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선결혼 후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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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선결혼 후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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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선결혼 후연애
2022.07.31.
“뭐지?”
“우선은 폐하와 먼저 상의하고 싶어요.”
다른 신하들은 내보내라는 신호였다.
키에르트은 즉시 신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어차피 자리를 차지하고만 있을 뿐, 드물게 분노한 황제 폐하 앞에서 제대로 된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회의는 거의 리시스 혼자 독주하던 중이었다.
“다 나갔나요?”
마지막 한 사람의 등이 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리시스가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했다.
신하들을 내보낸 데에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렌데일 공작에겐 감시가 붙어 있으니 괜찮아.”
오늘 회의는 주요 가문의 신하들은 모두 모인 회의였다.
당연하지만 선대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온 공신 가문인 렌데일 공작도 참여하는 것이 맞았다.
그것도 리시스의 바로 옆, 신하들 중에서는 최고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회의 내내 렌데일 공작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지만 리시스와 끝없이 견제의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부의 적을 앉혀둔 상태에서 진짜 비밀 작전 회의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둘만 남자 키에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그 방법을 들어봐도 되나?”
“네. 여름 축제요.”
“!”
리시스의 말에 키에르트도 바로 머릿속에 생각이 번득였다.
갑작스럽게 로구안의 정세변화로 뒷전이 되어버렸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여름이 어느샌가 훌쩍 다가왔다.
여름 축제의 시기가 바싹 다가온 것이다.
“아무리 전쟁의 위험이 있어도 여름 축제는 생략된 적이 없었다면서요?”
“그렇지, 황실에서 대대적으로 축제를 열지 못해도 각 마을마다, 집마다라도 작게 기리는 날이니까.”
“전국적으로 소문을 내기에는 완전히 딱 맞는 행사겠네요!”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나는 감이 안 오는데.”
축제를 이용한다는 리시스의 발상은 키에르트도 적극 찬성했다.
하지만 여름 축제의 근원이 문제였다.
여름 축제는 500년 전, 에드린의 침략을 무찌르고 쉬란을 제국으로 키워낸 대제(大帝) 헤스테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다.
그 승리의 결정적인 원인은 쉬란의 뜨거운 여름.
쉬란보다 추운 곳에 사는 에드린 침략자들은 더위에 무력해졌고, 대패하여 물러갔다.
그 후로 여름을 축복하고 기리는, 가장 크고 성대한 축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즉, 에드린과 쉬란 사이에 있던 큰 전쟁을, 여름 날씨로 무찔러 낸 것이 기뻐 시작된 축제였다.
한마디로 ‘에드린 이겨서 신난다!’는 축제인데, 대체 이걸 어떻게 ‘황제 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 끼어들지 마시고 꺼지시오!’로 재해석해 알린단 말인가.
“이야기야 짜 맞춰 넣기 나름이죠.”
리시스는 자신 있어 보였다.
“그대가 어련히 잘 하리라 믿고는 있지만.”
“자세한 건 저도 축제 준비를 할 사람들과 이야기 해 봐야겠지만요.”
어차피 축제를 준비하고 있는 것은 리시스다. ……요새 훈련 때문에 손을 놓고 있기는 했지만.
축제냐 전쟁이냐를 놓고 중요성을 판단한다면 단연 전쟁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리시스는 어떤 싸움에도 맞춰 응할 수 있었다.
로구안이 소문으로 싸움을 걸어왔다면, 소문으로 받아쳐 주는 거지.
투지로 불타는 리시스의 눈동자에 키에르트는 걱정으로 굳었던 얼굴을 풀고 씩 웃었다.
“그대와 나란히 서서 싸울 수 있게 되어 영광이야.”
“네? 폐하가 왜요?”
키에르트의 의지는 감사하지만 여름 축제는 황후의 몫이다.
리시스는 오히려 놀랐다.
“이게 그냥 축제였다면 크게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이건 그대와 내가 함께 출전하는 첫 전투이지 않나. 마땅히 내가 뒤를 맡아 지지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 말이 맞았다.
“좋아요, 그럼 폐하께 뒤를 맡길게요.”
“얼마든지.”
키에르트는 호언장담했다.
리시스와 함께 싸운다는 것에 흥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키에르트가 상상하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
“폐하께서 축제 준비에 적극 참여를……?”
“아예 뒤를 작정하고 봐 주신다고요……?”
“그러니까, 준비부터 아예 함께……?”
여름 축제 준비 위원회의 세 명, 허멀 후작, 앨린, 가넷은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다.
리시스는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됐어.”
하지만 곧 미간을 모았다.
자신이야 키에르트의 능력을 더할 수 있으니 마냥 좋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일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 있었다.
“……아, 불편하려나? 역시 가만히 계시라고 해야…….”
황후가 하라면 하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창의적인 일인데 불편함은 최대한 줄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먼저 철회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췄다.
“아니요!”
“환영합니다!”
“적극 찬성합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하며 만류했다.
“……어, 어?”
“황제 폐하께서 함께 진행을 해 주신다면! 따로 허가가 필요 없는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 아닌가요!”
앨린이 급격하게 흥분하며 외쳤다.
앨린은 그럴 수 있었다.
리시스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파티를 연 적이 없으니, 지금 얼마나 신이 났겠는가.
축제 안에는 파티도 물론 포함된다.
거기에 앨린은 화려하고 즐거운 모임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화려함에는 돈이 든다.
여름 축제는 쉬란의 가장 큰 행사이니 배정된 예산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 예산을 다 화려한 데에만 쓸 수는 없는 법.
