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배에 뭐가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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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배에 뭐가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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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배에 뭐가 들었나
2022.06.09.
“자. 이렇게 썼어.”
리시스는 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쪽지를 썼다.
이 자리에서 리시스를 의심할 사람은 제럴드 한 사람뿐이었지만 안전은 챙기고 또 챙겨서 나쁠 것이 없었다.
『로구안의 함정. 쉬란에 망명해.』
리시스가 쪽지에 적은 내용은 간결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렉싱턴 장군이라면 최전선의 소식을 접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정도만 말해도 군이 움직이는 이유와 배경에 대한 설명으로는 충분하다.
“내용의 신용도는 티티가 물어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야.”
티티는 리시스와 렉싱턴 장군만 따랐으니 출처에 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먼저 티티를 이용한 것은 렉싱턴 장군이었으니.
와작.
키에르트가 오늘도 습관처럼 호두를 뽀개 티티에게 내밀었다.
“삣!”
티티는 키에르트의 손에 답싹 달라붙어 호두를 옴뇸뇸 얻어먹었다.
“…….”
내용의 신용도…….
리시스는 호두에 정신이 팔려 그게 자신의 손인지 렉싱턴 장군의 손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 새앙다람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시스의 시선이고 뭐고 티티는 호두를 사랑했다.
“……폐하께서 까 주시는 호두가 유난히 맛있어서 그런가 봐.”
“……아무렴 그렇겠지요.”
“손맛은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당장 티티 말고 믿을 수 있는 전령이 없는지라 필사적으로 믿으려 노력을 해야 했다.
티티가 렉싱턴 장군에게 쪽지를 제대로 전달한다는 것까지는 믿는다 쳐도, 문제는 또 있었다.
“시간이 맞겠습니까.”
티티는 아무리 먼 구석구석이어도 수취자의 손바닥까지 정확하게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대신 말이나 새보다 느렸다.
렉싱턴 장군이 보낸 후 리시스에게 도착하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티티가 이동하는 동안 렉싱턴 장군이 군을 이끌고 전선에 나서버리면 어쩔 수 없이 대치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맞기를 바라야지.”
로구안도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선전포고 없이 당장 일을 터뜨린다 하더라도 준비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안 맞아도 이쪽은 이쪽대로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리시스는 쉬란만 상대해 왔기 때문에 로구안이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를 몰랐다.
로구안과 직접 부딪칠 일도 없었고 교류도 없던 나라였다.
그러나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알헨크가 쉬란의 내부사정과 리시스를 직접 만나기 위해 염탐해 온 것처럼, 리시스도 알헨크와의 짧은 만남으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
“만약에 에드린 왕이 협조를 하지 않아도 이쪽은 이쪽대로 훈련을 해야 할 거야. 어쨌든 로구안이 쉬란을 노리고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지금껏 로구안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건, 로구안이 아무리 강해졌다한들 쉬란을 건드리는 것은 그쪽에도 타격이 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렇게까지 해서 쉬란에게 덤벼들 이유가 있을까.
지금은 이유 불문,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무조건 경계를 해야 했다.
“에드린 군에 관한 부분은 내가 대비할 수 있으니 나머지 로구안에 대한…….”
아무래도 리시스만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다보니 회의는 자연히 리시스가 주도하게 되었다.
말해줄 것이 많다 보니 리시스의 입이 바삐 움직였다.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부부궁을 나선 참이었다.
말을 많이 하니 자연히 배가 고파졌다.
꼬르륵…….
말을 하던 도중 리시스의 배가 울었다.
회의 중에 배가 고팠던 적이야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에드린 군에 있었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다.
“……전쟁 얘기하니 배 속 친구가 돌아왔나…….”
그다지 반갑지 않은 친구의 귀환이었다.
전장에서는 많이 먹는 것도 문제였다.
리시스는 반갑지 않은 친구의 존재감에 배를 퉁퉁 두드렸다.
배고픔을 가라앉히기 위해 습관적으로 했던 행동이었다.
정말, 진짜로, 아무 의도도 없었다.
“……!”
“!”
“헉……!”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리시스의 지위도 달라졌다.
아무 생각 없는 행동 하나에도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
“……응?”
리시스는 자신을 향한 경악의 눈빛을 뒤늦게 느끼고는 쭈뼛쭈뼛 눈을 굴렸다.
“그, 설마…….”
“……어?”
그나마 친한 미하엘이 심장이 떨어져나간 표정으로 리시스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리시스는 미하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내렸다.
납작한 자신의 배, 그리고 그 배 위에 얹힌 자신의 손이 보였다.
그 자세가 무언가를 암시할 수 있음을, 리시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니야.”
“그, 그렇습니까.”
제럴드는 입을 뗐다가 붙였다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조심스레 한 마디를 했다.
“경……하 드리……어야 하는 상……황이 맞습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리시스는 딱 잘라 부정했다.
아니라고.
바로 어제 일이 일어났는데 오늘 당장 애가 생기는 기적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그러나 리시스도 내심 놀랐다.
아이라니.
키에르트와 밤을 보낸 것은 그럴 의도가 일절 없었다.
그냥.
키에르트를 육체적으로나마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더 깊숙이 이해하고 싶어서.
말로는 할 수 없는 부분까지 나누는 대화가 하고 싶어서.
