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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키스, 밤, 아이 (90/153)


90. 키스, 밤, 아이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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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기억은 없지만 엄마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가 왜 에드린 왕 따위, 거지같은 남자와 관계를 맺었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누누이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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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시스, 언제 어디서든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해.’

엄마는 리시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비 오는 숲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뛰는 법, 독버섯 구분하는 법, 과녁에 표창 맞추는 법 등등.

리시스가 아직까지도 살면서 써먹는 지식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엄마도 못하는 건 리시스에게 가르쳐주지 못했다.

예를 들어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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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하니……, 우리 딸 나중에 요리 못해서 굶어 죽으면 어떡해.’

엄마는 리시스와 함께 만들어 낸 희대의 망작을 보며 늘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어찌저찌 잘 먹고 잘 살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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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 주어진 것 중에서 가장 나은 것을 고르며 살아가라고 했었어요.”

엄마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워낙 어릴 때이기도 하고, 그 후에 리시스가 겪어왔던 일들이 너무 파란만장해서 비교적 평화로운 순간의 기억이 흐릿해진 탓도 있었다.

기억 어딘가 깊은 곳에 깔려 있을 수는 있지만 크게 기억나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리시스는 주전부리를 입에 넣으며 문득 떠오른 과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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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엄마의 인생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단 이야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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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만큼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리시스는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게 엄마의 진짜 소원이었다면 망한 바람 아닐까.

엄마와 떨어진 이후 리시스가 무언가를 원한 대로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드린 성에 들어가서 구박 받으며 눈칫밥 얻어먹으며 살았던 것도, 여기저기 내돌려졌던 것도, 전선에 처박혔던 것도.

전선에서 악마가 되어가며 작전을 짰던 것도 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다 보니 선택했을 뿐이다.

키에르트와의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최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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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하나가 있긴 했네.’

키에르트와의 밤.

그것만큼은 리시스도 원해서 했다.

수많은 키스도 원했다.

아이는……, 생각해 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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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밤일까진 원하는데 아이는 원하지 않으면 너무 욕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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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리시스의 솔직한 물음에 키에르트는 마시던 물을 고스란히 토할 뻔했다.

하마터면 코로도 튀어나와 황제의 위엄을 크게 손상시킬 뻔한 사건이었다.

키에르트는 일단 위엄을 되찾은 뒤 침착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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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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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까지는 원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요.”

황후로 계속 살아간다면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되겠지만, 리시스 개인의 인생에서 아이가 필요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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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는 있지.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아이’ 자체를 원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군.”

후계자라면 응당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뿐이다.

하지만 나와 배우자의 피가 섞인 ‘아이’. 그것은 생각해 본 적 없다.

애초에 그만큼 배우자와 깊은 심리적 교류를 가지게 되는 관계도 키에르트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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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대가 혹시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면, 무조건 환영인데.”

이미 그건 키에르트의 행동이 증명했다.

단지 황실의 후계자를 잉태한 황후에 대한 환영이라기엔 너무 유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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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 없다는 건 아시잖아요.”

리시스는 괜히 몸이 꼬여 고개를 숙였다.

이미 볼장 다 본 사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갈 단계가 또 있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입이 한시라도 비면 큰일나는 것처럼 먹을 것을 날랐다.

진짜 아이라도 들어선 것처럼 리시스는 거절하지 않고 주는 족족 받아먹었다.

똑같은 음식도 키에르트의 손을 거치면 신기하게도 더 잘 들어갔다.

손맛이라는 것이 있다더니, 정말 있는 모양이다.

엄마는 요리 재주도 없고, 손맛도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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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마 생각이 하나 또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정말 엄마답지 않은 엄마였다.

늘 숲속을 쏘다니고, 맨날 마을 사람들과 만나 뭔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밤새도록 종이에 달라붙어 무언가를 썼다.

리시스가 심심해하면 문제를 내어 놓고 풀라고 하는 것이 놀아주는 일의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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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나 되게 풀어놓고 키웠네.’

리시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그 덕분에 엄마와의 숲속 오두막을 떠나서 이곳저곳 성을 전전하면서도 크게 외롭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에 대한 원한은 없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는 뭐 하던 사람인데 그런 곳에서 살고 있었을까?

뭐 하던 사람인데 왕의 아이를 가졌고, 맨날 그렇게 바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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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한 번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줄줄이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어릴 때는 뭐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자기 인생 사느라 바빠서 엄마 인생을 돌아볼 생각도 못 했다.

이미 엄마는 없고, 자신은 혼자가 되었으니 굳이 되돌아볼 이유가 없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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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린 왕은 엄마가 죽자마자 저를 성으로 데려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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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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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거슬렸던 거면 그냥 저만 빼앗아 갔어도 됐을 텐데, 왜 그때까지 방치했던 걸까요?”

에드린 왕에게 공주가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말 잘 듣는 공주가 필요했다면 엄마의 기억이 없을 때 데려다 키우는 편이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왜 굳이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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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노린 암살자도 있었죠, 그러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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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그대가 암살자를 다루는 법도 엄마에게 배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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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생각보다 엄청 강한 사람이었나……?”

