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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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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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집착
2022.06.05.
“그대도 나와 동행을 하는 것이 좋겠어.”
“네, 그럴게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제안에 적극 동의했다.
에드린 왕이 로구안의 꼬임에 홀랑 넘어간다는 전제를 두면, 가장 거슬리는 것은 리시스의 존재가 되었다.
정략결혼을 취소할 방법을 찾느니 리시스를 없애버리는 쪽이 편할 것이다.
암살 시도가 지금까지 없었던 것도 아니니 더욱 방심할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가장 마음 편한 해결 방법으로, 어디를 가나 리시스와 동행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럼, 일정은 뭐부터인가요?”
느닷없는 부부궁 행으로 인해 그간 황제의 모든 일정은 줄줄이 취소가 되었다.
밀린 일정이 한가득일 것이다.
리시스는 일부 책임감을 느끼고 키에르트를 재촉했다.
“우선은 황실군, 친위대와 함께 군 회의를 해야겠지.”
로구안의 문제가 터졌으니 그것부터다.
리시스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그럼 준비를 하러…….”
황후궁에 잠깐 들렀다가 합류한다고 말을 하려 했는데, 키에르트가 빗을 들고 있었다.
“……?”
“준비도 함께해야지.”
“……어……. ……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전에는 뭘 모르니 이 정도면 괜찮다 생각하고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
하지만 가넷의 솜씨를 맛본 뒤에는 눈이 높아져 버렸다.
오늘은 보통 자리도 아니고 황제군의 대장도 만나는 자리다.
친위대 대장인 미하엘이야 어느 정도는 편하게 봐도 될 만큼의 친분이 생겼다지만 황제군 대장은 서로 격식을 차려야 했다.
“가넷을 이리로 부르는 건 어떨까요?”
“부부궁의 원칙을 깨면서까지?”
“그럼 제가 현관에 앉고 가넷이 현관 밖에서…….”
몹시 체통이 없는 모습이 되겠다.
리시스는 말을 중단했다.
키에르트는 이미 리시스의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잘 부탁드려요.”
이미 황제 폐하께서 의욕을 보이셨다.
리시스는 자포자기하듯 머리카락을 맡겼다.
키에르트는 부드럽게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빗질을 시작했다.
“음?”
워낙 키에르트의 손길이 부드럽기는 했다.
하지만 능숙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키에르트가 어디 가서 여자 머리카락을 만져 보았겠는가.
그런데 오늘, 키에르트의 빗질에서 전문가의 향취가 느껴졌다.
“오늘은 정례회의니 단정하고 위엄 있는 머리가 좋겠지.”
키에르트는 심지어 상황을 고려하며 머리카락을 땋아올리기까지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폐하? 어디 가서 연습이라도 하고 오셨어요?”
“했지. 이런 일이 또 생기진 않을까 싶어서.”
준비성이 굉장한 황제 폐하셨다.
리시스는 거울 속에서 착착 완성되어가는 자신의 차림을 보며 익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가넷한테 배우셨어요?”
“과외비가 꽤 비싸더군.”
어느 틈에.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철두철미함과 준비성에 혀를 내둘렀다.
키에르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리시스의 머리카락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전에 성기게 꾸몄던 과거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늘은 키에르트의 설욕전이었다.
‘의외로 못 참는 게 많으시네…….’
지고도 덤덤, 감정을 건드려도 덤덤, 무슨 말을 해도 덤덤.
그러나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없을 뿐이었다.
옆에서 계속 지켜보니 키에르트도 참지 못하는 것이 꽤 많았다.
지는 것은 겸허하게 받아들이지만 승부욕에 불이 붙으면 못 참는다.
자신의 것을 침해당하는 것도 못 참는다.
한 번 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결국은 해낼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포기하지 않은 건 정말 의외였다.
“제 머리에 그렇게 집착하실 줄은 몰랐어요.”
“……집착, 인가……?”
키에르트는 머리카락에 집중하다가 한 박자 느리게 되물었다.
스스로도 이것이 집착인지 모르고 있다가 리시스의 말에 뒤늦게 깨달은 투였다.
“그렇죠. 머리카락은 그냥 머리에 붙은 털일 뿐인데 특별히 신경이 쓰인다거나, 특별히 취급하게 되면 집착 아닐까요?”
“……음. 그렇군. 나는 그대의 머리카락에 집착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렇게 듣고 보니 집착이라는 것이 딱히 나쁜 것 같지도 않았다.
키에르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계속 만지고 싶고, 쳐다보고 싶고. 다른 사람이 손을 대면 기분이 나빠지고. 이런 게 집착이 맞지?”
“용례가 쉬란과 에드린이 다르지만 않다면……, 아마도요?”
리시스도 가볍게 말했을 뿐, 집착이라는 단어를 크게 신경써 본 적은 없었다.
키에르트가 꼬치꼬치 물으니 덩달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신이 집착했던 것은 뭐가 있더라.
어릴 때부터 집착하는 법보다는 놓는 법을 더 많이 배워야 했던 리시스는 자신이 집착했던 것을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집착이 아주 쉬운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그대의 동그란 눈에도 집착하고, 조그만 입술에도 집착하고, 그대와의 승부에도 집착하는 것 같군.”
“…….”
“허멀 후작의 말이 맞았던 것 같아. 할 수만 있으면 아예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고 싶어.”
리시스의 얼굴이 익었다.
괜히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제대로 당했다.
***
“황제 폐하를 뵙……!”
황실군 대장, 제럴드는 한 번도 결례라는 것을 해 본 역사가 없었다.
