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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막 쓸 거면 그냥 내게 줘 (95/153)


95. 막 쓸 거면 그냥 내게 줘
2022.06.30.


리시스는 놀랐지만 놀라지 않았다.

키에르트와의 키스는 이제 뒤집어질 만큼의 대사건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찰나에, 왜 키스?

말 대신 키스를 한 키에르트의 선택에 놀랐다.


“……왜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리시스가 물었다.

키에르트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을 키스로 표현했을 뿐이다.

키스를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니, 원점이었다.

나는, 그만큼, 그대가.

그대가.


“……아. 제가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남자와 키스까지 할 리는…….”

“……그럴 리는 없다고 나도 알고 있거든!”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아주 멀리까지 가 버린 생각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시스는 다시 한번 눈을 땡그랗게 떴다.


“폐하, 오늘따라 화가 많으세요…….”

“화 아니야.”

“화내고 계신데요.”

“아니야. 이건.”

“……이건?”

또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키에르트에겐 참 어려운 과제였다.

그런 걸 생각하며 살 필요 없는 인생이었다.

오히려 감정이라는 것을 일부러 지우며 살아왔다.

뒤늦게 하나씩 솟아오르는 감정을 하나씩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데 그것에 맞는 이름까지 찾아 붙여야 했다.

너무 난도가 높았다.


“……고민해 보고 말해줘도 되나?”

“아, 네. 그러세요.”

당장 대답을 못 듣는다고 큰일 날 것도 아니니.

리시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돌아가야죠?”

“왜?”

“훈련하다 나왔으니까…….”

“안 돼.”

“예에? 그럼 훈련은 어쩌고요.”

때려치워!

키에르트의 본심에서 농도 짙은 떼쟁이의 향기가 우러나왔다.

물론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걸 마지막 한 움쿰 남은 이성의 찌꺼기가 알려주어 참았다.

리시스는 지금 자신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나서서 고생해주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이 특수부대 훈련은 반드시 필요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한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그 필요성이 점점 더 크게 와닿았다.

그렇다고 리시스를 다시 연병장으로 돌려보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연병장일 뿐인데 무슨 불이 절절 끓는 지옥이라도 되는 것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휴식.”

키에르트는 강제 휴식을 명령했다.

리시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벌써요? 안 돼요! 제대로 훈련을 하려면 최소 열흘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굴려야 해요. 깨작깨작하다 말면 훈련이 안 된다고요.”

훈련을 계속해야 할 당위성도 있었다.

죽을 만큼 힘들고, 진짜 죽을 뻔했다 살아나야 실전과 비슷한 느낌이라도 내지.

하다 말다 깔짝대는 건 훈련도 운동도 뭣도 아니다.

물론 그 지론에 병사들의 동의는 없었다.


“그놈들 굴리는 건 상관없는데 거기서 그대가 같이 구르는 건 큰 문제야.”

“에이……, 제가 칼 휘두르는 것도 아닌데…….”

키에르트는 단박에 도끼눈을 떴다.


“……만 지휘봉도 많이 휘두르면 힘들긴 하죠. 네, 쉬어야죠.”

웬만하면 개겨보려 했지만 키에르트의 눈에 실린 힘이 웬만하지 않았다.

리시스는 적당히 후퇴할 때를 아는 훌륭한 지략가였다.

키에르트는 가끔 이렇게 단호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리시스가 맨발로 땅에 내려서려고 했을 때 같은 순간.

결국은 자신을 위해주는 것이라 투덜거릴 수도 없었다.

고마운데 살짝 귀찮은 잔소리였다.


“그럼 뭐 하고 쉬어요?”

“그건 가서 고민해도 되지 않겠나.”

키에르트는 당연한 것처럼 부부궁으로 향했다.

부부궁도 제집이 맞기는 하지만 황제궁이 없는 사람처럼, 갔다 하면 부부궁이었다.