리시스의 인생에서 엄마의 존재가 상기되었다.

리시스가 전선에서 보았던 일반적인 아낙네들은 책을 읽지도, 서류를 작성하지도 않았다.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토론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동네 사람들도 수상했다.

숲속이니 사냥꾼들이 모여 사는 것이 맞을 텐데, 사냥 다니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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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마을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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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은 생각이 안 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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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생각이 안 나네요.”

마을 밖을 오간다든가 누가 가르쳐줬으면 기억했을 텐데, 마을 안에만 처박혀 살다 보니 ‘어디어디 마을에서 왔어요.’라고 소개를 할 일이 없었다.

마을의 풍경은 기억이 나지만 지도에서 찍어보라면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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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머니의 신분이 높았던 건 아닐까 싶은데.”

키에르트가 리시스의 짤막한 기억들을 주워 모아 생각하다가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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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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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책을 가까이 하고, 명령에 익숙하고, 일반적인 가사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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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완전히 상관없는 사람이라 보이는 것도 있다.

리시스는 전혀 뜻밖의 접근에 놀랐다.

에드린 왕비며 왕자들에게 귀에 박히게 들은 말이 ‘천한 것’이었다.

자신들과는 혈통이 다르다며, 리시스를 천한 것 취급을 했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은 천한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았으니 엄마도 귀족일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키에르트의 말을 듣고 보니 엄마의 행동은 평민보다는 귀족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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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귀족…….’

사실 ‘천한 것’이라는 말은 크게 상처가 되지도 않았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봐도 왕실 식구들의 행동이 훨씬 천했다.

자신을 상처 입히려는 말인 것이 뻔히 보이니 상처가 될 수 없었다.

그보다는 엄마가 ‘왜’ 그러고 살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크게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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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였는지만이라도 알면 찾아가 보는 건데…….”

아직 엄마와 리시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찾아가야 자초지종을 듣고 알아낼 수 있다.

그렇다고 에드린 왕에게 ‘저 어디서 데려오셨어요?’ 하고 물을 수도 없는 일.

본의 아니게 비밀 아닌 출생의 비밀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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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찾아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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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요? 에드린 땅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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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갈 이유가 있나? 그대가 가고 싶으면 무조건 가는 거지.”

아이가 생기든 말든 키에르트의 맹목성에 큰 변화는 없을 모양이었다.

리시스는 그냥 우스갯소리라 생각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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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제가 갖고 싶다는 건 다 갖다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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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은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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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글쎄요. 당장은…….”

웃으며 가볍게 고민하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진지함에 차츰 입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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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보낸 다음 기분 좋아진 남자가 허세 떨며 하는 그런 말이 아니었구나.

키에르트는 황제였고, 진지한 사람이며, 농담이 잘 먹히지 않았다.

그걸 깜빡한 본인의 과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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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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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없어? 사람이면 누구나 욕망을 한다. 뭐든 말해 봐.”

리시스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에드린이 갖고 싶은데요.’라고 말하면 당장 ‘전쟁 시작.’ 하고 무표정하게 명령할 것 같았다.

리시스가 예전에 살던 마을에 가 보자는 말도 설마 그것이었나?!

원한다면 에드린을 통째로 가져다 줄 테니, 거기서 가고 싶은 마을을 골라서 가 보자, 뭐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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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생각보다 욕심이 많지는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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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래 보이더군. 시장에서도 기껏 고른 것이 농기구에, 예산이라도 펑펑 쓰나 싶었는데 다 공적인 업무에만 사용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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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황후니까요.”

그게 잘못된 건가?

리시스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서 더 헤맸다.

키에르트는 대체 뭐가 불만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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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면 황후답게 사치도 좀 해야지. 그래야 귀족들 앞에 면도 서고. 경제도 활성화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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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충분히 사치스럽게 꾸미고는 있는데요.”

국보로 몸을 휘감고 다니는데 이 이상의 사치가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리시스가 그걸 대여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대여를 했다고 쳐도, 대여를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지위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스는 완전히 키에르트의 의도를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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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도. 보는 것도. 경험하는 것도.”

먹는 것이야 키에르트가 늘 좋은 것만 챙겨 먹이고 있고, 보는 것도 쉬란의 진귀한 꽃을 원 없이 보고 있다.

경험 역시 리시스에겐 모든 것이 새롭고 좋았다.

꿈에 그리던 무도회도 여기서 처음 경험해 보았고, 데이트도 해 보았다.

심지어 호수를 아예 새로 단장해서 만든 낚시터에서 한 낚시 데이트.

거기에 자신과 키에르트, 단 두 사람만을 위한 궁까지 만들었는데.

이 이상 얼마큼 사치를 하란 소리지?

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완벽한 오답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뭐라도 하나 요구해 드려야 키에르트는 만족할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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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 보는 것, 경험하는 것.’

리시스는 뭐가 있지, 고민하며 키에르트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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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뭔가를 깨달았다.

이거, 태교할 때 많이 듣는 소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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