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처음 받아 본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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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처음 받아 본 위로
2022.07.24.
“폐하, 진정해 보세요.”
“진정해야지. 진정하고 있어. 진정하긴 했는데……! 그 자식이!”
키에르트는 전혀 진정하지 못했다.
겨우 머리의 비눗물만 빼고 황후궁 응접실에 앉은 키에르트는 세 마디 말을 넘기지 못하고 벌떡벌떡 일어났다.
리시스도 소문을 듣자마자 황당해서 키에르트가 이 소문을 듣고 어떨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소유욕이 남다른 키에르트가 눈이 뒤집어져 길길이 날뛰는 것은 자연의 이치처럼 당연했다.
차라리 알헨크가 리시스를 차지하겠다 선언한 것이었으면 좀 나았을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기정사실인 양 퍼뜨린 데다, 리시스와 알헨크가 진짜 연인 사이처럼 믿는 분위기까지 은근슬쩍 잡혀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그따위 놈을 감히 내 황후와 엮을 수 있지?!”
“저도 잘 모르고 그놈은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 있죠…….”
평민에게 황후란 소설 속 인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살면서 직접 만날 일도 없겠다, 뭐 하고 사는지 알 방법도 없겠다. 하지만 이름만큼은 유명하니 제멋대로 꾸며대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사실만을 얘기하는 리시스 덕에 키에르트의 머리에도 약간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대는 괜찮나?”
이 소문에서 키에르트의 역할은 아주 미약했다.
둘 사이를 모르는, 정치적인 관계만 맺는 ‘그냥’ 남편에 불과했다.
그게 더 키에르트를 열 받게 했지만, 불륜과 양다리에 두루두루 걸쳐져 있는 리시스에 비할 일은 아니었다.
“네, 헛소문이야 늘 달고 살아 왔어서.”
키에르트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알아서 떠받들어 모신다.
장난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신보다는 높지만, 높은 사람 중에서는 가장 약한 존재’였다.
리시스는 맞춤형 먹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비 전하를 암살하려다 걸려서 쫓겨온 거다, 공주 방문을 드나드는 남자가 너무 많아 문지방이 내려앉았다, 살인광이어서 전쟁터로 쫓겨났다, 별 얘기 다 있었죠.”
“……뭐?”
키에르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자신의 이야기였더라면 사실여부를 따지고 범인을 찾아내 처벌하는 조치를 먼저 내렸겠지만 리시스의 이야기가 되니 감정이 먼저 폭발했다.
“감히, 어떻게, 그대에게! 실제로 그대를 보면 그딴 말은 할 수 없을 텐데!”
“그러니까요. 실제로 볼 일도 없는 사람들이니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만나고 당황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키에르트도 그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뱀처럼 차가운 냉혹한 살인마를 생각했는데 햇살처럼 보드랍고 귀여운 병아리가 뿅 튀어나와 어지간히 당황했다.
지내면서 알게 된 리시스의 이런저런 면모는 그런 혹독한 헛소문에 시달려서는 안 될 만큼 매력적이었고.
“…….”
키에르트는 끓어오르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리시스는 이미 다 지난 일이라며 남의 얘기처럼 하지만 키에르트는 지금 처음 들었다.
‘확 다 엎어버리고 싶다.’
그렇게 해서 과거가 사라진다면 당장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어 없애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리시스는 화를 삭이는 키에르트의 눈치를 보며 웃었다.
자신 때문에 화를 내 주는 건 고맙지만, 키에르트가 화를 내는 건 싫었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고. 그때는?”
“예?”
키에르트는 미간을 누르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리시스를 쳐다보았다.
“그때도 괜찮았나?”
“……아…….”
리시스의 미소가 흔들렸다.
당연히 괜찮지 않았다.
어리기도 엄청 어리던 나이였다.
자신이 한 일이 퍼져서 욕을 먹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인데, 하지도 않은 일로 욕을 먹고 오해를 샀다.
해명할 수도 없는 오해를 뒤집어 쓴 채로 살아가야 했다.
그냥 버텼다.
무작정 버티고 살아남는 수밖에 없었다.
그땐 참 힘들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안……, 괜찮았죠. 그때는.”
그치만 지금은 괜찮으니까.
웃어야 괜찮은 거다.
리시스는 억지로라도 웃으려 했다. 그러면 괜찮아질 테니까.
그러나 억지웃음이 나오기 전, 리시스의 몸이 확 끌어당겨졌다.
“!”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리시스의 가벼운 몸은 달랑 들려져 키에르트의 무릎에 앉혀졌다.
그 상태로도 가슴에 얼굴이 푹 묻혔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표정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리시스는 떨리는 입가를 내버려두었다.
키에르트가 떨림을 막아주기라도 하듯 리시스의 몸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그의 팔도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목이 멘 것도 같았다.
“어떻게 하면 그대가 괜찮아질까.”
“지금은 괜찮다니까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프면서.
그치만 지금은 당장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 않으니 괜찮은 거다.
“헛소문 퍼뜨린 인간들을 모조리 색출해 내서 목을 잘라 줄까.”
“……하하.”
“그대가 괜찮아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렇게 안고 토닥여주면 될까.”
“……그게 낫네요.”
리시스는 웃으며 웅얼웅얼 대답했다.
화풀이를 해봤자 상처받은 마음이 아물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로는 상처를 치료해 준다.
키에르트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리시스의 등을 쓸어내렸다.
따뜻했다.
리시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누군가에게서 제대로 된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는 걸.
목이 꽉 조여드는 것처럼 울대가 아팠다.
