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나는, 그대를…….
(94/153)
94. 나는, 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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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나는, 그대를…….
2022.06.26.
“훈련도 좋지만 먹어가면서 해야지.”
“먹고 있어요.”
“부족해.”
키에르트는 병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리시스의 입가에 먹을 것을 가져다 댔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만 벌려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눈은 병사들에게 고정된 채였다.
벌써 삼 일째.
죽음의 훈련이 시작된 지 삼 일째였다.
리시스는 호언장담한 훈련을 즉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강한 체력훈련인가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점진적 강화라는 체계가 있었다.
이건 어디에서나 쓰는 훈련법이기는 한데, 그 정도의 차이가 심하게 있었다.
“으아아악! 더는 못 해!”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병사가 절규하며 드러누우려 했다.
리시스는 턱을 괴고 나긋하게 물었다.
“진짜 못 해?”
“하, 할 수 있습니다!”
삼 일은 공포를 뼈에 새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리시스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차분히, 친절하게,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해.
무조건 해.
안 돼?
안 돼도 해.
될 때까지 해.
처음엔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하던 병사들도 시간이 지나자 차차 그것의 의미를 알아갔다.
까라면 까라는 말은 훈련의 기본에 깔린 이념이었다.
“죽으라면 죽을 정도의 각오는 돼야 특수부대라 할 수 있지.”
리시스는 악에 받친 병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인하지만, 일선에서 희생되어야 하는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훈련 중에 죽을 걱정을 하는 것은 아직 멀었다는 소리다.
“10회 반복. 실시.”
“하나, 둘, 셋! ……여덟, 아홉!”
“다시 하나부터.”
“아아악!”
그래서 리시스는 진짜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일곱도 아니고, 여덟도 아니고, 아홉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악랄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눈에 독기가 들어찼다.
‘귀엽고 보들보들한 황후 폐하는 개뿔!’
처음에는 리시스의 명령이 삐약 소리 정도로만 들렸다.
양 옆에 대장들과 황제 폐하를 끼고 있으니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명령을 들어야만 했다.
내심 황후 폐하가 훈련을 시켜 봤자 얼마나 잘 시키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리시스의 명성을 알면서도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먼저 현혹되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단계적으로 선을 넘었다.
‘음……, 생각보다 별로네?’
누가 그런 말을 듣고서 ‘하핫, 예, 제가 원래 좀 별로죠!’라며 웃을 수 있겠는가.
‘어디 한 번 제대로 보여 드려?!’
울컥한 병사들은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리시스의 노림수였음을, 아직까지 그들은 몰랐다.
뭔가 홀린 것 같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리시스의 말에 인권을 포기하고 뒹굴던 순간이었다.
“생각을 왜 해, 생각을!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늦어!”
“으아아!”
“더 빨리! 그렇게 움직여서 쉬란을 지킬 수나 있겠어?!”
“아아악!”
그러나 리시스는 느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뭔가 이게 아닌데!’
세상물정 모르는 귀여운 황후 폐하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칼의 세계를…….
“물러! 적군이랑 춤출래?! 더 빨리!”
“으아아악!”
……보여드릴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
리시스의 안목은 사람 고를 때나 마찬가지로 훈련의 성과에서도 날카로웠다.
“저 이상이 되겠습니까?”
병사들이 염려되어 장군들이 넌지시 물어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되면 죽어야지.”
“…….”
그 모자란 군수물자와 인력으로도 에드린이 쉬란을 가지고 놀았던 이유를 이렇게 알게 되었다.
알아도 이걸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드는 정보였다.
리시스가 없으면 이렇게 귀신같이 굴릴 수 있을 사람이 없었다.
“말이 다른 것도 아니고, 명령 듣고 움직이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리시스의 다그침에 다시 한번 흙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랐다.
‘……음, 확실히…….’
고생하는 사람 본인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리시스가 굴리면 굴리는 대로 병사들의 눈에 예기가 들어차는 것은 사실이었다.
‘저 망할 년!’
병사들은 황후고 뭐고 다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탔다.
‘저 정도면……, 누가 쳐들어와도 이기긴 하겠다…….’
한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밖에…….
그리고 리시스 역시 한계까지 함께 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리시스의 훈련은 개개인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쪽이 아니라 집단훈련에 치중했다.
물론 친위대와 황실군에서도 집단훈련은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집단훈련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사람을 한 ‘덩이’로 만드는 수준까지 집단을 치밀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리시스의 명령이 있었다.
“보라고! 날 보라고!”
처음에는 악감정인가, 혹시 맺힌 한을 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막연히 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서서히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리 굴러라, 저리 굴러라 명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변수들, 움직임의 흐름, 진영의 배치를 고려하며 그에 맞게 움직임을 통제하는 명령이었다.