누가 보면 황제궁이 때려 부숴 없어진 줄 알 정도로 당연한 행선지 선택이었다.

그러나 리시스도 그걸 지적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



“아, 살겠다.”

훈련은 절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실전과 똑같게 굴린다는 말은, 먹고 자고 쉬는 것까지도 전쟁터와 똑같이 유지한다는 말이었다.

낮에는 그늘 하나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구르고, 밤에는 모닥불 하나에 의지해 땅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의 식단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그 상태로 뛰고 또 뛰게 했다.

지휘관이라고 황야 한가운데에서 스테이크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었다.

적군에게 포위되어 식량이 한정되었을 때, 지휘관에게 어느 정도의 식량을 배분해야 하는가.

이런 것도 미리 준비하고 훈련해 두어야 그런 상황이 실제로 닥쳤을 때 덜 당황할 수 있다.

당황하는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다.

먹는 걸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결론적으로 리시스도 그 훈련을 같이 해서 거지꼴을 모면할 수 없었다.


“이리 와.”

키에르트가 젖은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욕실에서 나오는 리시스에게 팔을 벌렸다.

리시스는 쪼르르 달려가 키에르트의 다리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손에서 수건을 건네받아 머리카락의 물기를 꾹꾹 눌러 짜기 시작했다.


“이거 마시고.”

리시스는 쌓인 땟국물을 뽑아내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먼저 씻고 나온 키에르트는 그 사이 리시스가 마실 시원한 음료를 가져다 놓았다.

리시스는 단숨에 음료를 비워버렸다.


“캬!”

걸쭉한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엄청나게 목이 마르던 차였다.

전투 중에는 식량보다 구하기 어려운 것이 물이었다.

물 역시 마찬가지로 실전처럼 최대한 제한했더니, 몸에서 피가 다 말라갈 정도로 건조한 상태였다.


“어흐, 이제 살겠어요.”

“다행이군. 내 황후가 죽으면 큰일이지.”

키에르트는 머리를 말려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무릎 사이에 앉아 자신이 준비한 음료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리시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리시스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손아귀 안에 넣어 꼬옥 쥐고 싶었다. 그리고 영원히 손을 펴지 않은 채 살고 싶었다.


“향이 좋아.”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대신 머리카락을 쥐어보았다.

가장 처음 자신이 손을 내밀어 잡았던 리시스의 신체부위는 머리카락이었던 것 같다.

신체 중에서 가장 감각이 적은 곳이자 언제든 잘라 내어버릴 수 있는 곳.

리시스는 아무 말 한 적 없지만 키에르트 스스로가 그 정도의 용기밖에 내지 못했다.

언제든 잘라낼 수 있는 부분까지만 자신에게 허용된 것 같았다.

리시스가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언제든 황후를 그만두고 훌쩍 사라져버릴 것처럼.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깊숙이 향을 들이마셨다.

향긋한 비누 냄새와 리시스의 보드라운 체취가 섞여 키에르트의 폐부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의 몸 안에 그 향기가 섞여들어 영원히 맴돌았으면 좋겠다.

키에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내뱉지 않고 참았다.


“폐하도 같은 비누 쓰신 것 아니에요?”

혼자 감상에 젖어들던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고개를 반짝 드는 바람에 박치기를 당할 뻔했다.

리시스가 화려하다고 좋아했던 이목구비는 소중히 해야 했다.

키에르트는 얼른 얼굴을 뒤로 물렸다.


“……응? 아닐걸?”

“어? 그래요?”

“그대와 나는 체질도, 피부도 다르니까.”

“아아, 그렇구나.”

리시스는 신기해하며 손뼉을 짝 쳤다.

전선에서야 비누라는 것이 있기만 해도 감지덕지한 수준이었고, 공주 리시스로 지낼 때에도 비누면 아무거나 썼다.

황후가 된 후에도 리시스가 일일이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편이 아니니 ‘알아서’, ‘적당히’, ‘대충’ 집히는 대로 쓰던 중이었다.

