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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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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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
2022.07.10.
결국 누가 이기고 말고를 떠나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채 체력이 고갈되었다.
힘을 쪽 뺀 두 사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침대에 완전히 늘어져 버렸다.
리시스는 천장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좋은 것만 했어요.”
“……다행이군.”
“폐하는요?”
“나도 좋은 것만 했지.”
키에르트도 마주 웃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만족스러운데 어느 한 사람 착취당하지 않고 두 사람 다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있다니.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였다.
세상은 언제나 모자람으로 가득했다.
그러니 서로가 욕심을 내며 싸우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욕심을 낼수록 오히려 서로를 채워주었다.
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설명이 되지 않아도 결론은 하나였다.
좋았으면 됐다.
“전쟁만 없으면 평생 이렇게 살 수 있겠죠?”
리시스가 천장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중얼거렸다.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옆얼굴을 돌아보았다.
전쟁.
전쟁이 좋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 좋아서 하는 저 로구안 놈 빼고.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보고 있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둘은 같은 장소에 나란히 누워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목표점도 어쩌면 같을 수 있었다.
“하지 말까.”
키에르트가 불쑥 중얼거린 말에 리시스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럼, 얼마든지.”
키에르트도 리시스를 마주보며 웃었다.
“어떻게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
“하나만요.”
“그냥 쉬란을 가지고 싶다는 놈한테 줘 버리는 것?”
누가 리시스의 뒤통수에 소를 풀었나.
성난 물소 떼들이 뒤통수를 우두두두 밟고 지나간 것처럼 리시스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황폐해졌다.
“……예?”
리시스의 얼빠진 표정에 키에르트는 모처럼 승리의 쾌감을 맛보았다.
언제나 뒤통수를 맞는 것은 키에르트의 역할이었다. 자신이 리시스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었다는 것은 키에르트에게도 신선한 충격이 되었다.
“내가 그냥 황제 자리 던지고, 쉬란도 줘 버리면 전쟁할 일도 없지 않겠나.”
키에르트는 웃음이 솟구치려는 입가를 꾹 누르며 능청스럽게 한 술 더 떴다.
그제야 리시스도 픽 웃었다.
“황제가 아닌 폐하라니, 상상도 안 돼요.”
“왜?”
“폐하는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가 되실 분이었잖아요. 상상이 되세요?”
“해 보면 되지.”
키에르트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던진 말이었다.
리시스가 어떻게 하면 당황할까, 그것 하나만 생각하고 떠올린 것이었으니 당연히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다.
설마, 진짜, 혹여라도 키에르트가 황제가 아니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만약 본의 아니게 황제가 아니게 되는 날은 죽는 날뿐이다.
하지만 죽지 않고 그냥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가 된다면?
“내가 만약 황제가 아니었다면 그대를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겠지.”
황제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정말 아무것도 없는 평민이었다면.
아무리 리시스가 천대받는 공주라 하더라도 신분의 차는 녹록하지 않다.
황제라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리시스와 한 자리에 누워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다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랬을까요? 저는 평민들과도 잘 어울려 노는데.”
“그럼 나랑도 놀아줬을까?”
“그럼요, 제가 먼저 놀자고 했을지도 모르죠?”
“정말인가?”
“네, 놀자고 꼬셔서 특수부대로 편입…….”
“…….”
이놈의 진심이라는 녀석은 적당히 숨기고 있어도 꼭 제멋대로 튀어나와버리고는 한다.
리시스는 모르는 척 튀어나온 진심을 주워 담아 치워버리고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아무튼요. 저도 같이 평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사실 리시스의 인생은 공주로 태어났어도 평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배고픔, 추위를 평생 달고 살았고 사치는 엄두도 못 냈다.
오히려 평민보다는 거지에 가까웠나……?
리시스는 자신의 인생을 되짚어보다 울적해졌다.
이미 태어나버린 것, 출생에 불만을 가지느니 당장 살아남으려 노력하자는 편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인생이 왜 이런가.
“평민이었으면 오히려 덜 억울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떤 부분에서?”
“유부남이 여행 왔다가 시골 처녀 건드려 낳은 딸인데, 방치하고 있다가 본처와 이복형제들까지 있는 집에서 같이 키운 거잖아요.”
“…….”
키에르트는 말문이 막혀 위로조차 할 수가 없었다.
리시스는 혼자 분개해 이를 박박 갈았다.
“이게 왕이니까 다들 그러려니 넘어간 거지, 평민이었어 봐요. 마을에서 쫓겨났어요. 아니, 사회에서 매장이죠. 그 한 사람 때문에 대체 피해자가 몇이에요.”
리시스는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왕비나 늘 괴롭히던 왕자들에 대해서는 큰 감정이 없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복잡하게 얽힌 관계였다.
왕비 입장에서는 리시스가 죽이고 싶게 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죽이고 싶은 마음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리시스에게 죄는 없었다. 있다면 태어난 죄뿐이었다.
진짜 죄인은 에드린 왕뿐이었다. 외도를 한 것도, 외도해서 생긴 자식을 뻔뻔하게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게 한 것도 에드린 왕이 한 짓이었다.
정작 죄인은 당당하게 잘 사는데 그저 태어났을 뿐인 리시스는 왕비의 미움과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리시스 역시 피해자였다.
“평민이었다면 그런 미친 관계에서 좀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리시스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과거는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도 안 했었는데.”