그러니 리시스도 가만히 앉아 입만 놀리지 않았다.
때로는 흙바닥에 내려가 같이 뒹굴기도 하고, 보폭을 맞추어 뛰기도 했다.
리시스도 평소에 자신이 했던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황후.”
“예?”
처음에는 뭘 하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키에르트가 참다못해 나섰다.
리시스는 열렬히 휘두르던 지휘봉을 멈추고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전쟁터에 직접 나설 생각인가?”
“아뇨? 저는 하던 대로 뒤에서 명령을 하겠죠.”
“그게 그 말이지 않나.”
“……?”
리시스는 옅게 깔린 키에르트의 불쾌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나댔나?’
아무리 ‘지금은’ 쉬란의 황후여도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자리다.
물론 이제는 순순히 놓아 줄 생각도 없기는 하지만, 평생직이라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리시스의 머릿속에 없었다.
당장 마주해야 할 적이 너무 강하니 리시스가 설치는 꼴을 다들 묵인해 주고는 있지만 적국의 공주가 남의 나라 군사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곱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아……, 제가 역시 직접 나서는 건 보기에 안 좋을 수도 있겠네요.”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그대가 왜 전쟁터에 나가. 그것도 이 시커먼 놈들이랑.”
리시스는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뽀얗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시커메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시 하얘지면 괜찮은 걸까요?”
“그게 아니라! 세상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자가 전쟁터에 나서는 걸 가만 두고 보겠나!”
키에르트의 분노에 다들 흠칫했다.
“앗.”
“헛…….”
리시스가 황후라서, 그리고 워낙 신묘하게 사람을 잘 굴려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말이 맞았다.
굳이 ‘여자라서’라는 말을 붙일 필요까지도 없이, 가족, 친구만 해도 자신이 알고 지내는 소중한 사람을 전쟁터로 내몰고 싶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자기 자신이 그만한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남자들이요.”
“…….”
그러나 그 상식은 리시스의 세계에서는 예외였다.
리시스의 가장 가까운 혈연, 에드린 왕은 리시스를 전쟁터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전쟁터에서도 한 사람의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리시스가 직접 무엇인가를 할 때 말리는 이 하나 없었다.
리시스에겐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것이 또 하나 이렇게 드러나 버렸다.
그걸 키에르트가 말해주고서야 아, 자신이 마땅히 받았어야 했던 것을 받지 못했구나 깨달았다.
“나는 아니야. 나는 그 꼴 못 봐.”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까지 리시스를 대할 때 키에르트는 언제나 꽃을 다루듯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키에르트의 손아귀에서 리시스는 처음으로 강경한 ‘힘’을 느꼈다.
힘이 없어서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키에르트가 약할 리 없었다.
알면서도 이렇게 겪어봐야 새삼스레 그 사실이 피부에 닿았다.
리시스는 얌전히 키에르트의 손에 끌려 연병장을 벗어났다.
리시스의 걸음은 키에르트의 걸음을 따라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홱 돌아보더니 말도 없이 번쩍 들어올렸다.
“저 걸을 수 있는데…….”
“내가 보고 싶지가 않아.”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에도 화가 총총히 박혀 있다.
리시스는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으로 인해 키에르트가 이렇게 화를 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대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곳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네…….”
그건 키에르트가 늘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시스도 이젠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말로만이 아니고, 진심으로.”
키에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
리시스는 순간 입이 붙어버렸다.
‘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긴 아나?
키에르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자신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하나도 모른다는 것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황후.”
“……네.”
“리시스.”
두 번째였다.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이름을 부른 건.
황후가 아니라, ‘리시스’라는 사람을 원한다며 불렀던 리시스의 이름.
그때는 몸이라도 취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오늘은 하루 종일 ‘왜’만 머릿속에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왜’를 외쳐도 리시스의 머릿속에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키에르트는 친절하게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던져주려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조차 그 감정에 대한 이름을 섣불리 정의내릴 수 없었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단어는 흘러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대를…….”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올려다보며 작은 숨소리마저 눌렀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어떤 단어가 너무나도 무거울 것 같아서.
그것을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짓눌리고 있었다.
꼴깍.
긴장해버린 목구멍이 침을 넘기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앗. 하필 이럴 때…….’
리시스가 눈치를 보며 입술을 물었다.
지금 리시스는 연병장에서 뒹구느라 화장도, 머리도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키에르트의 눈에는 탐이 난다는 것도, 리시스가 모르는 것 중 하나였다.
“!”
키에르트는 다음 순간, 말 대신 입술을 겹쳤다.
94. 나는, 그대를…….
2022.06.26.
“훈련도 좋지만 먹어가면서 해야지.”
“먹고 있어요.”
“부족해.”
키에르트는 병사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리시스의 입가에 먹을 것을 가져다 댔다.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돌아보지도 않고 입만 벌려 받아먹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눈은 병사들에게 고정된 채였다.
