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키스는 그대에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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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키스는 그대에게만
2022.05.22.
리시스는 놀랐다.
이름을 불린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리시스’로서 살았던 적은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사실 엄마 외에 리시스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없었다.
엄마 외의 사람에게 리시스는 ‘공주님’이었다.
공주님, 공주.
왕실 사람들에겐 야, 너.
“……네……?”
그래서 키에르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때, 낯설었다.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겨우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멍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리시스.”
키에르트는 다시 한번 리시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부르면 부를수록 그 이름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황후가 아니라 리시스를 원한다.
그걸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왜요?”
겨우 리시스가 꺼낸 대답은 질문이었다.
“왜라니?”
“왜 이름을 부르세요?”
“음.”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이었다.
하지만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질문 하나도 허투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성의 있는 답변을 하고 싶었다.
“황후와는 이제 꽤 친해진 것 같아서. 아닌가?”
“음…….”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면 충분히 친하다 할 수 있었다.
아니, 역대 황제 부부들 중에서는 가장 친한 것 아닐까?
비록 초야를 제대로 치르지는 않았지만 황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만 치면 최고일 것이다.
키에르트의 친절도 그냥 형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리시스 역시 키에르트를 대할 때 내 편처럼 편히 여겼다.
이 정도면 친한 거지.
맞아, 친한 거다.
“네, 친하죠.”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키에르트도 미소로 응했다.
“그렇지? 그런데 나는 이제 ‘리시스’와도 친해지고 싶어.”
“……응?”
리시스의 머리가 복잡하게 굴러갔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듯도 했다.
황제가 아닌 키에르트를 상상할 수 없듯이, 리시스도 자신의 모든 지위를 빼놓고 스스로를 상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가 리시스인데요?”
“그럼 그대가 황후가 아니게 되어도 나와 이렇게 지내 줄 건가?”
“……아마……도요?”
“내가 그대의 남편이 아니게 되어도?”
“……아.”
이건 살짝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남편이 아닌 남자와 이렇게 온몸으로 끌어안고 입술을 맞대는 건 안 되지 않을까?
“……왜 거기서 고민을 하는데.”
잘 흘러가던 분위기가 한 발 삐끗했다.
키에르트가 바로 세모눈을 뜨며 이마를 콩 박았다.
리시스는 낑 놀라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아니, 그게.”
“그럼 나와 키스하는 것도 내가 ‘남편’이라서 허락하고 있는 건가?”
오기가 붙은 키에르트가 바싹 추궁했다.
“어차피 지금은 남편이 폐하신데요…….”
“그럼 다른 놈이 남편이 되면, 아니, 아니야. 이건 상상도 하기 싫어.”
“저도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키에르트와의 결혼이 언제까지고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쉬란에 올 때부터 각오하고 있던 부분이다.
그러나 키에르트가 아닌 다른 남자와 부부관계가 된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키에르트와 만약에 이혼을 한다 해도 다음 결혼이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다.
한 번 결혼을 했던 여자는 정략결혼 시장에서 값어치가 확 떨어진다.
결혼을 할 때 드는 비용과 정략결혼에서 얻을 수 있는 값어치를 비교했을 때 비용이 더 들 수도 있었다.
현재 국제 정황상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략결혼 상대는 없었다.
당연히 이혼 후에는 혼자 어딘가 시골 깊숙이 처박혀 사는 걸 상상했다.
“……그래?”
대답뿐만 아니라 얼굴 표정까지 혐오가 묻어난 덕분에 키에르트의 기분이 풀렸다.
여기서 어쩔 수 없죠, 라고 했으면 정말 무슨 일을 벌였을지 모른다.
공주를 함부로 굴리지 말라며 동맹 깨고 먼저 에드린에 쳐들어갔을 수도 있고(사실 리시스가 이쪽에 있는 한 에드린을 이길 자신이 있기도 하다), 주변 모든 나라들을 쳐부수고 들어가 탐내지 말라고 협박했을 수도 있다.
“그럼 키스는 평생 나랑만 하는 건가?”
“……어…….”
‘평생’?
평생이라는 말이 붙으니 어쩐지 가볍게 하던 키스도 무겁게 느껴졌다.
“‘어’라니?”
“아니, 그…….”
득달같이 달라붙은 키에르트의 추궁에 리시스는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키에르트는 그것으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리시스의 옆이마, 뺨, 귓불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평생 키스는 그대와만 할 생각인데.”
“그, 그래도……. 만약에 제가 황후 자리에서 내려가고, 새로 황후를 맞이하셔야 하면요.”
“그럴 일은 없지만. 그래도.”
리시스는 그제야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장난스럽게 입술을 눌렀지만 키에르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래도 키스만큼은 그대 이외의 사람과는 하지 않을 거야.”
리시스는 깊게 숨을 쉬지도 못했다.
왜?
왜 나에게?
“왜요?”
다시 ‘왜’를 물어보게 되었다.
