이 세상의 중심일 것입니다. 내 모든 세상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라며 하웬 백작가의 모든 재산 권리증과 제 목숨까지도 바쳤지요.”
“…….”
사랑꾼 볼드윈 후작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 정말 감동적이었지요.”
그는 촉촉한 목소리로 그 순간을 회상했다.
그러나 행사를 만들어야 하는 허멀 후작과, 그것을 실제로 해야 하는 키에르트는 침묵했다.
다 가능한데, 목숨까지도 여차하면 될 것 같은데, 쉬란 제국은 하웬 백작가와는 사정이 달랐다.
“혹시 그 바치신 걸 아내분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허멀 후작이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물었다.
“냉큼 받았습니다.”
“……반환도 없이?”
“예, 가지라고 준 겁니다만. 돌려주면 전 그날 당장 죽어버릴 겁니다.”
“…….”
다른 건 다 줘도……, 나라를 주는 건 좀…….
키에르트가 마음대로 줄 수도 없고, 주는 방법도 어렵고, 준다 하더라도 리시스가 냉큼 받을 리가 없었다.
돈을 바른 무대장치까지는 괜찮았는데,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보니 그건 그저 배경일 뿐이었다.
포인트는 ‘다 준다!’였다.
이것도 써먹을 수 없는 방법이었다.
키에르트의 입장과 사정을 아는 두 유부남들도 의기소침해졌다.
신나게 이야기를 떠벌렸던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황송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프러포즈란 받는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말입니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한 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 대충 알았다. 물러가도록.”
허멀 후작과 둘이 남은 키에르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냥 프러포즈라면 폐하께서 내키시는 대로 해도 되겠습니다만…….”
“온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만한 요소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면서 리시스의 취향에도 맞추고 싶고.
일단 리시스의 취향이 어디에 달렸는지도 잘 모르겠는 것이 문제였다.
“차라리 황후 폐하께 직접 여쭤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래도 되나?”
“안 될 건 없지 않습니까. 괜히 이상한 헛다리짚는 것보다는 차라리 소통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도 그렇군.”
기왕이면 혼자 리시스에게 최고의 프러포즈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이도저도 아니고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프러포즈를 하느니, 자신의 욕심을 조금 내려놓는 편이 나았다.
키에르트는 적어도 허세를 부리지는 않았다.
“가지, 그럼.”
키에르트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리시스는 리시스 대로 바빠 황후궁에 처박혀 있었다.
“어? 폐하 오셨어요?”
리시스는 회의실에서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책상 가득 늘어놓은 것들을 이리저리 들춰 보며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키에르트를 맞았다.
회의실 안은 회의의 열기로 후끈했다.
“그대의 자문을 받을 것이 있어서.”
“네, 뭔데요?”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황후 폐하, 이건 이쪽으로 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어어. 괜찮네. 아예 다 통일하자.”
“예, 알겠습니다.”
불과 하루 사이에 꽤 많이 진척이 되었는지 리시스가 지시하는 내용은 키에르트가 들어도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리시스의 영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바쁜 사람 방해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키에르트의 방문목적도 축제와 관련된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대는 화려한 것이 좋은가, 소박한 것이 좋은가?”
“화려한 거요.”
리시스는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즉답했다.
“좋아. 그럼 무슨 색을 제일 좋아하지?”
“음……, 검은색?”
“……검은색? 왜?”
“때가 잘 안 타서요?”
“…….”
“……아닌가?”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취향이나 호불호 같은 것은 오래 생각하지 않고 대답하는 것이 진심에 가까울 테니 나쁘다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취향 자체에 문제가 있으면 어떡하지.
리시스에게 물어보는 것이 맞긴 한 걸까.
키에르트는 짧은 순간 자신의 선택을 의심했다.
“그런 실용적인 이유 말고.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고른다면.”
“아! 그럼 하얀색이요.”
“하얀색?”
“네, 제일 때가 잘 타는 색이잖아요. 그거 관리 잘하는 것도 자랑거리니까?”
“……음, 그래. 하얀색.”
이유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덜 낭만적이었지만 리시스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키에르트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얀색.
“그럼 진지한 분위기와 밝고 가벼운 분위기, 어느 쪽이 좋지?”
“둘 다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러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취향인 쪽을 말해 봐.”
“으음…….”
키에르트가 포기하지 않고 달라붙어 달달 볶았다.
그제야 리시스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허공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축제와 관련된 거라면 밝고 가벼운 게 낫지 않을까요?”
이제야 리시스도 키에르트가 묻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사실 모르고 대답하는 쪽이 조금 더 도움이 되었을 것도 같은데.
이미 리시스가 눈치를 챘으니 키에르트도 더 몰래몰래 말할 이유가 없어졌다.
리시스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키에르트는 솔직히 물었다.
“기왕이면 그대의 취향에 맞춰 준비를 하고 싶어. 그래서 말인데……, 그대가 혹시 생각하고 있던 것이나 꿈꿔왔던 프러포즈가 있으면 말해주지 않겠나.”
“없는데…….”
“……없어? 왜?”
설마 없을 줄은 몰랐다.
리시스는 처음 꽃을 받을 때에도 꿈꾸던 상황이 따로 있던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대부분 일생에 한 번밖에 없는 프러포즈라는 경험에 대해서도 꿈꾸는 바가 있을 줄 알았다.
“그야……, 제가 프러포즈 받아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거란 생각 자체를 안 했었으니까…….”
결혼을 하게 되면 정략결혼일게 뻔했으니 꿈도 꾸지 않았다.
정략결혼을 안 해도 되면 그냥 결혼 자체를 안 할 생각이었으니, 프러포즈는 리시스의 꿈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라도 고민을…….”
“그걸 고민하는 건 폐하의 몫이죠.”
“그래도 그대의 취향이…….”
“전 폐하가 해 주시는 거면 ‘아무거나’ 다 좋아요.”
리시스는 생긋 웃었다.
“황후 폐하! 빨리 와서 이것 좀 봐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어, 갈게! 가! 폐하, 그럼, 전 이만.”
리시스는 그 답변만 휑하니 남겨놓고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사람에게 달려가 버렸다.
‘아무거나.’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그 아무거나.
성과가 있다면 있기는 했는데,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키에르트가 받아 낸 답은 결국 ‘화려한’, ‘하얀색’, ‘아무거나’뿐이었다.
더 이상 뭘 물어볼 수도 없었지만 키에르트는 황제궁으로 돌아가는 대신 황후궁의 회의실 구석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황제 폐하께서 자리하고 계셔도 황후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니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편한 분위기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응, 응. 이거 좋네.”
“예, 그럼 이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두 손 걷어붙이고 바삐 일하는 리시스의 모습은 확실히 생기 있게 빛났다.
예쁘게 꾸미고 꽃병 안의 꽃처럼 편히 살기를 바라던 때도 있었지만, 저렇게 빛나는 사람을 어떻게 꽃병에만 꽃아둘 수 있겠나.
다만 저 빛이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욕심만 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저 빛을 빼앗아가려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지.
그들이 선수를 치기 전에 키에르트가 더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키에르트는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회의실 창문을 톡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도 이질적인 소리라 정신없이 오가던 사람들도 모두 멈추고 창문을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