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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거친 관심과 시선 (100/153)


100. 거친 관심과 시선
2022.07.17.



‘설마……!’

눈만 커진 것이 아니다. 심장소리도 커졌다.

설마 병사들 앞에서……?

리시스의 설마는 적중했다.

결국 단추를 다 풀어내린 키에르트는 셔츠를 훌렁 벗어던졌다.


“헉…….”

 

 
리시스는 신음을 삼키지도 못했다.

키에르트의 벗은 몸이야 이제 익숙했다.

빤히 쳐다볼 수도 있고, 감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해 쨍쨍 뜬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훌렁 벗는 모습까지 익숙해지진 않았다.

놀란 리시스의 시선이 키에르트에게 못 박혔다.

키에르트는 흡족했다.

리시스가 내민 제안도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자신의 탐욕은 더했다.


“벗은 김에 같이 좀 뛸까.”

키에르트는 훌쩍 연병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아무리 훈련에 내내 참관하고 있었다지만 황제 폐하가 지척으로 다가오는 것은 병사들에게 압박감을 주었다.


“허, 헛……, 황제 폐하…….”

“나는 신경쓰지 말고 훈련을 진행해.”

“하, 하오나…….”

황금 같은 우리 황제 폐하의 옥체에 실금이라도 가면 큰일이다.

훈련은 거칠었다.

체력훈련이더라도 자잘한 상처가 날 수 있었다.

혼자서 하는 것 외에도 둘이 짝을 지어 하는 훈련도 있고, 여럿이 뭉쳐 함께하는 훈련도 있었다.

혼자서 하는 것이야 황제 폐하 혼자 알아서 하시라고 내버려두면 되지만 여럿이 할 때가 문제였다.


“전쟁터에도 이렇게 나를 신경쓰며 싸울 텐가. 나도 내 몸 하나 지키기 위해 하는 훈련이니 다들 집중.”

“집중!”

키에르트의 명분은 꽤나 그럴싸했다.

황후 폐하의 시선을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난 황제 폐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진지하게 훈련에 매진했다.


“……폐하도, 참.”

아마 모르는 사람이 유일하게 있다면, 리시스 정도……?

리시스는 병사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뛰는 키에르트를 보며 두 뺨을 감쌌다.

내 남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렇게 거칠게 훈련하는 병사들 틈에서도 키에르트는 유독 눈에 띄었다.

흘러내린 땀에 햇빛이 반사되며 반짝였다.

키에르트는 옷을 입으나 벗으나 매한가지로 반짝거렸다.


“어쩜 사람이 저렇게 햇살처럼 반짝거리지?”

어둠속에 혼자 두어도 반짝거리며 자체적으로 빛을 발할 사람이었다.

내 남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그만큼 빛이 나서 든 생각이었다.


“제롬, 저거 봐. 폐하는 책상에서도 오래 앉아 일하시잖아. 그런데 어떻게 승모근이 저렇게 유연하게 발달하셨지?”

“……아……, 그렇습니까? 제가 근육은 잘 몰라서…….”

“몰라도 딱 보면 보이지 않아? 폐하의 근육은 정말 질 좋은 근육이야. 단단하고 섬세하게 갈라졌는데 유연하고 탄성도 있잖아.”

“……그렇군요…….”

제롬에게 황제 폐하의 몸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늘 보고, 늘 관리해 드리는 것인데 새삼 감탄할 것이 뭐 있겠는가.

하지만 황후 폐하의 말에 심드렁하게 반응할 수도 없어 최대한의 인내력을 끌어와 대답했다.

그래도 성의가 실리지는 않았다.

리시스도 제롬의 무성의한 대답은 귀에 스치지도 않는 모양이라 어차피 상관없었다.


“폐하는 땀방울도 다른 사람과 성분이 다른가 봐.”

“그럴 리가요.”

“아냐,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은 시큼한 냄새가 나잖아? 폐하는 강아지 발바닥 냄새처럼 콤콤한 것이, 막 코 파묻고 맡고 싶어져.”

잠자리 후에 가볍게 땀이 난 가슴에 코를 묻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좋았다.