‘리시스’를 가진다고 키에르트에게 큰 이익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공주가 아닌, 황후가 아닌 리시스는 빈털터리였다.
정말 이유가 궁금했다.
“‘왜’라…….”
키에르트는 좀처럼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리시스를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자신은 리시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리시스가 사라진다고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그런 상황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키에르트는 심술궂게 리시스의 목을 물었다.
“앗.”
리시스가 깜짝 놀라 강아지 같은 신음을 흘렸다.
어깨를 움츠리며 목을 피하려 하기에, 이번에는 목을 가리는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아. 왜…….”
“그냥.”
키에르트는 어깨에 입술을 누른 채 중얼거렸다.
그래, ‘왜’가 왜 중요한가.
그저 그러고 싶다는 것만이 이유였다.
“그대를 보면 입을 맞추고 싶어.”
“…….”
“참을 수가 없어.”
“…….”
“참지 않아도 되나?”
리시스의 숨결이 달아올랐다.
숨이 차지만 않았어도, 얼굴이 붉어지지만 않았어도, 막았을 거다.
그러나 리시스 역시 참고 싶지 않았다.
사실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은 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내 남자. 내 남편에게.
리시스가 먼저 키에르트의 두 뺨을 감싸고 입술을 마주댔다.
“……참지 않으셔도 돼요.”
“……!”
“저도 참지 않을 거예요.”
한 순간의 충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열기를 놓쳐버렸을 때 아쉬움이 더 클 것 같았다.
한순간의 충동이라 할지라도.
리시스는 그 이상을 키에르트와 함께하고 싶었다.
“견딜 수 있어요.”
“……응?”
키에르트는 문득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등장에 귀를 의심했다.
온전히 리시스도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않겠다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뭘 견뎌?
키에르트의 벙벙한 눈빛에 리시스는 각오가 된 듯 비장하게 선언했다.
“폐하가 묶어놓고 때리셔도 참아볼게요.”
“……뭐? 왜 그대를 묶고 때려?”
“보통 그러던데…….”
“……?”
무슨 소리야.
키에르트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어디의 보통?”
키에르트의 혼란을 읽은 리시스도 덩달아 혼란스러워졌다.
분명히 자신이 읽은 빨간 서가의 책들에서는 그랬는데?
그래서 그걸 읽고 키에르트와의 합궁에 엄청나게 겁을 먹었었던 것이다.
“왜, 그……. 책에선 그러던데요.”
“…….”
키에르트가 읽은 책과 리시스가 읽은 책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두 책 모두 그대로 현실에 적용시키기에는 무리한 내용들이 많았다. 현실에 없으니 상상으로라도 만족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이야기니까.
키에르트도 분홍색 서가의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붉은 서가의 책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야. 그거 보통 아니야.”
이제야말로 리시스의 몹시 잘못된 성관념을 뜯어고칠 때였다.
“아니에요?”
모처럼 각오를 다지고 있었는데, 아니라니.
리시스는 얼떨떨했다.
“아닐 거야.”
키에르트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오늘 이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단 한 번뿐인 기회였다.
최선을 다해 리시스에게 최고의 경험을 주고 싶었다.
평생을 기억할 만한 좋은 경험을 줄 것이다.
물론, 자신은 그 어떤 경험이더라도 최고일 것이다.
키에르트는 정중하고 섬세하게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핀을 뽑았다.
틀어올렸던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어져 내렸다.
리시스는 가만히 키에르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 머리카락에 입맞출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면 좋겠어.”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아무 느낌이 없는 곳인데도 공연히 부끄러워 리시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온 키에르트의 입술은 정수리에 닿았다.
쪽, 정수리를 누른 입술이 이어 관자놀이, 코끝, 뺨, 다시 입술을 찾았다.
“응…….”
간지러울 정도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발끝으로 이불을 찼다.
연거푸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뜨거운 숨이 새었다.
“하아…….”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옷자락에 닿은 키에르트의 손가락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게 되었다.
부끄러움보다 갑갑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생각보다 키에르트의 움직임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리시스가 각오했던 격렬함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요…….”
“싫어?”
막 리본 하나를 풀어내리던 키에르트는 문득 리시스의 중얼거림에 바로 고개를 들고 물었다.
리시스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그럼?”
“하나도 안 무섭고, 안 아프고 그래서.”
“아.”
키에르트는 그제야 마음 놓고 빙긋 웃었다.
리시스만큼이나 자신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막연한 두려움은 없었다.
리시스가 뭘 무서워하는지 이해했다.
선전포고를 하고 달려오는 기마대보다 암습이 더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그대가 싫어할 짓은 절대 안 할 거야.”
“절대요?”
“응, 아프지도 않게 할 거고. 무서워할 필요도 없는 것만.”
“뭘 하실 건데요?”
“키스할 거야.”
키에르트는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대의 온몸에, 구석구석.”
그러나 키스가 꼭 다정한 것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