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황제의 주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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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황제의 주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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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황제의 주접
2022.06.16.
“황후가 임신?”
세니아는 얼굴을 굳혔다.
차를 따르던 손끝이 흔들리며 찻물이 찻잔 밖으로 흘렀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세니아의 우아한 다도는 모든 귀족들의 선망이었다.
예절교사를 들여도 다도만큼은 세니아를 초빙해 따로 배우게 하고 싶어할 정도였다.
그런 세니아가 실수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동요했다는 의미였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황제 폐하께서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말씀을 종종 하고 계신다 합니다.”
세니아의 앞에 부복한 시비는 최대한 사실만 추려 말하려 노력했다.
소식을 전할 때 사적인 감상이나 개인적인 추리는 독이 된다.
사실 그대로를 전하는 것까지가 의무다.
거기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정보를 받은 사람이 할 일이다.
“어떤 말씀.”
“더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이 없는지를 자꾸 묻는다 하십니다.”
세니아의 고개가 삐걱 기울어졌다.
“그건 원래 그러셨잖아.”
“빈도가 평소의 열 배 이상입니다.”
“어떤 상황인데.”
똑같은 말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들릴 수 있다.
“예, 산책을 하시던 중, 화단에 핀 꽃에 황후 폐하가 눈을 돌리며 ‘이건 처음 보는 꽃이네요.’라고 말씀하시자 ‘안쉬미르 꽃이다. 원한다면 황후궁 앞에 안쉬미르 꽃으로 정원을 만들어 주지.’라고 즉시 제안하셨다 합니다.”
세니아의 눈썹이 움찔 찌푸려졌다.
이 정도는 그냥 꽃 자랑을 하고 싶어 주접을 떤 것일 수도 있다.
“또?”
“꽃에 가까이 가서 드레스 자락에 꽃물이 들었는데, 황후 폐하께서 그걸 보시고 ‘꽃물이 든 드레스라니, 꽃향기가 날 것 같네요!’라고 말씀하시자 ‘안쉬미르 꽃으로 향수를 만들어 보도록 하지.’라고 다시 제안하셨다 합니다.”
“그건 새로운 사업의 제안이었을 수도 있어.”
세니아의 추리에 시비는 가타부타 의견을 붙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든, 세니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면 그런 것이다.
“또.”
“화원을 구석구석 돌다가 황후 폐하께서 ‘처음 신는 구두를 신어서 그런지 발이 좀 아파서 좀 쉬었다 가도 될까요?’라고 물으시자 황제 폐하께서 ‘신발이 잘못했군.’ 하고 격노하시며 그 자리에서 신발을 벗겨 던져버리시고 황후 폐하를 안아든 채 산책을 마치셨습니다.”
“…….”
세니아는 찻물이 떨어진 테이블 위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 불에 올린 찻물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임신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이지?”
“황제 폐하의 입에서 나온 적은 없습니다.”
“그럼?”
“궁인들이 지나다니면서 하는 말 중에 종종 들리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황후 폐하, 회임하신 것 아냐?’, ‘그렇지? 회의에서 나오는 친위대장님이 계속 배를 흘끔거리시기도 했고.’ 였습니다.”
톡톡 움직이던 세니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어의는?”
“따로 어의의 진단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흐음…….”
손끝에 묻어나던 초조함이 덜어졌다.
임신이라는 말에 놀라 잠시 흔들렸다.
정황을 보면 임신일 가능성은 낮았다.
황제 부부는 제대로 된 합궁을 한 일도 몇 번 없었고, 그 합궁 뒤에 진찰을 했을 때에는 늘 아무 일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최근 부부궁이라는 요상한 것을 만들어 낸 후부터가 문제였다.
들르는 때도 들쭉날쭉, 제대로 된 합궁이 아니니 시중을 드는 사람들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 궁 안의 빨래나 뒷처리까지도 두 사람이 알아서 한다고 하니, 정보를 얻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미칠 일이었다.
‘만약에 진짜 황후가 임신을 하면, 그땐 문제가 심각해져.’
세니아는 손을 말아쥐었다.
손바닥 안에 손톱이 아프게 박혔다.
하지만 아픔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계속 지켜 봐.”
시비를 내보낸 세니아는 무심결에 손톱을 물어뜯을 뻔하다가 놀라 손을 내렸다.
자신이 이만큼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싫었다.
하지만 황손이 생겨버리면 복잡한 이해관계가 하나 추가되어버린다.
아이가 생긴 부부는 원수처럼 싸워도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실제로 원수인 키에르트와 리시스는 심지어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그저 표면적인 부부 흉내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그래야만 했다.
엄연히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하는 황후의 자리를,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앉게 된 사람이 가져갈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일부러 눈을 감고 있었지만, 세니아도 이제는 인정할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단지 동맹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알아보지 못하는 쪽이 이상하다.
남녀 간의 정은 어느 상황에 어떻게 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더니.
키에르트가 이렇게 어이없이 마음을 주게 될 줄이야.
누가 보아도 키에르트는 지금 리시스가 좋아서 온갖 주접을 다 떨고 있었다.
‘망신이야, 망신.’
세니아는 이를 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 황제라는 사람이 순간의 감정에 휘말려 저렇게 줏대 없이 굴 수 있는가.
세니아의 기준에 그것은 황제가 보여야 할 모습이 아니었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충동보다는 실리를.
세니아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그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다.
황제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딱 맞는다 여겼다.
그런데 그것들이 모조리 틀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비틀린 옥수수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옥수수알처럼 세니아가 쌓아 온 계획들도 무너져 내렸다.