몸을 섞고 난 후 심리적 효과인가 했는데 키에르트의 땀이 비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걸 보라. 몸에서 광채가 난다.

제롬은 리시스를 바라보며 슬며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부는 닮아간다더니, 주접도 닮아가시는 모양이다.


‘축하드립니다.’

꼭 닮은 두 분이 만나셔서.

처음에는 의심도 하고 경계도 했지만 제롬은 이제 두 사람을 적극 응원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 서로에 대한 주접을 누가 감당해 줄 것인가.

제롬의 시선은 저 먼 하늘 너머 어딘가, 모시는 분들이 주접을 떨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향했다.

덧붙여 제롬은 홀몸이었다.

***

리시스의 시선을 단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빼앗기지 않은 채 체력훈련은 종료되었다.

키에르트의 노력은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체력훈련 종료!”

키에르트는 뿌듯하게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훈련으로 바삐 움직이면서도 리시스의 시선을 내내 느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키에르트가 돌아보자 리시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지금까지 몸에 구멍이 날 정도로 빤히 쳐다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리시스는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키에르트는 단상 위로 훌쩍 뛰어올라 리시스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약속.”

“네?”

“약속 지켜야지.”

키에르트에게만 시선과 관심을 고정하지 못하는 대가로 안아주고, 손잡아 주기로 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저, 폐하밖에 안 봤는데요.”

정말이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봤다.

그 때문에 눈이 다 뻑뻑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키에르트가 생동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눈에 힘을 주고 버티다보니 그리 되었다.

키에르트는 다 안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러나 벌린 팔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건 그거고, 약속은 약속이지.”

키에르트는 안아주기 전까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 밤새 안는 것보다 더한 것도 했는데 안는 것 정도야 못 할 건 없다.

……지켜보는 저 많은 눈만 없으면.

이제는 스스로도 깜빡깜빡 잊을 때가 많은데, 리시스는 전선에서 렉싱턴 장군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남자는 쳐다도 보지 말라는 말을 귀에 박히게 듣고 자랐다.

남편이니 뭐 어때, 로 퉁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밤에 벗고 뒹구는 것은 가능. 부부니까.

남이 없는 곳에서 키스하는 것. 가능.

남이 있는 곳에서 볼 같은 곳에 가볍게 키스하는 것. ……부끄럽지만 할 수는 있음.

남이 훤히 보는 곳에서, 주목을 받으며, ‘반라의 남편과’ 포옹하는 것.

……아, 이것까지 해야 하나?


“그럼 옷이라도 입으세요…….”

“더운데?”

키에르트는 보란 듯 땀을 훔쳐내며 능글맞게 웃었다.

훈련하는 내내 그렇게 쳐다봐 놓고는.

멀리서 보니 좋고, 가까이서 보니 너무 심하게 좋아 그런다는 걸 알고 있는 키에르트는 물러나지 않았다.


“아이, 정말…….”

결국 진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품에 안겼다.

품에 안겨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니 부끄러움이 오히려 덜해졌다.

오히려 마음껏 키에르트의 땀 냄새를 즐겼다.

져도 진 것이 아니었다.


‘키에르트의 땀 냄새가 강아지 발바닥 냄새 같다고 했던 게 어디의 누구시더라?’

리시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보는 눈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제롬은 옆에서 세모꼴 눈을 하고 두 분의 염장질을 관람했다.


“자, 빨리 옷 입고 앉으세요.”

리시스는 먼저 정신을 차리고 키에르트를 밀었다.

키에르트는 안 떨어지려고 팔에 힘을 주었다.


“빨리요.”

리시스는 재촉하며 키에르트의 등을 소리나게 찰싹 때렸다.

땀까지 나서 찰싹 소리가 유난히 차지게 울렸다.

키에르트는 맞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떨어져나갔다.

제롬은 황제 폐하가 맞는 걸 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젠 제가 내려갈 차례니까 폐하는 앉아서 쉬면서 보고 계세요.”

체력훈련 종료 후 늘 하던, 명령에 따라 재빨리 움직이는 훈련을 시작할 차례였다.

이제는 리시스가 연병장으로 나설 차례였다.

