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그 결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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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그 결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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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그 결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2022.07.28.
“아직 확실한 건 없어.”
키에르트가 내뱉듯 대답했다.
어느 쪽이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만큼 최악인 건 맞았다.
“네,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먼저 나서서 뭘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까지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무리 완벽하게 꿰뚫어봤다 자신해도 예기치 못한 곳에서 꼭 빈틈이 생기고는 했다.
일단 작전을 개시하면 신속해야 하지만 개시 직전까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맹수와의 기싸움과 마찬가지였다.
먼저 움직이는 건, 먼저 틈을 보이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니.”
키에르트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리시스와의 전투에서 그런 식으로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리시스만 아니었다면 키에르트도 어디 가서 져 본 적 없는 명장이었다.
지금 그를 초조하게 만드는 건 전략적인 접근이 마음과 맞지 않아서였다.
이전엔 일을 할 때 마음이 끼어드는 일이 없었다.
지금은 마음으로 꽉 차서 이성이 움직일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
“…….”
키에르트의 이에서 으득, 소리가 났다.
지금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안다. ……하지만.
잠시만 이성의 끈을 놓아도 감정이 울컥 쏟아졌다.
“……확…….”
신하들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키에르트의 분노는 신하들을 모은 대회의가 열릴 때까지도 잦아들지 않았다.
로구안의 동태가 심상치 않고, 에드린과의 관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있으니 회의를 열어야 했다.
사실상 전쟁준비는 시작되었고, 쉬란이 나아갈 노선도 확고했다.
이제는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문제만 남았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좀처럼 이성적이지 못했다.
“오늘은 노래까지 추가됐다더군?”
“……황송하옵니다…….”
저잣거리에 노래가 돌았다.
황후마마는 남자가 둘이라 다리가 네 쪽이 날 지경이네, 뭐 이런 저속한 가사가 붙은 노래였다.
보고를 듣자마자 키에르트는 문짝 두 개를 해먹었다.
그러고도 회의에 앉아 자신의 이도 두 개 더 해먹을 것처럼 이를 갈았다.
“상대를 동요시키기 위해서는 유치한 수가 최고니까요…….”
옆에 앉은 리시스가 조그만 목소리로 키에르트를 진정시키기 위해 상황을 설명했다.
키에르트도 알았다.
다만 머리가 이해한 것을 감정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었다.
“……후.”
키에르트는 눈을 감고 숨을 가라앉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신하들의 가슴이 다시금 벌렁벌렁 뛰었다.
화도 안 내던 사람이 내면 무섭다더니.
평소 감정을 보이지 않던 키에르트가 화를 내니 정말로 무서웠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실제로 어떻게 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의 분노였다.
평소에는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차가운 황제 폐하가 저렇게 끓을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서웠다.
끓는 사람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우선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것이었다.
신하 하나가 과감히 용기를 냈다.
“감히 쉬란의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저잣거리의 더러운 입소문의 주인공으로 만들다니……,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시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장 전쟁을 선포하는 건 어떤가.”
“예?”
신하가 조아렸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돌아올 황제 폐하의 대답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상하던 답이 아니었다.
이런 건 서로서로 돌아올 답을 예상하고 적당히, 적당히…….
……그러나 키에르트에게 적당히는 없었다.
“감히 내 황후를, 내 아내를 건드려?”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아, 그쪽이었나.’
방향의 문제였다.
쉬란의 체면과 위상에 도전한다는 것도 키에르트를 들쑤신 요인 중 하나이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는 ‘내 아내’를 감히 건드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키에르트의 말에 유난히 ‘내’가 많이 포함된 것도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위로해!’
황후와 쉬란의 국격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지만 남의 부부사정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가는 괜한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신하들은 도움을 청하듯 리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회의에 황후까지 동석한다는 말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던 그들이다.
최근 황후 폐하의 행보가 화려하다는 것, 키에르트와의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의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까지 황후를 배석할 필요가 있나 했는데, ……있었다. 그 필요. 몹시도 필요했다.
아니, 이 자리에서 가장 간절한 사람이었다.
‘살려주십시오! 황후 폐하!’
신하들의 눈빛이 리시스를 향해 모였다.
리시스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에 말을 아끼던 차였다.
그러나 이렇게들 원한다면, 나서 드려야지.
리시스는 멍석이 깔리면 마다하지 않았다.
기회는 있을 때 잡아야 하는 법.
필요하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를 수 있다.
지금은 명석한 두뇌와 냉정한 판단력, 키에르트 조련술을 뽐낼 때였고.
“폐하. 섣부른 선공은 상대의 전력 파악을 하기에도 어렵고, 명분을 주게 될 수도 있어요.”
신하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이성을 탑재하고 있는 리시스가 나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껄끄러워하던 사람들도 리시스의 철저한 이성에 감사했다.
황제 폐하도 한 이성, 한 철저하신 분이지만 오늘 회의만큼은 도통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계셨다.
문자 그대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세상 그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빼앗아가겠다고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도 모자라, ‘사실 나랑 사랑하고 있었다!’고 헛소문까지 퍼뜨리는데 웃으며 태연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이성을 차리고 있는 것도 리시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키에르트가 깍듯이 예의를 차려 돌아버린 덕분에 리시스가 회의에서 이성을 담당해 나설 차례가 생겼다.
