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반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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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반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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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반한 눈빛
2022.05.12.
반한 눈빛?
리시스는 혼자 생각해 놓고도 뭔가를 들킨 것처럼 뜨끔했다.
키에르트가 자신에게 반한 눈빛을 한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리시스는 얼른 망상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머리를 붕붕 저었다.
키에르트와 자신은 어디까지나 동맹관계다.
동맹의 친밀감을 애정과 착각하다니.
이건 키에르트에게도 할 짓이 못 되었다.
‘방금 건 남편으로서 나섰어야 할 부분이었어.’
키에르트가 나서지 않았어도 리시스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다만 키에르트의 조치가 조금 더 속시원했다.
역시 우리 황제 폐하시다.
리시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알헨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키에르트가 리시스를 향해 돌아섰다.
“그대가 설마 그럴 리는 없다 생각은 하지만.”
“전 유부녀고, 남편감으로는 폐하가 최고라고 생각해요.”
“……큼.”
크게 한 소리 하려던 키에르트는 순식간에 무장해제를 당했다.
그렇게 갑자기 붕 띄워버리면 기분이 좋아져버리지 않나.
하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 줄 수는 없었다. 꼭 따져야 하는 것이 있었다.
“왜 저런 놈의 말을 길게 받아주고 있던 거지?”
“뭔가 있는 것 같아서 캐 보려고 했어요.”
아무리 보아도 수상하지 않은가.
키에르트도 그걸 느꼈으니 예의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마음을 풀어줄 정답은 아니었다.
“황후는.”
키에르트는 말을 하다 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한숨 뒤에 이어진 말은 지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자신을 좀 더 소중히 하라는 말을 왜 자꾸 잊지?”
“……엥?”
리시스는 주섬주섬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알헨크와 얘기하면서 몸 어디에 칼이라도 박혔나?
그러나 아무리 뒤져봐도 그럴 정도로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소중히……, 안 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소중히 했다고 하기에는 살짝 찔려서 말을 바꿨다.
그냥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저놈이랑 대화하는 게 즐거웠나, 그럼?”
“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도 내켜서 대화한 건 아니……. 아.”
말하다 보니 정답이 자기 입으로 나와버렸다.
리시스는 놀라 입을 막았다.
말 몇 마디 나누는 걸로는 큰일날 것도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불편한 감정을 참는 것도 스스로를 소중히 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리 중요한 정보여도 그대를 상처 입혀가며 얻을 필요는 없어.”
“깜빡했어요…….”
다정한 야단에 리시스의 눈꼬리가 처졌다.
키에르트의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거기에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도 얹혔다.
방금 전의 자신은 당장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조바심뿐이었다.
“그대가 그렇게 온몸을 바쳐 얻어야 할 건 없어. 세상 그 어떤 정보든, 승리든.”
리시스는 고개를 들었다.
키에르트의 따뜻한 시선이 햇살처럼 얼굴에 닿았다.
아.
가슴이 따끔했다.
햇살에 찔려도 아플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명령을 해. 그것이 황후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이야.”
위치에 따라 오만할 필요도 있다.
아직도 제대로 된 황후 노릇을 하기엔 먼 모양이다.
이럴 때 문득 느끼고는 한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가령, 세니아 같은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황후로 길러졌다 했다.
명령을 내리는 것도, 자신을 가장 먼저 소중히 챙기는 것도, 공사를 차갑게 구분하는 것도 태어난 순간부터 숨쉬듯 자연스럽게 습득했을 것이다.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황후의 자리가 문득,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게요.”
그래도 지금 당장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리시스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속마음을 숨기고 밝게 웃었다.
그런 리시스를 보는 키에르트의 안색은 밝지 않았다.
“폐하?”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반응에 살짝 당황했다.
웬만해서는 자신의 웃음에 기분이 풀리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뭔가 더 잘못한 것이 있었나 생각을 더듬어 보아도 뭐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키에르트의 속마음을 맞추는 대신, 리시스는 방금 배운 것을 써먹기로 했다.
“웃어주세요, 폐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노력해서 만들려 하지 말고 명령하라고 한 건 황제 폐하니까.
리시스의 당당한 요구에 키에르트의 굳었던 얼굴이 결국 풀렸다.
“……하.”
어이가 없어 실소를 토했지만, 결국 리시스의 명령대로 웃어버린 건 맞았다.
그 영특함을 당해낼 수가 없다.
“헤헤, 감사해요.”
이번의 저 웃음은 진짜다.
키에르트도 이번엔 실소 대신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리시스가 눈치를 보는 것이 싫었다.
꾸역꾸역 참는 것도, 괜찮은 척도 싫었다.
자꾸만 투덜투덜 불만이 나와버렸다.
원래 불만이라는 걸 가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키에르트는 불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시정사항을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라 명령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리시스는 자신의 맘대로 고치라마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반대로 리시스가 변화하도록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방식은 키에르트에게도 낯설었다.
두 사람은 각각 서로 가 보지 않은 방향으로의 전환에 삐걱거렸다.
“어, 이 노래.”
두 사람을 구원하듯 익숙한 춤곡이 들려왔다.
