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다른 남자 생각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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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다른 남자 생각하지 마
2022.06.02.
에드린도 이득이 있어야 움직일 것이다.
로구안과 손잡고 쉬란을 치면 에드린엔……, 이득이 많지. 정말 많지.
“저 하나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제가 정보라도 좀 빼돌려서 도움되는 척이라도 했어야 했을까요.”
자신이 공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건 리시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원으로서라도 가치가 있었어야 했을까.
아니면 키에르트를 뒤흔드는 요녀 역할이라도.
“에드린 왕이 그렇게까지 이성적인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키에르트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지적했다.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확신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았을 때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편은 아닌 듯 보였다.
“아.”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지적에 정신을 차렸다.
순간적으로 너무 긴장해서 그 중요한 사실을 깜빡했다.
“맞아요. 괜한 자책을 했네.”
리시스가 얼마나 도움이 됐었든 말든, 에드린 왕은 그때그때의 기분으로 결정을 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했어도 눈빛이 불손하다는 이유만으로 내치는 사람이 에드린 왕이다.
“알헨크가 과연 에드린 왕에게 뭐라고 혓바닥을 놀렸을까요?”
“앞으로 에드린 왕의 움직임을 봐야 알겠지.”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쪽에서는 양쪽이 가진 패를 따져보며 유추하는 것이 한계였다.
“제발 알헨크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좋겠네요.”
에드린 왕은 일관적으로 제멋대로라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알헨크가 변수였다.
로구안의 왕자이면서 그런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어떻게 왕자가 그럴 수 있지?
리시스는 가지고 있는 지식에 비해 경험이 부족했다.
그래서 왕가의 사람은 다 에드린 왕족처럼 개차반이거나 키에르트처럼 우아한 줄 알았다.
둘 다 일반적인 왕족, 황족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알헨크는 달랐다.
왕족이라기보다는 시정잡배에 가까웠고, 행동방식도 그랬다.
“어떻게 왕자면서 그렇게 살 수 있죠?”
“사람마다 다르겠지. 로구안은 왕자가 워낙 많아서 내부적으로도 경쟁이 심하니 더욱 그럴 수도 있고.”
알헨크의 타고난 성격 탓도 클 것이다.
“아아……. 로구안은 제가 신경 쓸 쪽이 아니라서 아예 정보가 없었어요. 이제 좀 알아봐야겠네요.”
정보가 있어야 대책도 세울 수 있다.
뭐부터 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드디어 방향을 찾았다.
하지만 리시스는 정보책이 없었다.
“……폐하, 정보 좀 주시면 안 돼요?”
가장 가까운 정보책은 키에르트였다.
키에르트를 털면 쉬란에 돌아다니는 로구안의 모든 정보를 다 털어서 모은 만큼의 정보가 나올 것이다.
리시스는 효과적인 정보수집 방법을 알았다.
“흐음.”
“안…… 돼요?”
리시스는 살살 눈치를 보며 눈웃음을 쳤다.
돈도 막 주는 남편이니 정보도 잘 주지 않을까?
하지만 리시스의 오산이었다.
“안 될 것 같은데.”
“……앗.”
역시 나라가 걸린 문제에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거구나.
리시스는 더 설득해 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나 키에르트가 바란 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대가 다른 남자 생각을 자꾸 하는 게 거슬려서 싫어.”
“……예……?”
남자요?
리시스는 멍하니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알헨크가 어떻게 남자…….”
“이름도 말하지 마.”
“읍.”
키에르트는 불타는 질투로 리시스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리시스는 기꺼이 키에르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알헨크의 본명은 절대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분명히 가명일 것이 분명한 이름조차도 이렇게 불쾌해 하는데 본명이면 얼마나 싫어할까.
“쿡쿡쿡…….”
혼자 생각하던 리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이 닿은 채 터져버린 웃음에 키에르트가 미간을 모으고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아뇨, 그냥.”
“그냥?”
웃어 넘어갈 줄 알았는데 키에르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러다 저 때문에 전쟁 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농담이었다.
진짜, 진심으로, 정말, 농담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농담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키에르트의 얼굴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
리시스는 땀이 났다.
“……설마 아니죠?”
“…….”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왜 아닐 거라 생각해?
눈빛이 그렇게 말했다.
죽 났던 리시스의 땀이 줄줄줄 흘렀다.
“……아니죠?”
“확률을 한 번 계산해 볼까.”
키에르트는 끝내 아니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땀이 강을 이룰 판이 되었지만 리시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거기서 맞는데, 라는 대답을 들으면 듣는 대로 문제였다.
그냥 아무 일 없던 듯이 조용히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변덕스러운 에드린 왕이랑 싸우게 되면 키에르트도 마찬가지로 변덕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우선 ‘그 로구안 놈’은 쉬란을 목적으로 하고 있긴 한 걸까요?”
리시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어느 쪽이든 집어삼키기 쉬운 쪽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까.”
키에르트는 조용히 넘어가 주었다.
좋아, ‘그 로구안 놈’은 합격이다.
알헨크의 호칭을 정한 리시스는 조금 더 편하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 쉬란이 더 까다로워 보이면 에드린으로 목표를 바꿀 수도 있다는 소리네요?”
“지금까지 로구안이 침략했던 나라들을 보면 약한 순서였어. 결국은 몽땅 잡아먹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닐까 싶은데.”
