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이미 결혼을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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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이미 결혼을 했잖아
2022.04.24.
“세니아와 연관이 확실히 있던 게 맞나 봐요. 로구안이 자꾸 겹치는 것이 단지 우연이라 치기에는 느낌이 오지 않아요?”
“음.”
“이번에 면접에 온 것도 가만 생각해보니 수상쩍은 부분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왠지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한 번 의심하기 시작하니 걸리는 것이 많았다.
리시스의 의심에 키에르트도 신중해졌다.
“렌데일과 로구안의 결탁이라.”
황당한 조합이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렌데일 공작가는 대대로 이어져 온 명문가였다.
역대 황제에게 수많은 충성을 보여 온 충신 가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키에르트가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철저한 장사꾼이기 때문이었다.
신의가 아니라 이익으로 움직이는 충심이었다.
내내 충심을 보여 왔던 것도 쉬란의 황실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키에르트도 딱 그만큼만 렌데일을 믿었다.
“노리는 것이 황위가 아니라 황후위라면 충분히 가능하겠군.”
이번 정략결혼에 렌데일은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는 양 순순히 받아들였다.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황후 후보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니 키에르트도 그것을 납득했다고 생각했다.
깊게 생각할 이유도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보니 납득한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깨질 결혼이라 생각해서 차례를 양보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에드린과의 전쟁을 멈추는 것이 쉬란의 국익에 도움이 되니까. 그래야 세니아가 황후가 되었을 때에도 편할 것까지 계산해서.
아마 처음에 렌데일에서 항의했다면 키에르트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세니아가 황후위를 위해 리시스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불쾌했다.
“처음에는 기다리면 당연히 자기 손에 굴러 들어올 것처럼 행동했는데, 왜 갑자기 조바심을 내기 시작한 걸까요?”
리시스의 말에 키에르트는 이어지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왜 기다리면 당연히 세니아 손에 들어가지?”
“원래 세니아가 황후가 될 예정이었으니까요?”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듯 리시스가 오히려 질문을 이상하게 여기며 되물었다.
그 대답에 키에르트의 미간은 더욱 깊이 찌푸려졌다.
“아니었을 수도 있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른다.
그때야 키에르트도 세니아가 가장 낫다고 판단했지만 황후를 결정하는 순간엔 어떻게 될지 보장할 수 없었다.
‘원래’까지 붙일 일은 아니었다.
그 말을 꺼낸 것은 리시스였지만 세니아가 괘씸해졌다.
그렇게 티를 팍팍 냈으니 리시스도 당연한 듯 말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현재 황후는 그대고, 황후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하군.”
“……아, 그렇긴 하네요.”
“몸도, 마음도, 자리도 소중히 여겨.”
키에르트의 주문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리시스는 웃어버렸다.
“진짜 소중하게 여기다가 나중에 내놓아야 할 때 안 내놓고 버틸 수도 있어요? 막 질척거리고.”
“그러든가.”
“…….”
농담이 안 먹혔다.
가볍게 무시당해야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버리시면…….
리시스는 숙연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대는 쉬란의 황후야.”
“네, 그렇죠.”
“‘임시’ 황후가 아니라.”
키에르트의 지적에 리시스는 가슴이 뜨끔했다.
이젠 거의 잊고 있었지만 언제든 자리에서 내려올 각오는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황후로서 자리매김하려 발버둥치고는 있지만 뭐든 확실한 것은 없었다.
이혼은 어느 부부나 할 수 있다.
계약 역시 언제든 깨질 수 있다.
마음 하나만 믿고 모든 것을 주어 매달리기에는 연약한 것들이었다.
“네, 그렇죠.”
생긋 웃으며 돌아온 리시스의 답변은 키에르트의 마음에 오히려 금을 그었다.
차라리 ‘그걸 어떻게 믿냐’며 따진다든가 ‘더 확신을 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한다면 기꺼이 그러겠다.
하지만 ‘그래, 알겠고.’ 하며 넘겨버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리시스의 마음까지 자신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책에 따르면, 상대가 자신의 호감을 이렇게까지 믿지 않을 때 보통은 청혼을 하던데.
‘이미 결혼을 했잖아.’
답이 없었다.
***
귀환 축하 연회.
한 해 전쟁에서 고생한 병사들을 위한 연회였다.
쉬란은 일 년에 한 번씩 전선에 파병된 병사들을 교체했다.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을 위한 연회로 시작했던 것이, 이제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행사는 황궁 안에서 열리지만 황궁 밖에서부터 행진을 해서 입궁을 하기 때문에 온 황도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했다.
……했어야 했다.
……과거형이다.
현재는 그렇지 못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드십니다!”
“충성!”
적국의 공주이자 맞서 싸우던 적이 황후가 되어 자리한 탓이었다.
‘음……. 따갑다…….’
황제 부부를 향한 병사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고운 눈빛은 아니었다.
리시스는 얼굴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들을 느끼며 애써 미소 지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냉대 받을 각오는 했다.