그러나 키에르트가 고개를 저으며 리시스의 앞을 막았다.


“아니야, 내가 훈련하면서 생각해 봤는데.”

“……? 네.”

“그대가 훈련법을 알려줘야 하니 동참하는 것이 맞긴 한데, 나도 지휘법과 통제훈련을 받아야 그대와 교대할 수 있지 않겠나?”

에드린의 군대는 사실 이런 정예군도 아니었다.

리시스와 뜻이 맞는 몇몇 병사들이 어중이떠중이 모여 구성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러다 그 작은 특수부대에서 성과가 이어지자 점점 실력 있는 인원이 편입되어 단단해져갔다.

그 과정이 길어지다 보니 나중에 다른 지휘관이 끼어드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키에르트의 말대로 교대할 수 있는 지휘관이 여럿 있다면 전선에서도 훨씬 유동적인 전략을 구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네요. 좋아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의견에 적극 동의하며 지휘봉을 넘겼다.


“하지만 이건 체력훈련과 달라서 폐하께도 좀 거친 훈련을 요구할 수도 있는데요…….”

“얼마든지 환영이야. 다른 놈들에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해 줘.”

“그럴게요.”

리시스는 굳은 결심으로 눈빛을 빛냈다.

땀에 젖은 키에르트의 모습에 정신을 판 것도 잠깐이었다.

실전 같은 훈련 앞에서는 그런 여유를 챙길 새도 없었다.

실전에 임하는 것처럼 마음을 먹은 리시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키에르트도 웃음을 지웠다.

리시스의 시선을 계속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실전에서의 유용성을 계산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훈련 시작하겠습니다.”

리시스가 숙련된 조교의 말투로 단상 위에 섰다.


“폐하, 군집의 좌상단에서 전체 균형을 봐주세요. 우로 이동하면서 중앙을 통제하셔야죠. 아니, 아니, 아니. 다시!”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가자 리시스는 남편한테도 가차 없었다.

키에르트가 원하던 관심과 시선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뜨겁게 퍼부어 주었다.

그리고 리시스가 퍼부어준 관심의 표현은 몹시 거칠었다.

***



“허억……, 허억.”

땀으로 반짝거리던 키에르트는 아름다웠으나 흙먼지를 뒤집어 쓴 키에르트는 그냥 더러웠다.

훈련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키에르트가 더럽게 구르고 있다는 것마저 잊어버렸다.

리시스는 정말 공정하게 키에르트마저 험하게 굴렸다.

훈련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는 했다.

키에르트가 ‘똑같이’ 취급해달라 말한 덕분에 ‘그래도 황제 폐하인데…….’, ‘그래도 남편인데…….’라는 망설임을 걷어버리고 굴려서 이렇게 되었다.


“오늘 훈련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휴식을 취했다가, 새벽부터 아예 노지 훈련을 가는 게 어떨까 싶어요.”

리시스는 자신이 일구어놓은 훈련의 결과물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땀과 흙에 더러워진 남자들!

저 훌륭한 훈련의 결과!

새파란 안광에서 이글이글 불타는 투지야말로 돈 주고도 못 사는 것이다.


“노지……, 훈련 말입니까…….”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으르렁댔다.

그러나 조련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응. 연병장은 한계가 있어서. 실전 환경에 대한 대비도 해야지. 아, 군장 교육도 해야겠네, 그럼.”

리시스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상큼했다.

오히려 진짜 소풍을 가는 것보다 더 생기발랄해 보였다.

키에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곱게 드레스 갖춰 입고 소풍 가는 예쁜 황후로 살았으면 했는데.

본인이 저런 것을 더 좋아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후가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고 해야지.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앞을 가로막는 못난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내 군장 교육 정도는 따로 해 줄 수 있겠지, 황후?”

하지만 그래도 챙길 건 챙겨야지.

괜히 남편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들보다 하나는 더 받아야 성에 찼다.

훈련을 받을 때에도 팔굽혀펴기 한 번이라도 더 시켜줘야 뿌듯한 것처럼.

……이건 좀 키에르트의 기준이 일그러진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키에르트 본인의 기준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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