괜히 무거워진 분위기에 리시스가 민망함을 떨쳐버리려고 억지로 웃었다.
키에르트도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엄마랑 단둘이 숲속에 살던 그때 정도면 평민으로 살아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저는.”
“그럼 그럴까?”
리시스가 원한다면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살든, 동굴에 들어가 살든, 아무래도 좋았다.
굳이 궁을 만든 것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어서였을 뿐이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제안에 리시스는 얼굴을 굳혔다.
“……폐하, 황궁 안에 숲궁, 뭐 이런 거 만드실 생각은 절대 하지 마세요.”
“뭐? 안 돼?”
이럴 줄 알았다.
이제 키에르트의 소비 패턴이 리시스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쓰고 쓰고 또 써도 새로 채워지는 양이 더 많다고는 하지만.
황실이 돈을 이런 식으로 팍팍 뿌려줘야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진다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리시스도 부자 남편 덕 좀 보자고 양심 묻어놓고 팍팍 써댔지만.
키에르트의 소비를 도저히 따라갈 수는 없었다.
리시스의 사치는 사치도 아니었다.
리시스가 사치하겠다고 금가루 뿌린 빵을 먹고 있을 때 키에르트는 금광을 사버렸다.
“안 돼요. 그럴 돈 있으면 저 주세요.”
“그러지.”
“…….”
돈을 준다는데도 왜 기쁘지만은 않을까.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무서워지는 모양이다.
“역시 폐하가 평민인 건 상상이 안 돼요.”
“돈 많은 평민이었을 수도 있지?”
“황제 같은 평민이었겠죠.”
“그래도 이름을 편히 부를 수 있는, ‘같은 평민’이지 않았을까?”
“그건……, 그랬겠죠.”
일어날 리 없는 상상이 꽤나 길어졌다.
하지만 일어날 리 없으니 마음 편히 상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재미도 있었다.
리시스는 조심스럽게 입 안에서 발음을 굴려보았다.
“폐하를……. ‘키에르트’라고 불렀겠네요.”
키에르트가 휘둥그레 얼어버린 눈으로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이러기야?”
“제가 뭘요?”
“이런 식으로 공격하고, 또 공격하는 건, 나 죽으라는 소린가?”
키에르트는 당장 죽을 것처럼 신음했다.
정말이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좋아 죽을 것 같았다.
“……기왕 죽는 거, 실컷 듣기라도 하고 죽고 싶은데.”
“이름요……?”
“그래, 이름.”
이름이 뭐라고.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걸 갖고 죽느니 뭐니.
키에르트도 가만 보면 귀여운 구석이 참 많았다.
처음에는 몸속에 피 대신 얼음이 흐르는, 감정도 없는 사람 같았는데.
점점 가까이 지낼수록 그 얼음은 자신의 마음에 붙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리시스는 완전히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그리고 숨을 한가득 들이마신 뒤, 생일 케이크의 초를 불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담아 말했다.
“키에르트.”
키에르트가 웃었다.
리시스도 마주 웃었다.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 낸 웃음이 아니었다.
키에르트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샘솟았다.
“키에르트.”
리시스가 한 번 더 말할 때마다 키에르트의 웃음이 짙어졌다.
웃음이 쌓이고 쌓여 얼굴 가득 채워져 결국 흘러내릴 때가 되었을 때, 키에르트는 웃음처럼 쏟아냈다.
“리시스.”
리시스의 이름을.
세상 그 어떤 이름보다도 환하고 즐거운 단어였다.
“키에르트.”
“리시스.”
“쿡쿡……. 키에르트.”
“리시스. 하하.”
몇 번이나 이름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목소리에도 웃음이 묻어나 결국 킥킥거리며 몸을 말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이름을 반복하다가 쪽 키스했다.
“이건 리시스.”
“키에르트.”
“내 아내. 리시스.”
쪽, 쪽, 쪽.
반복되는 키에르트의 키스에 리시스가 까르르 웃었다.
키에르트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은근슬쩍 리시스의 몸 위로 굴러 올라왔다.
그러나 다시 한 바퀴 몸이 굴렀다.
체급 차이는 있지만 리시스도 기술은 쓸 줄 알았다.
키에르트는 순순히 넘어가 주며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리시스는 황제 위에 군림하는 여신처럼 키에르트를 내려다보며 위엄 있게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가죠.”
“……응?”
왜 아름답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그대로 가지를 못해?
오늘은 정말 뒤통수에 보호대라도 착용하고 있어야 하는 날인 모양이다.
키에르트가 망연자실해 리시스를 올려다보며 항의의 눈빛을 쏘았다.
물론 리시스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만큼 놀았으니 일하러 갔을 거예요. 먹고는 살아야죠.”
“……이러기야?”
“네. 출근합시다.”
진정 피도 눈물도 얄짤 없는 것은 리시스였다.
충동적으로 많이 놀기는 했다.
어제 그대로 훈련을 중단하고 밤새 농땡이를 피웠으니 오늘은 다시 훈련을 재개하는 것이 맞았다.
황제 키에르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남편 키에르트는 그보다 조금 더 게으르고 사리분별이 안 되는 제멋대로인 인간인 모양이었다.
“싫은데.”
아주 당당하게 버텼다.
“헛소리 하지 마세요.”
그러나 리시스는 황후일 때나, 아내일 때나 똑같이 강했다.
키에르트는 찍소리도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는 이겼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