아무렴, 자신들의 목숨을 쥐락펴락했던 상대인데 고운 눈빛이 나갈 리가.
‘쉽지는 않겠네.’
미움과 무시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살기 섞인 눈빛까지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다.
병사들의 살기는 귀족들의 적대감과는 차원이 달랐다.
리시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꼿꼿이 앞만 바라보았다.
“황후.”
키에르트가 잡고 가던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네?”
“힘들면 언제든 돌아가도 돼.”
“아뇨, 별로……. 힘들지는 않아요.”
“불쾌해도.”
키에르트는 시종일관 조심스러워했다.
황후로서 참가하는 것이 맞지만, 반대로 ‘리시스’가 상처를 입을까 봐 걱정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전폭적인 응원에 미소와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맞서 싸운 적으로서 당연히 자신을 미워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저 굳은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까, 그것 하나만 생각할 때였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리시스는 새로운 도전 앞에 조용히 불을 지폈다.
황실에서 열렸고, 황제 부부가 참가하지만 행사의 주체는 참전했던 병사들이었다.
그래서 여느 황실 내 행사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다고 했다.
연극도 황실극단이 아닌 민간극단을 들였고, 중간중간 오가는 것도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저잣거리의 광대를 보듯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든 날이었다.
“그, 그으리하여, 어, 어이쿠! 렉싱턴 장군이 엉덩방아를 찧었는데에…….”
원래는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져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웃지 못했다.
웃음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리시스뿐이었다.
큰 웃음이 터지지는 않았지만 피식피식 실소가 샜다.
“저 사건을 저렇게 볼 수도 있었네요.”
연극은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던 전투의 요약본 같은 내용이었다.
리시스도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 꽤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같은 전투인데도 쉬란의 입장에서 보니까 확 달라요.”
“그렇지.”
그러나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은 리시스뿐이었다.
황후 폐하가 오신다는 말에 연극은 급하게 전면수정에 들어갔다.
원래 귀환 축하 연회의 공연은 최고의 맵기를 자랑했다.
전쟁터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려면 매운맛이 최고였다.
그러나 단골 놀림대상이던 당사자가 관람을 하러 온다. 거기에 두 나라의 관계도 급선회를 해 버렸다.
이제까지 하던 식으로 준비해 오던 공연자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을 위해 맵게 끌어가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 와중에 에드린을 향한 조롱을 빼야 하고. 그런데 그게 메인 메뉴다.
맵지도, 구수하지도, 얼큰하지도 못한 밍밍한 맛이 되어버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연극을 진행하는 배우부터가 눈치를 보며 달달 떠는데 보는 사람이라고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병사들도 형식적인 박수로 답했다.
“에드린 쌍……, 아니, 그분……은 전선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소금 한 줌에 물 한 솥 넣은 것 같은 맛의 대사였다.
“저거 에드린 왕 얘기죠?”
“……그런 것 같군.”
리시스조차 대상이 헷갈릴 정도였다.
원래대로라면 에드린 왕과 리시스, 렉싱턴 장군을 골고루 욕하며 조롱해야 했다.
그런데 리시스는 황후가 되어 지켜보고 있지, 에드린 왕은 장인이 되었다.
놀리며 웃겨야 제맛인 연극이 놀릴 대상을 잃었다.
정략결혼으로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언제 서로를 배신하게 될지 모르는 두 나라의 관계만큼이나 이도저도 아닌 공연이 되어갔다.
“에드린 왕도 생각이 있었군!”
“역시 그랬군!”
“같은 생각이었다니!”
“평화를 위해!”
그전까지는 그럭저럭 신선하게 지켜보던 리시스의 이마가 찌푸려지기 시작한 것은 공연의 막바지였다.
어쨌든 두 나라가 행복하게 잘 지내게 되었답니다, 로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필연적으로 에드린 왕도 알고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는 내용이 형식적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지나가 버리려 했다.
“아니, 이건 아니지!”
보다못한 리시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에드린 왕을 얼마나 신나게 까나 보고 싶어서 왔는데, ‘알고 보니 괜찮았습니다.’?
이 자리에 부득불 참가한 이유는 바로 남들이 에드린 왕을 얼마나 신나게 까주나 보고 싶어서였다.
리시스는 분노하며 테이블을 두 손으로 탕 쳤다.
공연 중이던 배우들마저 대사를 까먹고 바라보았다.
“화, 황공하옵니다! 극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저희가 표현이 과했……!”
배우들은 극중이지만 납작 엎드렸다.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만 황후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 같이 죽은 목숨이다.
궁 안의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는 배우들은 벌벌 떨었지만 귀족들은 흥미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과연 에드린의 공주는 무슨 말을 할까?
“아니, 과한 게 아니라 부족하지!”
“예?”
“에드린 왕은!”
리시스는 차마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참느라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에드린 왕을 향한 예의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단어를 순화하고, 순화하고, 또 순화한 리시스는 결국 울분 섞인 평을 토했다.
“바보, 똥개, 멍청이야!”
다 같이 혼란에 빠졌다.
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