“아…….”
그럼 언젠가는 부딪치게 된다는 결론이 난다.
리시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렉싱턴 장군이 다시 전장에 서는 것만큼은 피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든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럼 로구안은 일단 홀랑 다 잡아먹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칠게요.”
그럼 에드린 왕의 선택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다.
그 부분은 리시스가 나설 수 있었다.
“에드린 왕은 ‘공짜다’라는 말만 들으면 흔들릴 거예요.”
“……공짜?”
명예나, 자존심이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던 키에르트는 예상하지 못한 단어에 귀를 의심했다.
“네. 공짜 더럽게 밝혀요.”
리시스는 단 한 틈의 주저함도 없이 확신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는 공포에 얼어붙었던 머리가 깨어나기 시작하니 냉정한 판단도 섰다.
“로구안이 자기네가 알아서 다 하겠다고 하면서 무아렌 강 하나만 공짜로 주겠다고 하면 바로 넘어갈 걸요.”
무아렌 강을 차지하면 일대의 비옥한 땅이 다 에드린의 것이 된다.
에드린으로서는 욕심내지 않을 수 없는 장소였다.
대륙 전체를 먹어버리려는 로구안의 입장에서는 준다 말하는 게 어려울 리 없다.
쉬란을 친 후 에드린까지 겸사겸사 차지하면 어차피 로구안의 것이 될 테니까.
에드린 왕이 그 뒤까지 생각할 리가 없다.
자신은 왕이고, 모든 것이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로구안 놈이 그 정도 머리도 없진 않을 것 같고.”
인정하기 싫지만 두 사람도 정체를 중간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구안 놈은 치밀했고, 예상할 수 없었다.
그 정도의 놈이 에드린 왕 하나 흔들기는 쉬울 것이다.
결국 전쟁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시스는 좌절하며 엎어졌다.
“……아. 이제 전쟁은 안 날 줄 알았는데.”
“싸움은 나만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황태자로 태어나 황제로 살아오는 동안 많은 도전을 감수해야 했던 키에르트는 차분하게 리시스를 위로했다.
리시스의 속이 말이 아닌 것은 그도 알았다.
전쟁을 막아보려고 이 먼 적국에 결혼까지 하러 온 사람이 아닌가.
안다.
알지만.
그래도 속이 뒤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후회하나?”
결국 참지 못하고 속에 응어리지는 말을 터뜨리고 말았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뭘요? 그 로구안 놈 살려 내보낸 거요?”
“그건 나도 후회해.”
그냥 기분대로 확 죽여버렸으면 이런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대는 전쟁을 막고 싶어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됐던 거잖아.”
“아뇨. 결혼은 후회 안 해요.”
“그래?”
리시스는 단박에 부정했다.
키에르트가 슬쩍 솟구치려는 입꼬리를 단속했다.
그래도 후회되지는 않을 만큼의 결혼생활이라 다행…….
“네, 당시에는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어요. 그건 다시 생각해도 맞아요. 지금도 그 생각은 그대로예요.”
“최선……?”
키에르트가 생각하는 결혼생활의 만족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의 단어가 흘러나왔다.
“계속 전쟁이 유지됐으면 아마 제가 이기긴 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쉬란에 와서 보니까 무아렌 강 하나 차지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구나 싶어요. 무아렌 강을 빼앗겼으면 폐하도 가만히 있지 않으셨을 테고, 진짜 대대적인 전쟁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죠. 렉싱턴 장군님도 부상을 당한 상황이었는데 지원도 제대로 못 받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제 목이 날아갔을 거란 예측이 되네요.”
참 똑 부러지는 예측이고, 완벽하네 엇나간 답이었다.
키에르트는 말을 잃고 리시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 예측이 틀렸나요?”
“인생이 늘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그것까지 포함시키면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음.”
리시스는 눈치껏 키에르트가 바라는 답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뭘 놓치고 있었던 거지?
하지만 당장 리시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보면 떠오르진 않을까?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붙였다.
“!”
키에르트가 움찔하며 리시스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뿌루퉁해 있지만 자신을 향한 시선에 온기는 그대로다.
“……아.”
그제야 리시스는 완벽하게 간과하고 있던 부분을 떠올렸다.
키에르트와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기대가 없었다.
사지 온전하게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여겼다.
그런데 늘 그 이상이었다.
오히려 리시스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고,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만약에요.”
“응.”
“제가 포로로 잡혔다든가……, 폐하가 포로로 잡혀 왔다든가. 아니면 밤에 잠깐 나갔다가 정찰 중인 폐하랑 마주쳤다든가. 우연히 마주친 일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전쟁이 또 다른 방식으로 끝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어떻게?”
리시스는 대답 대신 키에르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소리 나게 붙였다 떼었다.
키에르트가 미처 어떻게 대처할 수 없는 완벽한 기습이었다.
기습에 성공한 리시스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우리 둘만 아는 동맹을 몰래 맺게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남녀관계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리시스는 경험으로 배웠다.
정략결혼으로 시작했어도 결국 이 이상이 없는 단단한 ‘동맹’이 된 것처럼.
“동맹…….”
키에르트는 키스에 웃고, 동맹에 혼란스러워졌다.
자신들의 관계가 동맹이 맞기는 한데,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