춤 연습을 할 때 많이 들었던 노래였다.
키에르트도 노래를 듣자마자 바로 떠올렸다.
“한 곡 추겠나?”
“기꺼이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을 사뿐히 잡았다.
사람들로 둘러싸인 홀은 아니었지만 키에르트와 마주서니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한 무도회장이 되었다.
키에르트는 뚝딱거리던 과거를 만회하려는 듯 유려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멋져요, 폐하.”
리시스는 솔직히 감탄하며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보고보고 또 봐도 잘생겼다, 내 남편.
오늘은 행사 때문에 꾸미기까지 하니 더 잘생겨졌다.
황제가 아니라 비렁뱅이였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을 거다.
“그대도 아름다워. ……너무.”
리시스의 반짝이는 시선에 답하듯 키에르트도 눈을 떼지 않고 마주보았다.
‘……아.’
또다.
따끔거리는 눈빛.
알헨크의 눈빛과는 상반되는, 무언가 모를 감정과 온기가 잔뜩 담겨 있는 눈빛.
마주칠 때마다 신경이 쓰여서 스텝이 꼬였다.
리시스는 결국 눈을 끝까지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도 모르게 한 곡이 흘러갔다.
“잘, 췄습니다.”
리시스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절을 하고 물러서려 했다.
춤을 추는 건 힘든 일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연병장을 열다섯 바퀴는 뛴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굴도 잔뜩 달아올랐을 거다.
키에르트의 눈빛이 따가운 탓이었다.
얼른 저 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서 쉬어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안 돼.”
그러나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놓으려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예……?”
“오늘은 나랑만 춤을 춰야 해.”
“왜, 왜, 왜요?”
“내 아내가 다른 놈들 손잡는 꼴을 못 보겠어.”
한 번 다른 놈의 수작을 구경한 남편의 소유욕 폭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라고, 정략결혼을 한 뒤 초야까지 생략하고 동맹을 결성한, 철저하게 공적인 부부관계의 남편이 생각했다.
물론 스스로의 생각에 생긴 모순은 의식하지 못했다.
***
“뭐?”
황궁의 문을 벗어난 알헨크는 거기서 또다시 병사들에게 인계되었다.
이게 황제의 복수인가.
알헨크는 하하, 황당함에 웃었다.
“여기서 또 어디까지 쫓아내려고?”
친위대원은 빙긋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국경.”
“맙소사, 진짜 추방이잖아?”
안 그래 보였는데, 쉬란의 황제는 꽤나 뜨거운 인간이었다.
겉보기나 소문과는 생판 달랐다.
이번 정략결혼도 그랬다.
무미건조한 원수와의 협약에 불과할 줄 알았는데, 제법 부부다워 보였다.
역시 모든 일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목을 붙여주신 게 어디야. 그러게 누가 함부로 까불라고 했나.”
친위대원도 오늘 알헨크의 수작질은 똑똑히 보았다.
좋은 날이니 웃고 넘어가 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적어도 황후 폐하를 건드리지는 말았어야지.
지금 황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황후 폐하였다.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다.
“오, 그 정도였어.”
알헨크는 그 말에 더 신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하나라도 더 말을 할 때마다 정보가 하나씩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미심쩍은 느낌에 친위대원들은 말을 아꼈다.
“가는 길에 짐을 챙길 시간은 허락하셨다.”
“알아서 할게.”
알헨크는 미련 없이 궁을 등졌다.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친위대원의 신호에 비장하게 따랐다.
알헨크는 병사들이 따라붙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말에 올랐다.
렌데일 공작가는 들르지 않았다.
이제 웬만한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쉬란에서 뭉그적거릴 필요가 없다.
“엇?! 어딜 가는……!”
렌데일 공작가를 그냥 지나쳐버리자 달라붙어 감시하던 병사들이 당황해 우왕좌왕했다.
알헨크는 신경쓰지 않고 곧장 황도를 벗어났다.
병사들이 바싹 긴장하며 달라붙었다.
알헨크가 말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곧장 달려서 따라붙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황도를 벗어나자 도시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나오던 민가도 사라지고, 농장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달과 풀만 있는 들판이 나왔다.
그제야 알헨크는 말을 멈춰섰다.
“뭐, 뭐지……?”
병사들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하며 알헨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말을 세웠다.
달빛에 비친 알헨크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빙글대던 미소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피냄새가 짙게 풍기는 싸늘함이 채워졌다.
“아무리 맘대로 하라고 해도 밀정까지 달고 갈 수는 없지.”
알헨크가 가볍게 턱짓하자 사방에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어, 어어?!”
순식간이었다.
병사들과, 그들조차 모르게 따라붙던 밀정들까지 단번에 도륙되었다.
푸른 달빛 밑에 핏빛 바람이 불었다.
알헨크는 지루한 듯 널브러진 시체들을 내려다보다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도륙을 마친 그림자들이 알헨크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알헨크의 손발인 양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대충 강도 짓인 척 처리해.”
알헨크 역시도 자연스럽게 명령했다.
그림자들이 척, 절도 있게 경례를 붙여 올렸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