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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나만 믿어 (79/153)


79. 나만 믿어
2022.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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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께서 지휘관으로 나서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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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사람들은 수줍게 나선 리시스에게 환호했다.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있었다.

남이 망신당하는 모습은 봐도봐도 질리지 않는 악취미적 오락이다.

오늘 황후 폐하는 황제 폐하를 등에 업고 꽤나 기세등등했다.

이전에 첫 티파티도 망치는가 싶었지만 결국 사람들을 휘몰아치고 내쳤다지 않은가.

오늘도 그 거침없는 기세를 뽐낼 것일까.

망치기를 바라는 마음 반, 그 위세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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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황후 폐하의 상대로 지휘하실 분은 누구실까요!”

이번에는 좀 전의 눈치싸움과 달리 조금 더 적극적인 눈빛이 오갔다.

황후를 상대로 이기기만 하면 된다.

조도 얼핏 보아하니 적당히 나뉘었다.

순수 실력만으로 승부를 볼만한 것이다.

황후는 웬만해서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황후를 이긴 영예를 가져갈 자격은 누구에게 가는 것이 맞을까.

자신이 나서고 싶지만 이런 자리에서도 서열은 중요했다.

혹시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 나서고 싶어하면 눈치껏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서로서로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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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누군가가 눈치 없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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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눈치 없는 게!’

사람들의 시선이 눈치 없는 인간 쪽으로 일제히 몰렸다.

알헨크가 한 손을 들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사납게 쏘아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주춤했다.

눈에 확 튀는 저 로구안 남자는 오늘 세니아가 데리고 왔다.

세니아만큼이나 세니아가 대동한 사람도 조심스러웠다.

단지 ‘로구안 출신’이라고만 밝혀서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본인 스스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기는 걸 보면 예사 사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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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에, 그, 로구안에서 오신 알헨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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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사회자의 부름에 알헨크는 성큼 리시스의 맞은편 단상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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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쉬란의 잔치에 에드린과 로구안 사람만 나선 게 되는데.’

리시스는 쉬란의 황후지만 출신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쉬란의 귀족이 나서면 이겨도, 져도 괜찮은 그림이 되지만 로구안 사람이면 말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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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설 때 안 나설 때 구분은 해야지.’

아무리 나대는 성격이어도 이번은 좀 도를 지나쳤다.

리시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서도 알헨크는 뻔뻔하게 웃고만 있었다.

사회자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이대로 진행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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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두 분께서는 경기의 규칙을 알고 계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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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하필 알헨크가 먼저 냉큼 대답을 했다.

이런 건 또 어떻게 아는데?!

리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규칙을 모르니 포기하겠다 하기도 애매했다.

지금 내려가면 로구안 놈을 상대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이건 쉬란의 황후로서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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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라. 설명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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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사실 규칙은 핑계였다.

복잡한 규칙은 없다.

장기짝 대신 사람을 움직이는 지시를 내릴 뿐이니까.

규칙을 모르니 아쉽지만 다른 분께 양보해 달라, 라고 할 심산이었다.

여기서 황후 폐하가 내려가면 분위기는 더 이상하게 흘러버리게 된다.

황후 폐하라면 이기든 지든 손해 볼 것이 없지만 정체도 불분명한 외국인은 이겨도 애매하고 지면 불명예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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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간단해. 그대라면 어렵지 않게 외울 수 있을 거야.”

그때 키에르트가 나섰다.

사회자는 구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얼굴이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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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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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를 둘 줄 알면 훨씬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으니까.”

리시스는 갑작스러운 키에르트의 등장에 반갑게 웃었다.

알헨크의 등장 때 찌푸려졌던 것과 양극단으로 느껴질 만큼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그 미소에 키에르트도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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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이 둘일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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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반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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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국 알헨크와 승부를 내야 하는 모양이다.

장난삼아 하는 모의전투마저 전쟁터와 비슷한 느낌이 되어버렸다.

원하지 않은 상대와, 필사적으로.

키에르트와의 장기는 이렇지 않았다.

이겨도 즐겁고, 져도 즐거웠다.

이기면 이긴 대로 강적을 이겨냈다는 즐거움에, 지면 자신이 생각지 못한 수로 질 수도 있다는 신기함에 즐거웠다.

알헨크는 굳이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맞서기보다는 그냥 피하고 싶은, 불쾌한 미지의 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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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은 안 되지만 변칙으로, 삼파전 어떤가.”

축 처진 리시스의 어깨를 지켜보던 키에르트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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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전요?”

리시스가 다시 얼른 고개를 반짝 들었다.

알헨크도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중간에서 사회자는 이도저도 못하고 어물어물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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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전쟁이 꼭 1:1의 싸움이란 법은 없지 않은가.”

드물지만 셋이 동시에 붙는 경우도 있다.

꼭 지금의 에드린, 쉬란, 로구안의 정세처럼.

본격적인 전쟁이 터진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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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알헨크가 먼저 선뜻 수락했다.

리시스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알헨크와 불쾌한 대결을 벌이느니 키에르트가 낀 삼파전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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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 역대 최초의 삼파전 모의전투! 조 편성부터 다시 해야겠습니다!”

황후에, 황제까지 모두 나선 모의 전투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 이상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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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를 하나 추가해야 할 텐데요, 어……, 흰색, 검은색이니까,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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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키에르트가 사회자의 고민을 줄여 주었다.

