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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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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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2022.07.03.
리시스의 문제는 스스로의 가치를 잘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자존감이 낮은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 가치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품는 마음의 가치가 아니라는 점도 문제였다.
‘보호자 하나 없는 낯선 환경에서 잘 웃는 아이가 가지는 가치.’
‘전쟁터에서 일 잘하는 공주가 가지는 가치.’
‘정략결혼에서 황후가 가지는 가치.’
완전히 물건 취급이었다.
키에르트도 크게 다른 사고방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가졌냐고 누가 묻는다면, ‘쉬란의 지배자, 에드린과 로구안을 막아낼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자, 민심을 살필 수 있는 치정자의 가치가 있다.’ 정도로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못해도 리시스는 잘했으면 좋겠다.
완벽한 억지였지만 그것이 키에르트가 가진 자기애의 일부이기도 했다.
“그대의 몸이 상하는 게 싫어.”
“아……, 물론 몸도 자산이니 아껴 써야죠. 그렇지만 지금은 쓸 때니까 쓰는 건데요.”
“그냥 안 썼으면 좋겠어.”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 때문에 서먹해질 뻔했는데 덕분에 까르르 웃음이 돌아왔다.
키에르트는 웃지 못했다.
묵직한 압박감에 진동까지.
하지만 지금은 리시스에게 ‘소중함’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키에르트는 집중력을 총동원했다.
“어떻게 하나도 안 쓰고 살 수가 있어요. 아끼다 똥 돼요.”
“그대의 것이면 그대의…….”
‘똥’이라는 단어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키에르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리시스가 말하면 소탈하고 귀여운 느낌이 들지만 자신이 말하면 그냥 저속하고 원색적으로 들릴 터다.
“……그대의 배설물도…….”
“설마 소중하다고 하실 건 아니죠?”
“……그건 넘어가지.”
키에르트도 양심은 있었다.
차마 그것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가 스스로의 몸을 아끼고 아낀다고 해서 그게 꼭……, 그것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야. 그 자체로 소중할 뿐이지.”
“이러다 죽으면 몸뚱이야 썩어 거름되고, 그럼 똥 되는 거죠.”
“그대가 죽으면 안 썩게 처리해서 보석으로 감아 대대손손 이어지게 할 거야.”
리시스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아니, 그런 생각을 하신 것도 무서워요.”
“그래야 소중한 티가 나겠지.”
“아, 정말.”
키에르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리시스가 끝내 고집을 피우면 진짜 실천할 기세였다.
이번만큼은 리시스가 졌다.
고집피우는 키에르트가 귀여워서 져 준 거다.
이 엄숙하신 황제 폐하의 고집이 귀여워 보일 때도 있었다.
물론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어서 더 귀여워 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좋아요, 그럼 어떻게 소중히 하면 돼요?”
키에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우선 흙바닥에 앉거나, 눕거나, 구르는 것 금지.”
“음, 네에.”
“끼니 거르고 넘어가는 것 금지.”
“그 정도야 뭐. 쉽네요.”
“모든 끼니를 먹고 싶은 것으로 채우고,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쳐다도 보지 않기.”
“……어……. 네.”
리시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눈칫밥 얻어먹고 살던 공주도 아니고, 여지는 먹을 것 없어 허덕이던 전선도 아니다.
그 정도야, 뭐. 가능.
“머리카락 손질은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
“……음, 뭐, 그거야 알아서들 해 주니까요. 네.”
“과일을 깐다거나, 티티 먹이를 까는 사소한 것도 본인 손으로 직접 하지 않기.”
“폐하는 하시잖아요.”
“하고 싶어서 하는 건 괜찮아. 해야만 해서 하는 건 안 돼.”
“……까다롭네요…….”
슬슬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까다로울 것까지 있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면 되는 건데.”
“세상을 어떻게 그러고 살아요. 폐하도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시는 건 아니잖아요.”
리시스가 반격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가볍게 웃으며 떨쳐냈다.
“응, 나는 그렇게 살아도 그대는 안 돼.”
“……와. 뭐 이런 억지를…….”
“맞아, 억지. 하지만 그대는 그랬으면 좋겠어.”
“왜요?”
말도 안 되는 것들이 반복되면 결국 이유를 찾게 된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왜 이러는지부터가 궁금해졌다.
“왜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그야…….”
‘왜’라니.
그것에 이유가 필요한가?
키에르트는 살짝 울컥했다.
“그대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기분이 상해.”
감정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묻어난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목소리에서 거스를 수 없는 감정을 읽었다.
여기서 자신이 또 부정해 버리면, 키에르트의 감정은 많이 상해버릴 것이다.
리시스는 이렇게 또 져 버렸다.
“알겠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좋은 것만 하고.”
“네에.”
“좋은 것만 보고.”
“네에.”
“뭐든 해 달라고 해. 업어달라, 먹여달라, 입혀달라, 씻겨달라.”
점점 소중한 것에서 인권 실종으로 변질되어가는 것 같은데.
이상한 걸 느꼈지만 키에르트는 이미 폭주해 버렸다.
“그럼 잠도 제가 자지 말아요? 누가 대신 자 주나?”
“‘재워달라.’ 있잖아.”
“……아, 맞네요.”
키에르트는 작정하고 벼르던 사람처럼 거침없었다.
한바탕 쏟아낸 키에르트가 드디어 할 말이 떨어졌는지 입을 다물었다.
리시스는 빼꼼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자신의 차례가 왔다.
“그럼 저 지금 하고 싶은 거 있는데.”
“뭐든.”
키에르트가 눈에 이채를 띠고 리시스의 말을 기다렸다.