반드시 써야 하는 지출을 이리 빼고 저리 빼다 보면 결국 남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그걸 황제 폐하께서 다 해결해 주신다면 물론 환영이다.
“저는 꼭 두 분을 함께 모셔놓고 ‘부부답게’ 단장해 드려보고 싶었습니다!”
가넷의 욕망도 그럴 만했다.
가넷은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만큼, 전문가로서의 욕심도 꽤 있는 편이었다.
굳이 화려하게 꾸밀 필요가 없는 때에도 리시스를 붙잡고 어떻게든 뭐 하나라도 더 달아주려 했다.
전투 훈련을 하고 돌아와 거지꼴이 된 리시스를 보고 가장 서러워하던 것 역시 가넷이었다.
리시스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쁜 피사체를 보면 더 예쁘게 꾸미고 싶은 욕망이 물씬 드는 모양이다.
“예쁘신 분 옆에 잘생기신 분이 계시면 예쁨과 잘생김이 곱하기가 되죠. 흐흐흐!”
축제는 황실이 돋보여야 한다는 의무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넷의 욕망은 지당했으며, 적극적으로 지지할 만한 일이었다.
리시스는 가넷의 환호도 납득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허멀 후작이었다.
“……허멀 후작은 왜?”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면 제가 할 일이 줄어들 테니까요.”
“……아.”
가장 이해가 되는 사유였다.
일을 덜 할 수 있는 것만큼 강력한 이유는 없다.
세 사람의 환호사를 차근차근 들은 키에르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했다.
“이번 축제의 목표는 ‘이 황후가 내 황후다.’를 대대적으로 알리는 것이다.”
“예?”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여름 축제가 그렇게 변질됐어요?
키에르트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리시스를 마주보았다.
“작전은 그것 아니었나?”
“……비슷하긴 한데요……, 많이 다른 느낌도 들고…….”
결국 리시스가 구상한 작전도 매한가지기는 했다.
두 사람이 축제 전면에 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냥 행진 정도만 하는 것으로는 연기라 할 수 있을 테니 되도록 많은 행사에 직접 참가하고, 아예 백성들과 어울리는 자리까지 만들 작정이었다.
일전에 키에르트와 함께 시장을 돌았던 기억 덕분에 떠올릴 수 있는 작전이었다.
‘재밌었지.’
낯설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런 선물을 왕창 안겨준 것도 처음이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포근해졌다.
그 선물들은 아직도 황후궁의 방 하나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키에르트가 보내준 선물들은 꼭 연애를 한다면 연인에게 받을 것 같은 느낌의 물건들이었다.
“아! 생각이 났는데요.”
그때 리시스의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스쳤다.
모두가 리시스에게 집중했다.
“여름 축제에 이야기를 추가하면 어떨까요?”
“어떤……?”
일하기 싫다던 허멀 후작이 가장 먼저 흥미를 보였다.
일은 하기 싫지만 재미있는 것은 못 참았다.
“여름 축제 자체가 에드린과 쉬란이 싸웠는데 날씨 덕분에 쉬란이 승리했다, 라는 이야기가 깔려 있잖아요. 거기에 황제 폐하와 저의 ‘연애’를 넣는 거죠.”
“오호…….”
허멀 후작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일단 사람들은 남의 연애사에 가장 먼저 흥미를 가지지요.”
“그렇네요. 부부보다는 연애.”
부부는 관계에 완결이 난 느낌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것도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를 먼저 본 소설처럼 과정에 흥미를 덜 가진다.
하지만 부부도 연애는 할 수 있다.
선결혼 후연애!
먼저 결혼을 했으니 발생할 수 있는 상황도 있다.
사람들은 이들의 연애사에 흥미를 보일 것이고, 흥미만큼 널리널리 퍼져나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되면 리시스와 키에르트가 원하는 것이 모두 완성된다.
알헨크가 노린 것은 두 사람의 분열. 더 나아가서는 에드린과의 결속 약화다.
에드린이야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두 사람의 분열만큼은 이 작전으로 확실히 막을 수 있다.
“적극 찬성한다.”
키에르트는 비장하게 환영했다.
감히 자신의 아내를 넘보는 헛소리를 잠재우는 것이 키에르트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그럼 뭐부터 시작하면 되지? 연애부터 하면 되나?”
“예?”
“?”
키에르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멍한 눈이 되었다.
“아니……, 연애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서, 그걸 축제의 뼈대로 쓰고……, 그러는 겁니다만……. 제가 맞습니까, 황후 폐하?”
“어어, 맞아, 허멀 후작.”
굳이 황제 폐하가 진짜 연애를 해서 뭐 하시게요?
어차피 사람들 앞에 대놓고 광고를 하지 않는 이상 알려지지도 못할 텐데.
“……흠, 흠.”
그제야 키에르트는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살짝 기대도 하고 있었다.
손잡고, 키스하고, 데이트하고, 잠자리까지 가졌지만 모자랐다.
그게 바로 연애라는 생각까지 닿자 자신도 모르게 달려가 버린 것이다.
리시스는 꿈도 꾸지 않는 표정이었다.
연애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키에르트는 다소 실망했지만 굳이 얼굴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리시스가 원하는 것을 맞춰주는 것이 먼저였다.
“그럼 나는 뭘 하면 되지?”
리시스가 허락한 만큼만 하겠다.
키에르트의 물음에 넷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시작했다.
축제에 대한 열의가 넘쳐나는 사람들이 모이니 아이디어는 펑펑 쏟아졌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를 골라낸 리시스가 키에르트에게 선물 주듯 임무를 넘겼다.
“폐하께서는 제게 프러포즈를 해 주시면 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