실망스러웠다.
“세니아 아가씨. 연락이 왔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세니아의 상념을 깼다.
오늘 더 이상 받을 연락은 없었다.
상단 관련된 보고는 오전에 받았고, 궁의 소식도 방금 받았다.
“들여.”
어느 정신머리 나간, 주제도 모르는 청년이 구애의 편지라도 보낸 것이면 가만두지 않겠다.
가끔가다가 그런 정신 나간 인간이 있다.
감히 렌데일 공작가의, 장차 황후가 될 예정이었던 세니아에게 겁도 없이 구애해 오는.
“응……?”
그러나 세니아의 손에 들어온 것은 정신나간 청년의 구애 편지가 아니었다.
편지의 겉봉투에 선명히 찍힌 로구안 왕실의 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어쩌다 이런 오해를 사게 된 걸까요.”
“오해가 아닐 수도 있긴 하지.”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면 사람들의 설레발은 반대로 ‘감이 잘 맞은 것’이 된다.
“번식행위를 한 것은 맞으니, 수정이 되었을 확률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번식행위…….”
리시스의 낭만도 설렘도 없는 과학적인 단어에 키에르트가 신음했다.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한 행위는 인간의 ‘감성’이 포함된 생식행위가 맞았다.
하지만 다른 말도 충분히 많지 않은가.
사랑을 나누었다, 라든가 몸을 섞었다, 라든가.
“그렇게 말하니 너무 번식만을 위해 움직인 것 같은데.”
“……아. 그렇긴 하네요. 사람들이 하도 임신에만 초점을 맞춰 말해서 그쪽으로만 생각하다 보니.”
단어로 인해 행위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어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합궁은 정말 번식행위가 맞았다.
처음부터 ‘후계를 만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정한 날이니까.
거기에 육체의 대화를 통해 친밀감을 올린다는 부가적인 효과가 따라붙을 뿐이다.
하지만 부부궁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행위는 목적이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어서, 마음 끌리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잖아요.”
아이가 생기느냐, 마느냐. 둘 중 하나다.
이거, 기분과 분위기에 휩쓸려 뒤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느끼게 되었다.
할 때는 참 좋았는데…….
그 후에 단단히 오해해 버린 궁의 사람들이 거의 후계자가 탄생하기 직전인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버렸다.
“이걸 딱 잘라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고…….”
리시스를 싸고 도는 기류 형성이 나쁠 건 없다.
후계란 가볍지 않은 존재다.
그 후계를 낳은 사람에게도 동시에 무게감이 생긴다.
지금까지의 리시스는 개인의 인성, 키에르트의 총애, 정도의 무게를 지녔다.
하지만 세니아가 크게 경계하지도 않고 신경쓰지도 않았던 것을 보면 그 무게가 얼마나 하찮을 정도로 가벼운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후계가 생기면?
아마 세니아는 정색할 것이다.
그 외에도 자신을 견제할 곳은 아주아주 많았다.
소문을 방치하면 권력을 챙기는 대신 위협에 자신을 내놓게 될 것이다.
“제가 어디 맛깔스러운 미끼 한 번 돼 볼까요?”
“굳이.”
키에르트는 반기지 않는 투였다.
열심히 이런저런 음모를 꾸며보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투박한 반응에 ‘응?’ 하고 돌아보았다.
“그리고 오늘은 생각을 그만하는 것이 어떻겠나.”
“왜요?”
“우선은 이걸 먹어야 하니까.”
리시스가 생각에 잠겨 이런저런 가설을 늘어놓는 사이 상 위에는 만찬이 차려졌다.
키에르트는 얇은 피에 감싸인 고기를 자신이 먼저 한 입 먹고 남은 반을 리시스의 입에 가져갔다.
딱 그 정도가 리시스의 한입 크기에 맞았다.
리시스도 이제 이 정도는 생각 없이 받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키에르트의 부담스러운 어화둥둥도 받다 보니 당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목 메이나? 물 줄까?”
“주스요.”
“오렌지? 자몽? 키위?”
“사과는 없어요?”
“사과를 따오도록.”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먹인다.
키에르트는 심하게 다정해졌다.
“이 정도면 되겠나?”
키에르트는 손수 사과를 한 알 한 알 섬세하게 살피더니, 직접 손으로 눌러 짜 즙을 만들었다.
호두도 쪼개는 손이니 사과즙을 만드는 정도야 손쉬웠다.
수박즙이었어도 직접 해 주셨을까, 리시스는 사소한 궁금증을 품었지만 묻지 않고 넘어갔다.
말했다가는 밤새 수박 짜기 수련을 할 수도 있었다.
“네, 딱 좋아요.”
자신을 아껴주는 게 싫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고기도 안 먹어봐서 맛을 모를 뿐이지 한 번 맛을 들이면 잊지 못한다.
‘나중에 잊지 못하면 어떡하지?’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살을 잘 발라 입까지 날라주는 생선을 입에 물고 생각했다.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국가 간의 지각변동은 일어날 수 있다.
그 사이에 리시스가 꽤 오래 황후로서 집권할 수도 있고.
하지만 아이는 부부 사이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리시스가 있었어도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살았다.
아이가 있든 없든 내내 잘 사는 부부가 있는가하면 갈라서는 부부도 많다.
언젠가, 키에르트와의 이별이 다가온 그 순간이 되면.
‘나는 아프지 않고 떠나갈 수 있을까?’
이렇게나 따뜻한 세상을 알아버렸는데.
다시 그 아프고 차가운 세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갈 수 있을까?
벌써부터 가슴이 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