매번 목욕 시중을 들 때마다 비누만 가지고 한 시간씩 회의를 하던 하녀들이 들으면 땅을 치고 통탄해 할 일이었다.


“그럼 폐하 몸에서는 다른 향이 나겠네요? 맡아봐도 돼요?”

키에르트는 편히 맡으라는 듯 두 팔을 벌려주었다.

리시스는 몸을 돌려 키에르트의 품에 코를 박았다.

킁킁, 킁.
 

 
강아지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냄새를 맡는 모습을 내려다보던 키에르트의 시선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이거…….’

묘하게 간지럽다.

그냥 벅벅 긁고 싶은 간지러움이 아니라, 몸속, 피부 밑을 솜털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근질근질했다.


“오, 진짜. 제 몸에서 나는 향기보다 폐하의 몸에서 나는 향이 더 시원해요.”

“……그래?”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이 뭔지 관심이 없는 것은 키에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네, 와, 목으로 올라가니 좀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

순진무구함은 때로는 죄다.

리시스는 죄인이었다.

키에르트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죄인.


“…….”

키에르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이 노래졌다, 파래졌다, 빙빙 돌았다 난리를 쳤다.

소파 등받이에 걸쳐놓고 있던 손에 소파를 파고들 것처럼 꽉 힘이 들어갔다.


“신기해요. 목덜미에선 향이 더 진해지네요?”

“……그만.”

키에르트는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리시스의 어깨를 잡아 밀었다.


“왜요? 폐하 냄새 좋아요.”

그러니까, 역시 순진무구함은 죄가 맞다.

키에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잡아 밀어도 고집을 피우며 품으로 파고드는 리시스의 기세에 키에르트가 밀렸다.


“어어…….”

마음만 밀린 것이 아니었다. 몸도 밀렸다.

더 세게 밀면 벌렁 자빠질까 봐 힘을 뺐더니, 리시스가 몸으로 부딪쳐 왔다.

요 며칠간 병사들이랑 거칠게 뒹굴더니 키에르트와 있을 때에도 그렇게 행동했다.

순간 중심을 잃은 키에르트의 몸이 뒤로 기우뚱했다.

털썩!

리시스는 몸을 겹친 채 뒤로 쓰러진 키에르트의 몸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코를 목덜미에 박은 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손이 올려진 키에르트의 가슴이 퉁퉁 뛰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이따금 가슴근육이 움찔거리기도 했다.


‘앗…….’

리시스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아버렸다.

사실 가슴근육은 깨달음을 준 키에르트의 신체 중 일부에 불과했다.

더 야단이 난 것은 하반신이었다.


“어, 죄, 송해요.”

리시스는 허둥지둥 일어나 사태를 모면하려 했다.


“어딜.”

이미 키에르트는 당할 대로 당해버렸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악에 받친다.

키에르트의 두 팔이 리시스의 몸을 감았다.

사람이 말이야. 겨우겨우 참고 있으면 자극이라도 하지를 말아야지.

인간으로서 이래선 안 되었다.

이건 리시스가 진짜 너무한 게 맞았다.


“폐, 폐하?”

뒤늦게 리시스가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키에르트의 마음은 이미 굳어졌다.


“내내 생각하고 있던 건데……. 그대의 몸. 그렇게 함부로 막 쓸 거면 그냥 내게 줘.”

“……예에?”

“내가 소중히 잘 쓸게.”

“……예에?”

리시스는 버둥거리던 것도 잊고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키에르트는 한없이 진지했다.

리시스는 혼란스러웠다.


“그 말씀은……, 부부계약서에 신체포기각서도 포함시키자는 제안……, 이실까요?”

“…….”

소중히, 소중히, 소중히!

키에르트는 ‘소중히’라는 말을 리시스의 머릿속에 한 땀 한 땀 새겨 넣어 주고 싶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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