벌써 삼 일째.
죽음의 훈련이 시작된 지 삼 일째였다.
리시스는 호언장담한 훈련을 즉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 강한 체력훈련인가 싶은 정도였다.
그러나 세상에는 점진적 강화라는 체계가 있었다.
이건 어디에서나 쓰는 훈련법이기는 한데, 그 정도의 차이가 심하게 있었다.
“으아아악! 더는 못 해!”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병사가 절규하며 드러누우려 했다.
리시스는 턱을 괴고 나긋하게 물었다.
“진짜 못 해?”
“하, 할 수 있습니다!”
삼 일은 공포를 뼈에 새기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리시스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차분히, 친절하게,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명령했다.
해.
무조건 해.
안 돼?
안 돼도 해.
될 때까지 해.
처음엔 무슨 소린가 어리둥절하던 병사들도 시간이 지나자 차차 그것의 의미를 알아갔다.
까라면 까라는 말은 훈련의 기본에 깔린 이념이었다.
“죽으라면 죽을 정도의 각오는 돼야 특수부대라 할 수 있지.”
리시스는 악에 받친 병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인하지만, 일선에서 희생되어야 하는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훈련 중에 죽을 걱정을 하는 것은 아직 멀었다는 소리다.
“10회 반복. 실시.”
“하나, 둘, 셋! ……여덟, 아홉!”
“다시 하나부터.”
“아아악!”
그래서 리시스는 진짜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일곱도 아니고, 여덟도 아니고, 아홉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악랄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병사들의 눈에 독기가 들어찼다.
‘귀엽고 보들보들한 황후 폐하는 개뿔!’
처음에는 리시스의 명령이 삐약 소리 정도로만 들렸다.
양 옆에 대장들과 황제 폐하를 끼고 있으니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명령을 들어야만 했다.
내심 황후 폐하가 훈련을 시켜 봤자 얼마나 잘 시키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리시스의 명성을 알면서도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 먼저 현혹되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단계적으로 선을 넘었다.
‘음……, 생각보다 별로네?’
누가 그런 말을 듣고서 ‘하핫, 예, 제가 원래 좀 별로죠!’라며 웃을 수 있겠는가.
‘어디 한 번 제대로 보여 드려?!’
울컥한 병사들은 눈에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리시스의 노림수였음을, 아직까지 그들은 몰랐다.
뭔가 홀린 것 같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리시스의 말에 인권을 포기하고 뒹굴던 순간이었다.
“생각을 왜 해, 생각을!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늦어!”
“으아아!”
“더 빨리! 그렇게 움직여서 쉬란을 지킬 수나 있겠어?!”
“아아악!”
그러나 리시스는 느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뭔가 이게 아닌데!’
세상물정 모르는 귀여운 황후 폐하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칼의 세계를…….
“물러! 적군이랑 춤출래?! 더 빨리!”
“으아아악!”
……보여드릴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
리시스의 안목은 사람 고를 때나 마찬가지로 훈련의 성과에서도 날카로웠다.
“저 이상이 되겠습니까?”
병사들이 염려되어 장군들이 넌지시 물어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되면 죽어야지.”
“…….”
그 모자란 군수물자와 인력으로도 에드린이 쉬란을 가지고 놀았던 이유를 이렇게 알게 되었다.
알아도 이걸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회의가 드는 정보였다.
리시스가 없으면 이렇게 귀신같이 굴릴 수 있을 사람이 없었다.
“말이 다른 것도 아니고, 명령 듣고 움직이는데 시간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리시스의 다그침에 다시 한번 흙먼지가 요란하게 피어올랐다.
‘……음, 확실히…….’
고생하는 사람 본인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리시스가 굴리면 굴리는 대로 병사들의 눈에 예기가 들어차는 것은 사실이었다.
‘저 망할 년!’
병사들은 황후고 뭐고 다 죽여버리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탔다.
‘저 정도면……, 누가 쳐들어와도 이기긴 하겠다…….’
한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밖에…….
그리고 리시스 역시 한계까지 함께 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리시스의 훈련은 개개인의 역량을 성장시키는 쪽이 아니라 집단훈련에 치중했다.
물론 친위대와 황실군에서도 집단훈련은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집단훈련에만 매진하지는 않았다.
리시스는 사람을 한 ‘덩이’로 만드는 수준까지 집단을 치밀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리시스의 명령이 있었다.
“보라고! 날 보라고!”
처음에는 악감정인가, 혹시 맺힌 한을 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막연히 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서서히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이리 굴러라, 저리 굴러라 명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투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변수들, 움직임의 흐름, 진영의 배치를 고려하며 그에 맞게 움직임을 통제하는 명령이었다.
그러니 리시스도 가만히 앉아 입만 놀리지 않았다.
