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변태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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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변태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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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변태인가 봐
2022.04.28.
모두가 황후의 저의를 혼동했다.
반어법인가?
분노인가?
아니면 진짜 욕하고 싶은 것인가?
에드린 왕실의 내밀한 사정까지는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리시스의 존재도 공식적인 군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에드린의 공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쿨럭!”
전선의 사정을 그나마 아는 친위대와 병사들만 헛기침을 뿜었다.
키에르트도 그중 하나였다.
“……왜요?”
“화를 내는 것 치곤 너무 귀여워.”
앞뒤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키에르트는 현실적으로 조언해 주었다.
“어머. 하지만 너무 험한 말을 하면 좀 그럴까 봐…….”
“무슨 상관이지?”
“욕쟁이 황후라고 소문나면 어떡해요.”
“에드린 왕 한정으로 그럴 일은 없을걸.”
키에르트의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확신을 가진 리시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만 아까만큼 흥분하지는 않고 침착하게 욕을 했다.
“***한 사람인데, ****한 걸로도 모자라 **하기까지 하고, 심지어 ******한 적도 있어. 그 ***한 일도 ****해서 한 거니까 정말 ***, ******라 할 수 있지. 참고해 두라고.”
“허억…….”
이번엔 또 너무 갔다.
배우는 벙쪄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렸다.
키에르트도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하라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다.
“휴.”
사람들을 넋 나가게 만들어 놓고, 본인만 속이 시원해진 리시스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앉았다.
처음으로 에드린 왕 욕을 제대로 해 보았다.
민트 한 입 가득 씹고 찬물을 마신 느낌이었다.
그때 친위대원들이 박수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악! 우리 황후 폐하 제대로시네!”
“아니, 그거 진짭니까?”
역시 먹여 놓은 보람이 있었다.
친위대원들이 웃기 시작하자 나머지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말을 한 사람이 리시스라 얼었던 것이지, 말의 내용 자체는 아주 유쾌했다.
왁자지껄 이야기가 확 번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공연은 마무리되었다.
시기를 보던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때맞춰 요리사들이 음식을 내놓았다.
음식 냄새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일등공신이다.
사람들은 리시스의 눈치를 보던 것도 잊고 제각기 즐기기 시작했다.
“한 곡 춰야지.”
키에르트가 리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의 주인공은 병사들이기 때문에 황제 부부가 첫 곡을 추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아예 춤을 추지 않고 앉아만 있을 수도 없었다.
우선은 춤을 추러 나가야 사람들과 섞이고, 인사도 받을 수 있었다.
연습은 완벽했다.
리시스는 오늘만큼은 자신 있게 키에르트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갔다.
제대로 배우고 준비한 리시스는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을 옮겼다.
리시스의 첫 춤은 성공적이었다.
자신감이 있으니 다른 사람 눈에도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황후 폐하께 한 곡 여쭤도 되겠습니까.”
키에르트와의 춤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미하엘이 다가와 춤을 신청했다.
키에르트는 미적거렸다.
이런 자리에서 활동을 해야 영향력이 커진다.
리시스가 제대로 황후로서 자리매김을 하려면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았다. 그런데 손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폐하?”
리시스가 꼭 붙잡힌 손을 보며 키에르트에게 물었다.
옆에서 기다리던 미하엘도 머쓱하게 바라보았다.
“한 곡 더 추고 싶으시면 다음 곡까지 기다릴 수 있지 말입니다.”
미하엘은 알아서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리시스가 미하엘의 팔을 잡았다.
“아니야. 오늘은 여러 사람이랑 만나려고 온 거니까. 그쵸, 폐하?”
“……응.”
마음은 응이 아니신 것 같은데.
미하엘은 뒷일을 염려하며 미적거렸지만 이미 리시스가 팔을 잡아버렸다.
여기서 다시 리시스를 거절하면 더 이상해져 버린다.
“그럼, 한 곡만 추고 오겠습니다.”
미하엘은 리시스를 데리고 다시 홀 중앙으로 나갔다.
키에르트는 못마땅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리시스는 자신과 출 때와 마찬가지로, 미하엘과 춤을 추어도 반짝반짝 빛났다.
평소보다 힘주어 꾸민 덕분만은 아니었다.
자신감 넘치는 눈빛이, 활기찬 몸짓이 빛났다.
이래서 미하엘에게 손을 넘겨주기 싫었다.
자신의 품이 아닌 곳에서 빛나는 리시스를 보는 것이 불편했다.
‘왜 이런 모자란 생각을?’
거기까지 생각한 키에르트는 스스로 놀랐다.
보급이 끊겨 삼 일간 귀리죽만 먹어도 이렇게 치졸한 생각은 안 들었다.
왜 자꾸 리시스란 사람을 보면 볼수록, 가까이 하면 할수록 갈증이 날까.
만져도 만져도 부족하고, 가까이 가도 가도 멀어지는 느낌이다.
겨우 한 곡을 참아 넘기고 다시 미하엘에게서 리시스를 돌려받으러 다가가던 중이었다.
옆에서 튀어나온 한 남자가 키에르트보다 한 발 먼저 리시스에게 다가갔다.
“……!”
키에르트는 순간적으로 그 남자를 알아보았다.
어쩐지 쎄한 느낌이 들더라니.
직감은 묘할 정도로 잘 맞는다.
얼마 전, 리시스와 이야기를 나눴던 그 남자. 알헨크였다.
‘뭐지? 어떻게…….’
서둘러 주변을 돌아보니, 세니아가 근처에 있었다.
정황상 세니아가 파트너로 데리고 온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오늘 행사는 병사가 우선적으로 초대되고, 그 다음으로 병영에 지원을 한 귀족 가문들을 초대했다.