숨을 넘겼는데 울컥 솟은 무언가가 불덩이처럼 쑥 내려갔다.
리시스는 입술을 꽉 물고 키에르트의 가운을 움켜쥐었다.
“……감히.”
리시스는 위로해주고 있지만 자신의 분은 삭여지지 않았나 보다.
키에르트는 가끔 한 번씩 씨근덕대며 중얼거렸다.
눈가가 시큰하게 뜨거워졌다.
적국의 황제가 자신의 과거를 가장 크게 위로해주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가슴의 시린 바람이 멎을 때까지 리시스는 한참 키에르트의 품에 신세를 졌다.
나중에, 두 사람이 어떤 관계가 되어 있어도 이 먹먹함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먼 훗날, 키에르트가 곁에 없어 리시스 혼자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에도 이 순간을 기억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이제 괜찮아요.”
마음을 진정시킨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키에르트는 품 안에 안고 달리던 계란을 들여다보듯 조심스럽게 팔을 느슨하게 하며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붉어졌을 눈가가 부끄러워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턱을 밀었다.
“그만 보세요.”
“진짜 괜찮은지 확인해야지.”
키에르트의 위로 덕분에 정말로 괜찮아졌다.
그리고 알헨크와 얽힌 이번 헛소문은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황당해서 그랬지 마음에 타격은 없었다.
“진짜 괜찮아요. 그러는 폐하는요?”
“안 괜찮아.”
“…….”
이번엔 반대로 안아드려야 하나…….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키에르트는 팔을 느슨하게는 했지만 리시스의 몸을 완전히 놓아주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여전히 키에르트의 무릎에 앉은 채였다.
“폐하도 괜찮아지세요.”
리시스는 두 팔을 뻗어 키에르트의 목을 먼저 끌어안았다.
키에르트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리시스의 팔에 안겨주었다.
“……안 괜찮아지는데.”
“……모자라요?”
“그런 것 같군.”
“으음.”
리시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키에르트의 뒷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 들었다. 하지만 부드러웠다. 만지는 리시스가 오히려 더 좋은 건지도 모를 정도였다.
키에르트는 잠자코 머리카락을 내주었다.
“모자라.”
리시스는 킥 웃었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목소리에서 벌써 티가 났다.
노기는 진즉 가셨고, 지금은 기회를 잡은 거다.
리시스는 두 손을 풀고 맞은편 자리로 싹 도망가 버렸다.
얼마나 빨랐는지 키에르트가 다시 잡을 틈도 없었다.
“모자라다니까?”
“거짓말 한 괘씸죄예요.”
“…….”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공격력은 없었다.
리시스는 까딱도 하지 않고 되레 까르르 웃었다.
“웃을 정도로 괜찮은 건 너무하는군.”
키에르트가 볼멘소리를 했다.
“으음……, 사실 이번 소문은 의도가 너무 분명히 보여서요.”
“……그렇긴 하지.”
키에르트는 내용 자체에 울컥해서 흥분했던 것이지만, 소문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훤히 보이는 도발이었다.
리시스는 냉정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며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그러모았다.
“우선 알헨크 놈이 벌인 수작인 건 확실할 테고요.”
“음.”
“그런데 그 소문이 너무 순식간에 싹 퍼졌잖아요?”
소문이야 원래 발보다 빠르다지만 이번 소문은 지나치게 빨랐다.
이미 소문이 날 만큼 나서 진화할 수도 없을 정도로 퍼져버렸다는 건 인위적으로 퍼뜨리는 공작이 있다는 소리다.
“그것도 사실 뻔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 이름을 당장 입에 담기에는 증거가 없었다.
리시스와 키에르트의 눈이 마주쳤다.
“세니아 양.”
“렌데일 공작가 전부일 수도 있지.”
역시 그쪽이 가장 의심이 갔다.
하지만 의문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걸 세니아 쪽이 예상하지 못했을 리도 없을 텐데요.”
둘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세니아 쪽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몰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헨크와 손을 잡고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키에르트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반역.”
리시스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반역.
전쟁만큼이나 무거운 단어였다.
쉬란은 역사가 깊은 나라다.
한 황실이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다는 것은 그만큼 황제를 떠받들고 있는 지지층의 충성도 깊다는 의미다.
렌데일 공작가는 황실을 떠받치는 굵은 기둥 중 하나였다.
“그 오랜 역사를 충신으로 지내왔는데, 갑자기 반역자의 길을 택한다고요?”
리시스도 이제 쉬란의 가문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고, 어떤 세력으로 나뉘는지 파악을 마친 상태였다.
정황상 가장 의심이 되지만 가장 부정하고 싶은 의심이었다.
이번엔 키에르트가 오히려 리시스보다 냉정하게 사태를 내다보았다.
“충견도 제 배가 고프면 주인을 물 수 있지.”
리시스와의 정략결혼, 세니아와의 관계 악화.
황후의 자리가 영영 멀어졌다고 판단했다면 극단의 선택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는.”
리시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한숨처럼 또 다른 가정을 꺼냈다.
목에서 단어가 깔깔하게 걸려 튀어나오지 않으려 버텼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의 감상보다는 이 사태에 대한 대책회의가 먼저다.
리시스는 어렵사리 입을 움직였다.
“에드린에서 이혼을 요청할 경우, 판 흔들기를 쉽게 하기 위해 깔아 놓은 것일 수도 있겠고요.”
이혼.
둘 사이에는 언제 오가도 이상하지 않을 말이었다.
처음부터 이 정략결혼은 영원할 수 없을 것이라 두 사람 모두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입에서 나온 이혼이란 단어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