사회자는 황제 폐하의 명령에 ‘예,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어보았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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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입니까요……?”

흰색, 검은색 사이에 끼는 색으로 노랑은 좀 쌩뚱맞았다.

보통은 푸른색, 붉은색, 회색 정도를 떠올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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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이 귀여워.”

키에르트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참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리시스를 빤히 바라보며.

사회자는 그제야 리시스의 병아리털 같은 금발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아름답게 틀어올려 장신구를 주렁주렁 꽂았지만 리시스의 밝은 금발은 병아리털이었다.

귀엽기야……, 귀여웠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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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설마 아니지?’

황후 폐하가 병아리털같은 노랑머리라 그런 건 아니지?

진짜, 설마, 정말로 아니지?

하지만 그게 정답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사회자는 목이 메 다음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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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귀여움은, 중요하지요. 전쟁터에서……, 귀여움……. 네.”

뿐만 아니라 사회도 아주 거지같이 보았다.

모의 전투에 귀여움은 어떻게 엮어도 그럴싸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가, 이 행사.

사회자는 자신의 역량에 대한 진지한 고찰의 시간을 강제로 가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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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그럼! 전투 준비를 해 주십시오!”

조 재결성도 마치고, 규칙 설명도 끝냈다.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게 진행이 되었지만 그래도 진행이 되기는 했다.

세 사람은 각자 삼각형으로 마주 본 단상에 섰다.

리시스는 자신의 앞에 모여 선 병사들을 내려다보았다.

모의 전투는 지휘관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병사들 개개인의 역량도 중요했다.

장기처럼 동선과 전투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지휘관이지만 전투는 병사들의 개인전이었다.

그래서 누가 들어간 조를 만나느냐도 승패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가장 강한 미하엘은 키에르트의 조에 들어갔다.

리시스의 조에도 약하지 않은 친위대 몇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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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은 비슷비슷……, 살짝 약한 정도.’

전투력으로만 보면 미하엘이 들어간 조가 압승이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승리로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지휘관이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리시스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병사들은 전선에 있었기 때문에 리시스의 소문을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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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기는 게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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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아직 군기가 덜 빠진 병사들은 지휘관이 누구든 간에 빠릿빠릿 대답했다.

좋아, 쉬란 군의 군기도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 볼 수 있었다.

리시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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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기게 해 줄게.”

리시스의 자신감 넘치는 보장에 병사들의 눈이 빛났다.

누군들 지고 싶을까.

이기겠다는 생각은 있어도 못 이기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에 그만큼 자신이 없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있어도 전쟁터에서의 운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시스는 확신했다.

그 확신은 부적처럼 병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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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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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습니다!”

진짜 전투도 아닌데 리시스 조의 사기는 하늘 끝까지 찔러 올라갔다.

***

승리는 믿는 자의 것이었다.

실력의 차이는 마음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긴장으로 쭈그러든 것보다는 훨씬 좋은 성과를 이뤄냈다.

리시스는 몇 번의 개인전만으로 병사 개개인의 능력을 파악해 냈다.

승기가 확 기운 것은 셋이 달려들어 미하엘 하나를 때려눕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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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좀 너무하잖습니까!”

미하엘은 억울해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친위대장을 때려눕힌 친위대 셋은 마냥 좋아 낄낄 웃었다.

리시스도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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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서 너무한 게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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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요!”

미하엘은 어린애처럼 징징대며 자리에 누웠다.

실제 전투와 비슷하게 진행되는 모의전투는 진 사람을 끌어내는 것도 인력이 투여됐다.

끌어내 주지 않으면 바닥에 누워 대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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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한 건 미하엘의 실력이지. 혼자 반을 때려눕히는 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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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그건…….”

리시스의 칭찬에 징징거림이 소심한 꿍얼거림으로 내려갔다.

병사 다루는 실력은 아직 어디 가지 않았다.

미하엘은 자리에 누운 채 리시스의 지휘를 구경했다.

특별히 명장다운 카리스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소녀가 꽃꽂이를 하듯 앙증맞은 두 손을 모으고 ‘으음, 이건 어떨까. 이렇게 해 볼래? 저 쪽으로 가 줘.’ 하고 명령했다.

그리고 모든 예측이 귀신같이 맞아 떨어졌다.

여기에 지형과 날씨 같은 환경 변수까지 작용한다면 소름 돋게 정밀한 작전이 되었을 것이다.

미하엘을 때려눕힌 것도, 이제껏 그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한 방식이었다.

주변에 쓰러진 병사들 때문에 퇴로가 막힌 미하엘을 동시에 셋이 치게 했다.

그 쓰러진 병사들은 키에르트와 알헨크의 조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리시스가 그렇게 만들었다.

미하엘은 누워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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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황제 폐하와 천년만년 행복하게 잘 살아 주십시오!’

전쟁터에서 만났을 때도 리시스의 작전은 끔찍했다.

직접 가까이서 그 전투체계를 경험해 보니 더 끔찍해졌다.

심지어 이젠 충성심도 조금 생기고, 경탄도 조금 했고, 정도 들었다.

그런데 다시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나게 된다 생각하면 그 이상 끔찍한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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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황후 폐하 승리십니다!”

다른 두 사람도 미하엘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모조리 쓰러져버린 자신들의 조를 내려다보며 키에르트와 알헨크의 얼굴은 망연자실해졌다.

그 가운데 리시스만 장기 한 판 즐겁게 둔 사람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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