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막 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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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막 대해 주세요
2022.07.07.
분명히 리시스는 엄청나게 부끄러움을 탔었다.
몸을 섞은 그 직후에도 서로의 알몸을 차마 보지 못해 이불로 똘똘 몸을 말았다.
우연히라도 몸이 닿으면 얼굴을 붉히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리시스의 담담한 태도에 키에르트가 오히려 휘말렸다.
“……괜찮나?”
“네.”
“아니, 질문이 잘못됐군. 그대도 좋나?”
하루이틀 얼굴 본 사이도 아닌데, 키에르트도 이제 리시스에게 통달했다.
“……어…….”
과연.
정곡을 꼭 찌른 질문에 리시스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황하는 얼굴에 키에르트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꺅! 진짜 별걸 다 물어보세요!”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가슴을 퍽 쳤다.
……아주 야무진 일격이었다.
리시스의 작고 보들보들하고 앙증맞은 주먹 따위에야 아무리 맞아도 치명상일 수 없겠지만 명치를 정곡으로 맞으면 컥 소리가 나게 아팠다.
키에르트는 웃음을 싹 지운 채 진지하게 되물었다.
“이건 향후 내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하니 성실한 답변 부탁해도 되겠나.”
“아. 그런 거예요?”
“그렇지.”
둘 사이에 맺었던 첫날밤 동맹은 흐지부지되었다.
그럼에도 리시스가 싫다면 하지 말아야지.
한 번 했다고 그 다음도 무조건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물어보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말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똑바로 앉는 리시스의 각잡힌 자세에 키에르트는 영문도 모르는 채 따라 앉았다.
리시스는 보고를 올리는 장군마냥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의 향후 행동방침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시니 성실히 답변할게요.”
“……어, 음. 그래. 부탁하지.”
“좋아요.”
“……응?”
“좋은데요?”
“……어?”
키에르트는 멍한 눈으로 리시스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마주보며 똑같이 눈을 깜빡였다.
“반응이 왜 그러세요?”
“좋다고?”
“네, 기분 좋았어요.”
리시스는 여전히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키에르트는 자신이 들은 말이 여전히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만 안절부절못하며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키스도?”
“음…….”
아, 역시 그것까지는 아니구나.
키에르트는 굳이 낙담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이미 낙담하고 있었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곰곰이 고민하더니 답했다.
“좋기는 한데 막 그렇게 짜릿하게 좋은 건 아닌?”
“……응?”
이쯤 되면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 아닌가.
그 뒤에 반전이 몇 번이나 또 기다리고 있을까.
분명히 다 이긴 전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서 암습 맞고 얼얼해졌을 때 같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려 하지?
키에르트는 심각하게 자신의 상태를 고찰했다.
결론. 바보가 다 됐다.
“그대는……, 꺼리는 것 같았는데.”
분명히 그랬다.
적어도 좋아서 매달리고 싶어하는 건 아니었다.
리시스도 그 부분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해 본 건 아니라서 지금부터 그걸 시작했다.
“꺼린다기보다는 낯설어서……?”
“음.”
“그럼 자주 해서 낯설음이 사라지면 더 좋아질까?”
“……어쩌면요?”
분명히 두렵거나 싫지는 않지만 키에르트가 성큼 다가오니 왠지 내빼고 싶어졌다.
리시스는 슬쩍 엉덩이를 뒤로 밀었다.
그러나 그만큼 키에르트가 바싹 다가왔다.
“왜 다가오세요?”
“싫어?”
“……싫진 않지만.”
“좋은 것도 아니야?”
성큼 다가온 만큼 키에르트의 체취도 물씬 가까워졌다.
리시스는 괜히 목이 타는 기분에 입술을 물었다.
키에르트의 목덜미와, 쇄골, 거기서 이어지는 탄탄한 가슴, 그 사이를 가르는 가슴골까지, 보면 볼수록 갈증이 났다.
그런데 그 갈증이 달았다.
“……좋아요.”
리시스가 겨우 대답한 순간, 키에르트가 거칠게 입술을 집어삼켰다.
“흡!”
리시스가 숨이 막혀 키에르트의 어깨를 팡팡 두들겨도 놓아 주지 않았다.
키에르트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미친놈처럼 리시스의 입술을 물고, 핥고, 치열을 갈라 파고들었다.
리시스는 그때마다 정신이 저 바닥까지 아찔하게 떨어져 내렸다가 정수리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왔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때에는 키에르트의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하아, 하아……!”
“후우……!”
눈이 마주치고, 짐승처럼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탐색을 먼저 끝내버린 건 리시스였다.
리시스는 셔츠 사이로 드러난 키에르트의 윗가슴을 이를 세워 물었다.
그러자 냄새가 더 진하게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취할 것 같았다.
“……좋아요.”
“…….”
키에르트가 목 안으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폐하가 하고 싶어하는 것, 저도 하고 싶어요. ……해 주세요.”
리시스가 요구했다.
키에르트는 망설임 없이 응했다.
***
연병장에서 구를 때도 이렇게 숨이 차지는 않았다.
“후……!”
“하아……!”
두 사람은 팔다리를 내던지듯 누워 머리끝까지 치솟은 호흡을 가라앉혔다.
꼭 같이 달리기를 한 것 같았다.
거리도 같이, 보폭도 같이, 결승점까지 같이 한.
춤을 춘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맞을까.