“쉬란이 받은 모욕은 승리로 갚아줄 수 있어요. 원래 이긴 사람 말이 다 맞는 거잖아요.”
“그때까지 끓어버린 내 마음에 대한 보상까지 생각하면 어느 쪽이 이득일까?”
“……아. 그건 계산을 좀 해 봐야겠는데요.”
리시스는 간과하고 있던 부분을 지적받자 그때부터 바로 심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신하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황후 폐하도 침착하게 뵈는 게 없으시구나.’
어쩜 저렇게 부부가 쿵짝이 잘 맞나 모르겠다.
하지만 리시스가 소문의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맞았다.
신하들은 그래도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다.
“폐하의 심리적인 부분까지 고려한다면, 지금 당장 로구안 쳐부수러 가야죠!”
……와장창.
신하들이 쥐고 있던 믿음의 끈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리시스의 동의에 키에르트는 반색했다.
역시 내 아내였다. 자신과 의견마저 같을 거라 믿었다.
“그렇지?”
“폐하의 마음은 제게 있어 쉬란보다 소중하니까요. 망할 때 망해도 폐하의 마음은 편하셔야죠!”
리시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응? ……망해?”
거기서 망한다는 말이 왜 나오지?
키에르트는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리시스는 애석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제 계산상으로는,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선공을 해도 완벽한 승리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까딱하면 황도가 역습당해 망할 수도 있다고 봐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명석함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러나 지금 리시스의 발언에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리시스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을 것이다.
“황후. 쉬란은 강하다.”
키에르트는 가슴털을 부풀리는 수컷처럼 가슴을 폈다.
그 말에는 모두가 가슴을 부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쉬란 제국.
대륙에 제국은 하나뿐이다.
그 말은 대륙 어디에도 쉬란만큼 거대한 국가가 없음을 뜻했고, 그만한 국력과 군사력을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제국의 황후를 위해 검을 들 군사는 많아. 그대가 지금까지 본 것의 몇십 배, 몇백 배는 될 만큼.”
쉬란의 군대는 친위대와 황실군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드넓은 쉬란의 영토 곳곳에 살고 있는 귀족들의 사병, 민병까지 모으면 대륙 최대 규모의 군사력이 완성된다.
물론 이 군사력을 외부에 제대로 선보인 적은 없었다.
그럴 만한 외부적 위기가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원한다면, 황후를 위해서라면, 그들 모두가 검을 들 것이다.
“그래도 승패가 모호한 전투에 그 병력을 몰아넣고 싶지 않아요.”
리시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못 믿는 건 아니지?”
“제가 딴 건 못 믿어도 폐하의 재력과 군사력만큼은 철저하게 믿어요.”
세상 모든 것은 의심하고 봐야 한다지만 그것만큼은 믿어야 했다.
쉬란의 재력, 쉬란의 군사력은 세상 최대의 보증수표였다.
그리고 리시스 역시 직접 겪어본 바가 없지는 않아 더욱 신용할 수 있었다.
두 나라의 국경 전투는 필사적이지 않은 국지전이었다.
만약 양쪽 나라가 어느 한 나라를 잡아먹으려고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다면 리시스의 작전이고 뭐고 짜부라들었을 것이다.
키에르트가 병력을 아끼느라 최소한의 병력만 투입해서, 그리고 나중엔 리시스의 작전에 호기심을 보여 직접 전투에 끼어들다가 된통 당했던 것이다.
지형의 문제도 있어서 머릿수 싸움으로 몰고 가기 어려웠던 점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시스는 운이 좋았다.
알헨크는 운이 없을 예정이고.
“하지만 폐하도 아시겠지만……, 저는 기왕 이기는 거, 완벽하고 깔끔하게 이기는 걸 좋아해요.”
“……그랬지.”
당해 본 사람이 인정했다.
리시스가 직접 지휘한 전투는 거의 압승이었다.
전투를 할 때마다 거의 모든 병사가 포로로 잡혀서 뜯긴 인질교환비가 얼마였던가.
“그러려면 좀 기다려야 해요. 기다려 주실 거죠?”
“…….”
키에르트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리시스가 원한다니 거부하지도 못했다.
팔다리를 모두 꼬고 앉은 자세가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결혼식을 그따위로 해 버린 것이 후회되는군. 온 세상에 공표해 그대를 모르는 이가 없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 결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아무도 몰랐다.
당사자들도 몰랐는데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어차피 깨질 결혼이니 대충 구색만 맞추면 된다고 양쪽이 합의하고 진행했던 결혼이다.
쉬란의 국민들이 ‘황제 폐하께서 결혼을 하셨던가……?’ 하고 긴가민가할 만큼 존재감 없는 황후였어야 했다.
지금은 쉬란의 국민들의 기억에는 흐릿해도 키에르트의 마음에는 그 무엇보다 강하게 자리 잡은 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 그런데 소문을 잠재울 방법은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리시스가 손을 들었다.
주목을 받은 리시스가 씩 웃었다.
이건 자신 있게 확실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