눈앞에 벼락이 떨어져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앉지.”
제럴드가 인사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은 신경쓰지 않은 키에르트가 먼저 상석에 자리했다.
그 양 옆으로 각각 친위대 대장, 미하엘과 제럴드의 자리가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이, 키에르트의 바로 옆자리가 하나 더 마련되었다.
사뿐한 걸음으로 들어온 리시스가 당당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황후 폐하도 오셨습니까.”
“……!”
이번엔 미하엘의 반응에 제럴드는 다시 한번 놀랐다.
왜, 뭔데, 자신만 모르는 이 분위기는.
제럴드도 지난 연회에서 리시스의 위용을 똑똑히 보았다.
무엇보다 에드린 국왕을 있는 한껏 제대로 모욕한 부분에서는 통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적국의 공주신데!’
자신도 모르게 생각에 존칭이 붙어버린 것은 의식하지 못한 제럴드가 안절부절못하며 리시스를 흘끔거렸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반가워, 제럴드 대장.”
리시스는 제럴드의 인사를 자연스럽게 받았다.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제럴드 한 사람뿐이었다.
“저……, 그런데, 오늘 회의에 황후 폐하는 어찌…….”
결국 궁금증과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제럴드가 물었다.
“오늘 안건에는 황후의 의견도 중요해서 동석하게 되었다.”
“의견……, 입니까. 그럼 작전……은.”
“작전도 도와주면 고맙고.”
리시스의 작전 능력이 얼마나 훌륭한지 제럴드는 잘 알지 못했다.
에드린과의 전투에 황실군은 투입되지 않았다.
무아렌 강 유역에는 전용 상비군이 따로 있었고, 제럴드는 수도방위군을 위주로 운용했다.
에드린과의 전투에 주로 투입된 것은 상비군과 황제의 친위대였다.
물론 황실군 전체를 통괄하는 입장이니 전선의 소식은 들어 알았다.
그 와중에 리시스의 이름도 종종 오르내렸으니 주요 인물이라는 것 정도는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기만 한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는 컸다.
아무리 연회에서 신묘한 수를 써서 모의전투에 이겼다고는 하나, 실제로 뒤통수를 맞고 몇 번이고 죽을 뻔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그 충격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 폐하의 작전……, 말입니까. 저, 그런데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황후 폐하께서 제대로 된 작전을 구사하실 수 있는지 염려가 됩니다.”
군에 관련된 문제는 사교계의 우아한 대화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다.
제럴드는 그냥 대놓고 물었다.
여차하면 내 목숨도 걸린 문젠데 대충 넘어갈 수 없었다.
“어떤 점에서?”
다행히 리시스는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에드린 군에 적을 두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쉬란의 편에서 싸우실 수 있겠습니까.”
“에드린이랑 싸우게 되면 회유할 거야.”
“되겠습니까?”
“되게 해야지. 그리고, 일차적으로 싸우게 될 쪽은 로구안이 될 확률이 크니까.”
리시스는 소풍 나온 소녀처럼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나 생긋 웃는 얼굴에 살기어린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제럴드는 놓치지 않았다.
“로구안 놈들은 싹 쓸어버려야지.”
“…….”
“하지만 그건 오늘 당장 얘기할 건 아니고……. 오늘은 에드린 얘기를 하려는 이유로 동석한 거야.”
오늘 회의를 시작하기 전, 이미 안건에 대해서는 정리가 되어 있었다.
부부궁에 처박힌 황제에게 새를 날릴 정도의 사안이었다.
새를 날리기 전 온갖 정보를 취합한 것이 두 사람이다.
전후관계를 따져봤을 때, 로구안과 에드린이 손을 잡고 쉬란을 공격해 올 가능성이 높다는 것.
에드린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로구안은 미친놈들인 것 같다는 것 정도로 정리되는 정보들이었다.
이미 전쟁의 발발 가능성에 대한 토론은 무의미했다.
“에드린에도 군대가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왕실군과 무아렌 지역의 경비군으로 나뉜다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왕실군은 수도를 절대 떠나지 않아. 왕만 지키거든. 대우도 좋고, 충성심도 강해.”
아마 왕실군과 맞부딪치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군대는 사실상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은 잔챙이들이었다.
그동안 쉬란을 상대로 그런 전과를 올린 것이 기적이라 여기게 될 만큼.
그래서 렉싱턴 장군과 리시스가 중요했다.
모자란 병력을 끌어올린 것은 사실상 이 두 사람이었다.
“렉싱턴 장군님마저 군을 떠난다면, 사실상 쉬란에는 군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거야.”
“군을 떠나게 만드는 방법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닙니까?”
에드린 군이 앞에 나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쪽 군대를 무력화시켜놓는 것은 심적으가도 편해진다.
하지만 무슨 수로?
리시스는 기다렸다는 듯 비장의 수단을 꺼내놓았다.
“삑?”
“……뭡니까?”
렉싱턴 장군은 눈앞에 놓인 처음 보는 생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청, 귀여웠다.
티티는 자신을 귀여워하는 눈빛을 알아차리고 더 귀여운 짓을 했다.
“삐잉.”
“……귀, 귀엽습니다만.”
이 귀여움으로 꼬드겨 보자는 건가?
“얘가 렉싱턴 장군님과 나 사이에 연락을 주고받는 연락책이야.”
“…….”
갑자기 귀여움이 악마의 사기로 탈바꿈했다.
어째 주인도 똑같이 귀여운 외모로 무시무시한 작전을 휘두르더니.
그 주인이 데리고 온 짐승마저도 속성이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