때로는 흙바닥에 내려가 같이 뒹굴기도 하고, 보폭을 맞추어 뛰기도 했다.
리시스도 평소에 자신이 했던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황후.”
“예?”
처음에는 뭘 하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키에르트가 참다못해 나섰다.
리시스는 열렬히 휘두르던 지휘봉을 멈추고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전쟁터에 직접 나설 생각인가?”
“아뇨? 저는 하던 대로 뒤에서 명령을 하겠죠.”
“그게 그 말이지 않나.”
“……?”
리시스는 옅게 깔린 키에르트의 불쾌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나댔나?’
아무리 ‘지금은’ 쉬란의 황후여도 언제 내려갈지 모르는 자리다.
물론 이제는 순순히 놓아 줄 생각도 없기는 하지만, 평생직이라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리시스의 머릿속에 없었다.
당장 마주해야 할 적이 너무 강하니 리시스가 설치는 꼴을 다들 묵인해 주고는 있지만 적국의 공주가 남의 나라 군사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곱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아……, 제가 역시 직접 나서는 건 보기에 안 좋을 수도 있겠네요.”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그대가 왜 전쟁터에 나가. 그것도 이 시커먼 놈들이랑.”
리시스는 땟국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뽀얗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시커메진 것은 사실이었다.
“다시 하얘지면 괜찮은 걸까요?”
“그게 아니라! 세상 어느 남자가 자신의 여자가 전쟁터에 나서는 걸 가만 두고 보겠나!”
키에르트의 분노에 다들 흠칫했다.
“앗.”
“헛…….”
리시스가 황후라서, 그리고 워낙 신묘하게 사람을 잘 굴려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말이 맞았다.
굳이 ‘여자라서’라는 말을 붙일 필요까지도 없이, 가족, 친구만 해도 자신이 알고 지내는 소중한 사람을 전쟁터로 내몰고 싶은 사람은 없다.
더구나 자기 자신이 그만한 충분한 무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남자들이요.”
“…….”
그러나 그 상식은 리시스의 세계에서는 예외였다.
리시스의 가장 가까운 혈연, 에드린 왕은 리시스를 전쟁터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전쟁터에서도 한 사람의 손이 부족한 상황이라 리시스가 직접 무엇인가를 할 때 말리는 이 하나 없었다.
리시스에겐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것이 또 하나 이렇게 드러나 버렸다.
그걸 키에르트가 말해주고서야 아, 자신이 마땅히 받았어야 했던 것을 받지 못했구나 깨달았다.
“나는 아니야. 나는 그 꼴 못 봐.”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금까지 리시스를 대할 때 키에르트는 언제나 꽃을 다루듯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키에르트의 손아귀에서 리시스는 처음으로 강경한 ‘힘’을 느꼈다.
힘이 없어서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키에르트가 약할 리 없었다.
알면서도 이렇게 겪어봐야 새삼스레 그 사실이 피부에 닿았다.
리시스는 얌전히 키에르트의 손에 끌려 연병장을 벗어났다.
리시스의 걸음은 키에르트의 걸음을 따라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홱 돌아보더니 말도 없이 번쩍 들어올렸다.
“저 걸을 수 있는데…….”
“내가 보고 싶지가 않아.”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에도 화가 총총히 박혀 있다.
리시스는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으로 인해 키에르트가 이렇게 화를 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대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곳에만 있었으면 좋겠어.”
“……네…….”
그건 키에르트가 늘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시스도 이젠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말로만이 아니고, 진심으로.”
키에르트는 걸음을 멈추고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
리시스는 순간 입이 붙어버렸다.
‘안다’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긴 아나?
키에르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자신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하나도 모른다는 것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황후.”
“……네.”
“리시스.”
두 번째였다.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이름을 부른 건.
황후가 아니라, ‘리시스’라는 사람을 원한다며 불렀던 리시스의 이름.
그때는 몸이라도 취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오늘은 하루 종일 ‘왜’만 머릿속에 채우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왜’를 외쳐도 리시스의 머릿속에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키에르트는 친절하게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던져주려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조차 그 감정에 대한 이름을 섣불리 정의내릴 수 없었다.
입술이 달싹였지만 단어는 흘러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대를…….”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올려다보며 작은 숨소리마저 눌렀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어떤 단어가 너무나도 무거울 것 같아서.
그것을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짓눌리고 있었다.
꼴깍.
긴장해버린 목구멍이 침을 넘기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앗. 하필 이럴 때…….’
리시스가 눈치를 보며 입술을 물었다.
지금 리시스는 연병장에서 뒹구느라 화장도, 머리도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키에르트의 눈에는 탐이 난다는 것도, 리시스가 모르는 것 중 하나였다.
“!”
키에르트는 다음 순간, 말 대신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