할 때에는 즐겁고, 하면서는 체력이 꽤나 소모된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오늘은 꽤 오랜 시간 진득하기까지 했다.
씻고 나와 말끔했던 키에르트의 등도 다시 땀으로 흥건해졌다.
분명히 꽤 지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바로 다시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비치된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아무리 날이 포근해도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 걸려.”
황송하게도 황제 폐하께서는 손수 리시스의 젖은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리시스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키에르트는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장인처럼 미간을 모으고 리시스의 팔, 다리, 몸통, 모든 곳을 섬세하게 닦아냈다.
손가락 사이, 손톱 밑까지 꼼꼼하게.
“그런 데까지 젖지는 않았어요.”
리시스가 키득키득 웃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제 몸은 제가 더 잘 알아요.”
“……그래? 보장할 수 있어?”
키에르트가 슬쩍 웃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리시스는 당연하죠, 라고 대답하려다 눈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그랬다가는 내기가 걸리고, 자신이 질 것 같다는 예감이 확 들었다.
리시스는 도망쳐야 하는 순간을 귀신같이 아는 감과, 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결단력을 지닌 명장이었다.
“보장 못 할 것 같아요.”
“……치사하게.”
“제가 제 몸 볼 일이 생각보다 많진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긴 하지.”
키에르트도 정작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볼 일은 없었다.
자신의 몸을 봐서 뭐에 쓰겠는가.
하지만 리시스의 몸은 봐도봐도 눈이 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다.
귀여운 동물, 예쁜 꽃, 웅장한 자연 같은 것들.
리시스는 그 모든 것들이 가진 즐거움을 동시에 주었다.
“이 손끝은 꽃망울 같고.”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끝을 매만지며 말했다.
“손바닥은 이슬만 담기 위한 찻잔 같아. 아, 그거 아나? 그대 손바닥 이쪽에 점이 있어.”
“어? 그랬어요?”
“여기.”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손가락으로 찍어 준 곳을 들여다보았다.
“어, 이런 곳에 점이 있었네.”
늘 보는 손바닥이 아니라 잘 들여다 볼 일 없는, 손목뼈와 손날 사이 쪽이었다.
그것도 눈을 바싹 들이대고 보아야 보일 만큼 작고 희미한 점이었다.
“이런 걸 용케도 찾아 보셨네요.”
“그냥 보였어.”
그러고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몸 구석구석을 알려주었다.
리시스는 평생 몰랐던 점, 주름, 털 한 올 한 올의 위치까지도 알게 되었다.
“그런 건 왜 말하시는 거예요오…….”
“왜라니. 나는 이런 것들이 좋은데.”
“그게 왜 좋아요?”
“꽃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냥 좋은 거지.”
리시스의 구석구석을 바라보는 키에르트의 눈빛은 정말 꽃이나 귀여운 동물을 보듯 포근했다.
늘 차가운 무표정을 유지하던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자연스레 느슨해져 있었다.
리시스는 그런 키에르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폐하가 말씀하신 ‘소중히’가 뭔지 알겠어요.”
“갑자기?”
“폐하가 저를 대하시는 게, ‘소중히’ 대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키에르트도 스스로의 행동에 그렇게 이름을 붙여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막상 리시스의 입을 통해 자신이 리시스를 ‘소중히’ 대하고 있다는 얘길 들으니…….
“……모자라.”
자신의 행동이 몹시 미진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키에르트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겨우 이 정도에 ‘소중히’를 붙이기에는 한참 모자라.”
“모, 모자라다고요?”
리시스가 멈칫했다.
키에르트가 자신을 대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대해야겠다. 손끝 발끝 하나 놓치지 않고, 머리털 하나도 아까워하면 그게 스스로를 소중히 대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막 생각하던 참이었다.
“아암, 모자라지. 작정하고 소중히 대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군. 아아, 그래야겠어.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는데, 알려줘서 고맙군.”
리시스는 질려버렸다.
“아, 아뇨. 그냥 막 대해 주세요.”
“싫어.”
키에르트는 협상의 여지조차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의 눈에서 광기가 묻어났다.
남들은 남편이 소중히 대해주지 않아서 불만이라는데, 왜 자신은 거꾸로 되어버리는 것일까.
“아니야, 아니야! 하지 마세요!”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뭐라도 할까 봐 다급해진 마음에 그의 두 손을 붙잡았다.
물론 그 정도로 말려질 리가 없었다.
제압을 하려면 확실히 해야 한다.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타고난 체급의 차이는 메울 수 없다. 하지만 체중으로 밀어붙이면 어느 정도는…….
“…….”
“…….”
왜 완성된 자세가 이 모양일까.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허리 위에 올라타 양 손목을 결박해 누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키에르트 역시 당황한 나머지 움직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리시스의 머리카락이 등에서 흘러내려 키에르트의 얼굴 위를 간지럽혔다.
이 각도에서 키에르트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키에르트 역시 리시스를 이렇게 올려다보는 것이 낯설었다.
자신의 양 손목을 결박하고, 내려다보는 리시스의 모습에 왜 가슴이 뛰어버리는 것인가.
“……막 대해지는 것도, 좋은 것 같군.”
겪어보니 의외로 좋았다.
앞으로 계속 막 대해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리시스는 이미 심술이 들어찬 상태였다.
“싫어요. 이번에는 폐하께서 ‘소중히’ 취급받아 보세요.”
리시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키에르트는 헛숨을 들이켰다.
지금 그는 완벽한 무방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