“폐하 냄새 맡고 싶은데요.”
“……어?”
“생각보다 좋아서요. 품에 안겨 있는 것도 편하고.”
맞닿은 하반신은 좀 불편하기는 했지만, 부부인데 뭐 어떠랴.
리시스는 뻔뻔하고 이기적으로 굴기로 했다.
그러라고 말한 게 폐하시잖아요.
폐하의 명대로 했을 뿐입니다.
리시스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며 어디, 막을 테면 막아보라는 투로 치댔다.
“……허, 참.”
키에르트는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두 팔을 벌렸다.
리시스는 냉큼 키에르트의 두 팔 사이로 파고들어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소파에 반쯤 누운 키에르트의 몸 위로 리시스의 몸이 얹혔다.
워낙 가벼워서 조금 묵직한 베개를 올려놓은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키에르트가 숨을 쉴 때마다 리시스의 몸이 위아래로 같이 움직였다.
“재밌어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가슴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쫑알거렸다.
“……하하.”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다시금 잊고 있던 고난과 인내의 시간이 찾아오려 했다.
막 씻고 나와 향긋하고 따끈따끈한 리시스의 몸은 참으로 파괴적이었다.
키에르트의 인내심을 있는 힘껏 박살내 주는 파괴력이 제법이었다.
“생각해 보면 남의 냄새를 이렇게 맡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긴, 그렇지.”
포옹을 하기는 해도 냄새를 킁킁거리는 일은 많지 않다.
입술을 마주대는 것부터가 은밀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냄새를 맡는 것부터였다.
스치는 향수 냄새는 먼 관계,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는 관계의 냄새다.
그러나 체취는 그 사람의 몸에 아주 가까이 코를 대지 않으면 맡을 수 없다.
손이나 팔 같은 곳에서는 잘 나지 않아 은밀하고 여린 살이어야만 한다.
체취는 그런 곳까지 내어줄 수 있는 거리와 친밀감을 증명하는 냄새였다.
리시스는 가슴을 잔뜩 부풀려 키에르트의 체취를 가슴에 담았다.
“내 냄새는 어떻지?”
“음……, 표현하기가 어려워요. 그냥 맡고 있으면…….”
리시스는 눈을 감고 다시 한번 키에르트의 품에 코를 묻었다.
씁- 하고 리시스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울렸다.
“커다랗고 순한 동물에 기댄 것 같은 느낌?”
“소나 말 같은?”
“그것보단 날렵하고 날카롭지만, 저한테만 착한 동물이요.”
길들인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본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그랬다.
자신을 절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동시에 외부의 적을 막아줄 것 같은 든든함까지.
이 품 안에서라면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그런 냄새였다.
한동안 눈을 감고 키에르트의 체취를 만끽하던 리시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저도 제 맘대로 했으니까 폐하도 맘대로 하셔도 돼요. 아니, 하세요.”
“나는 이미 맘대로 하고 살아.”
“……아니신 것 같은데……. 황제의 의무가 어쩌고…….”
그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의무마저도 키에르트가 선택한 것이었다.
키에르트는 황제로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의 삶에 큰 불만이 없었다.
황제도 적성으로 뽑을 수 있다면 자신은 황제의 재능이 넘쳐난다고 자부하며 살았다.
키에르트가 자신의 마음대로 못 하는 것이 있다면…….
“그쪽 말고 다른 쪽으로 있긴 해.”
“어, 뭐요? 뭐든 말씀해 보세요.”
“말만?”
키에르트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
뭔가 느낌이 이상했지만 리시스에게 키에르트는 이미 신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리시스는 렉싱턴 장군님의 신신당부를 깜빡 잊었다.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어도 남자는 믿지 말라는 걸.
“아뇨……, 폐하도 하고 싶으신 건 다 하셔도 되죠…….”
“그래……?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게 저랑 관련이 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게 그대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잖아?”
리시스가 도로록 눈알을 굴렸다.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하고 싶은 짓이야 많지.”
“일단 들어볼게요.”
완벽한 오답이었다.
키에르트는 혼내듯 리시스의 코를 깨물었다.
“아얏! 왜요오……!”
리시스가 울상을 지으며 코를 감쌌다.
“일단 들어보면 어떻게 하나. 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면 그냥 듣지도 말아야지.”
“들어봤는데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잖아요!”
억울한 리시스가 빽 항의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병아리 앞의 호랑이처럼 지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듣고 마음이 흔들릴 수는 있지만 안 들으면 흔들릴 일도 없어.”
“어쨌든 저는 지금 폐하가 뭐 하고 싶으신지 듣고 싶어요! 자! 말씀하세요!”
호랑이는 무서운 존재였지만 병아리는 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호랑이가 병아리에게 약했다.
병아리의 삑 소리에 어흥 한 번 못 해보고 수그러들었다.
“나는.”
“네, 폐하는.”
리시스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눈을 이글거렸다.
키에르트도 지지 않고 강하게 맞섰다.
“그대를 만지고 싶어.”
“?”
키에르트 딴에는 제법 강한 한 방을 날렸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의바르고 배려 깊은 쉬란의 신사 기준이었고, 온갖 음담패설과 거친 말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자란 리시스의 기준에는 깃털처럼 아주 가벼웠다.
“그대의 냄새를 구석구석 맡고 싶고.”
“? 네에.”
“그대의 몸에 빈틈없이 입술을 누르고 싶고.”
“그건 저번에도 하셨잖아요.”
“……어?”
그렇긴 하지.
……그렇긴 한데.
키에르트는 당황했다.
왜 리시스는 이렇게 담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