남녀간의 그런 대화의 결과물로 아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말았다.
‘아이.’
아이에 관해서는 좋다 싫다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과 연관 짓게 될지조차 몰랐던 부분이었다.
갑작스럽게 그런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얼떨떨했다.
물론 당장 아이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치만…….”
“그래도…….”
황제 부부 사이의 은밀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못하는 미하엘과 제럴드는 리시스의 부정에도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혹시나 자신들이 리시스의 마음에 불편한 발언을 하지는 않았는지, 놀라게 할 만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계속 되짚게 되었다.
“폐하, 아니라고 말씀 좀…….”
리시스는 자신이 말을 해봤자 안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키에르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씀을…….”
해 주셔야 하는데.
키에르트도 다른 두 남자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아니라니까요. 알만큼 아는 분이 왜 그러세요.”
지식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리시스와 마찬가지로 키에르트도 책으로 얻은 지식은 충분했다.
단 하룻밤만에 아이가 생길 확률은 극히 낮고, 생겼다 하더라도 다음날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 알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계신 건데.
“만약에라는 것도 있을 수 있잖나.”
“……아니, 그.”
리시스는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칠 수는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배고프다고 꼬륵거린 것이 태동으로 바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때 마침 배 속의 허기짐이 정신 차리라는 듯 다시 한번 존재감을 드러냈다.
꼬륵.
키에르트의 눈빛이 희번득였다.
“당장 먹을 것을 들여라!”
“숲에 가서 사냥이라도 해 올까요?! 신선한 고기가……!”
“저는 풀이라도 뜯어 오겠습니다! 신선한 풀……!”
키에르트의 명령에 두 남자들마저 동조해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니……. 진정들 하고…….”
“따로 먹고 싶은 게 있나?”
리시스의 한마디에 키에르트가 목이 부러질 듯 돌아보며 전투적으로 물었다.
오해는 둘째치고 머리를 많이 굴렸더니 출출했다.
뭔가 먹긴 먹어야 했다.
“아예 식사를 하기는 좀 그렇고……, 간단하게 단 것? 주전부리 정도면 될 것 같아요.”
“황후 폐하께서 주전부리가 필요하시단다!”
미하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세상의 모든 주전부리를 다 가져다 바칠 듯한 태도였다.
곁에서 그 여정에 동참할 것 같은 제럴드와…….
몹시 동의한다는 듯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키에르트.
“하핫……. 하하핫.”
리시스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웃고 말았다.
***
예상은 했지만 눈앞에는 주전부리의 산이 쌓였다.
요리사는 식사 때도 아닌데 이런 주전부리를 산처럼 쌓아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안 궁금하다.
“……폐하, 과해요.”
물론 굶는 것보다는 좋지만 다 먹지도 못할 것을 쌓아놓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다.
리시스는 제발 그만하라는 의미로 솔직하게 평했다.
그러자 키에르트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꼈다.
“……아니, 폐하가 과하다는 말은 아니고, 음식의 ‘양’이 과하다는 말이에요.”
“양도 성의를 표현하는 방법의 하나다.”
“그건 뭐든 남아도는 쉬란에서나 할 수 있는 표현이겠죠.”
가만 보면 키에르트는 ‘적당히’라는 것을 은근히 몰랐다.
쉬란 사람의 특징인가?
뭐든 남아도는 쉬란에서 나고 자라면 이렇게 되는 건가, 리시스는 혼자만의 학설을 머릿속으로 펼쳤다.
“……그런 면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키에르트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쉬란은 정말 풍요로운 나라였다.
북쪽의 에드린은 겨울이 길어 만성적인 식량난에 시달렸다.
남쪽은 일조량은 많지만 언제나 가물어 배출하는 식량이 한정적이었다.
쉬란은 따뜻하고, 강수량도 적당하고, 여름과 겨울이 다 있는 나라라 모든 종류의 작물이 다 잘 경작되었다.
동물도 물론 잘 자랐다.
“엄마도 저를 가졌을 때 풍요로웠을까요.”
분위기가 그렇게 잡혀서 그럴까.
문득 엄마가 생각이 났다.
자신도 어쨌든 엄마를 통해 태어난 존재였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엄마는 그냥 엄마였고, 엄마니까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이 엄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리시스의 말에 키에르트의 들떴던 표정이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렇지 않았을까?”
“왜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말투에 지나친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풍요롭지 않았다면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가진 아이를 낳지 못하지 않았을까.”
“……예?”
리시스는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진지했다.
“그대는 모자람이 아무것도 없지 않나. 그렇다면 그대를 가졌을 때 모든 것이 완벽했겠지.”
“……?”
가끔가다가 키에르트는 사람의 상식으로는 쫓아갈 수 없는 부분까지 혼자 달려가고는 했다.
리시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순간들이었다.
“제가 모자람이 어떻게 없어요?”
“예쁘지, 귀엽지, 똑똑하지, 튼튼하지, 성격도 밝지, 그러면서 진중하기도 하지. 이 정도면 다 가진 것 아닌가?”
“…….”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예, 물론입니다, 저는 그렇게 완벽한 사람입니다, 하는 말도 차마 나오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 확실한 탓이었다.
“대신 저는 그걸 못 가졌잖아요.”
제대로 된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