렌데일 가문은 당연히 포함되었다.
각 가문에는 초대장이 한 장씩 갔는데, 한 장당 가문의 사람 하나에 파트너 한 사람을 더할 수 있었다.
보통은 가족끼리 뭉쳐 오지만 굳이 소개를 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거나 한 경우는 외부 파트너를 대동하기도 한다.
세니아는 그 기회를 저 알헨크를 소개시키기 위해 쓴 것이다.
심상치 않은 냄새가 났다.
오늘은 행사라고 제법 꾸몄는지 알헨크는 어느 나라의 왕족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멀끔했다.
그것도 키에르트의 심기를 긁었다.
알헨크는 마치 자신이 개최한 행사인 양 여유로운 미소로 리시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보아도 귀족의 파티에 처음 따라 온 평민같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여기서 또 뵙네?”
“……!”
리시스도 키에르트만큼 놀랐다.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는 리시스를 향해 알헨크는 하하하, 시원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귀엽고 웃겨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면 홀랑 들고 가버리고 싶어지는데.”
“여, 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초대장 들고 당당하게 들어왔지요.”
“초대장? ……아.”
리시스는 눈치 빠르게 세니아를 떠올렸다.
키에르트의 불쾌함과 다른 방향으로, 리시스도 미심쩍은 느낌이 확 왔다.
이렇게까지 우연이 겹칠 수 있을 확률은 0에 가깝다.
계산된 것이다.
“그럼, 잘 즐기다 가고.”
“황후 폐하셨네?”
리시스의 정체에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다.
그렇다면 면접을 보러 왔을 때부터 리시스가 황후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자니 걸리는 것이 많았다.
“오늘은 쉬란이랑 에드린의 전쟁에 관한 행사인데. 완전히 관련 없는 로구안 사람이 왜 왔을까?”
리시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알헨크는 빙긋 웃으며 세니아를 돌아보았다.
세니아는 뭐 씹은 표정으로 다가와 리시스에게 먼저 인사를 올렸다.
“만만한 남자가 없어서 대충 데리고 왔습니다.”
세니아는 차갑다 못해 동상 걸릴 것 같이 냉랭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 설명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 따지고 들어갈 여지도 없었다.
“그럼, 인사도 드린 겸 춤 한 곡 신청해도 될까나?”
새로운 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알헨크는 리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리시스는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다.
알헨크는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리시스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잡았다.
그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리시스는 손을 빼서 도망가는 대신 손아귀 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자연히 알헨크의 손이 벌어지며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실례.”
고의였으면서.
알헨크는 능청스럽게 자세를 고쳐 잡으며 사과했다.
리시스는 대꾸하지 않고 알헨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쳐다보시면 설레는데.”
“변태인가 봐.”
웬만한 사람에게는 하지 않는 눈빛인데.
깨부셔야 하는 적진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었다.
리시스의 뾰족한 답에도 알헨크는 큭큭 웃었다.
“그런가 보네. 큰일이잖아.”
“…….”
화를 내진 않아도 좀 부끄러워라도 해 줘라.
리시스는 어이가 없어 맥이 탁 풀렸다.
알헨크는 화제를 전환하듯 리시스의 몸을 한 바퀴 휙 돌렸다.
빠르고, 거칠었다.
리시스는 그제야 키에르트의 춤이 얼마나 다정하고 섬세했는지를 깨달았다.
함께 추는 춤이라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이렇게 혼자서만 달려가듯 제멋대로일 수도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황후 폐하.”
춤만큼이나 대화의 맥락도 제멋대로였다.
자기 혼자 하고 싶은 말만 주절거리다가, 리시스의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러다 또 저 혼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을 툭 던진다.
뭐 이렇게 제멋대로인 인간이 다 있지?
리시스는 춤을 추면 출수록 울컥울컥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곡이 진행되고 있으니 형식적으로 움직이기는 하는데 춤을 춘다기보다 싸우는 것 같았다.
“그런 식으로 에드린 왕 욕을 하면 나중에 괜찮나?”
“안 괜찮을 건 뭔데.”
“쉬란의 황후가 됐다고 해서 에드린의 공주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다고 뭘 어쩌겠어?”
적어도 키에르트와 손을 잡고 있는 동안, 로구안이 위협이 되고 있는 동안에는 리시스를 건드릴 방법은 없다.
그 증거로 날아오는 친서를 무시해도 아무 일 없었다.
하녀궁을 한 번 엎었으니 이제는 리시스의 소식을 물어나르는 전서구도 없어졌을 것이다.
“뭘 어째버리면 어쩔 건데?”
일어날 일 없는 가정을 자꾸 늘어놓는 것은 불안만 키우는 사고방식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지.”
픽 웃으며 무시해버리는 리시스의 반응에 알헨크는 더욱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때가 되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알아서 할게.”
“도움이나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 도와줄 수 있는데.”
“네가 뭔데?”
알헨크는 하녀들을 꼬셔냈던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작은 새처럼 포르릉거리더니, 오늘은 제법 맹금류처럼 부리로 쪼기도 한다.
신기한 존재였다.
보면 볼수록 재미있었다.
“나? 한 번 알아내 보지 그래? 내가 황후 폐하를 알아냈던 것처럼.”
역시나.
그날의 면접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시스는 알헨크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안 될 것 같아.”
“왜?”
“유부녀라서. 다른 남자한테 관심을 줄 수가 없거든.”
리시스가 생긋 웃는 순간 음악이 끝났다.
리시스는 미련 없이 알헨크의 손을 놓고 뒤돌았다.
그곳에는 당연한 것처럼 키에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