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이분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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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이분은 진짜다!
2022.04.17.
좋은 시간은 빨리 간다.
마냥 즐겁던 데이트날은 물 한 모금 마시듯 훌렁 지나가버렸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밀린 일, 일, 일이었다.
리시스도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작전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하녀장이 수고해 줘야겠어.”
“충성!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그래, 충성……이 좋긴 한데 수고만 해 줘.”
“충성!”
감옥 한 번 들어갔다 나온 하녀장은 기합이 제대로 들어갔다.
굳이 요구한 적도 없는 충성을 알아서 바쳤다.
힘들 때 돕는 사람이 진짜 내 사람이라는 감동은 진했다.
거기에 본능적으로 강한 사람을 쫓는 동물적 본능도 작용했다.
황궁의 감옥에 온갖 사식을 들일 수 있는 것도 권력이다.
같은 상황에서 하녀장이 뭐 하나라도 넣으려 하면, 문지기에게 잘 보이려고 굽신거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궁에서 뼈가 굵은 하녀장의 본능이 외쳤다.
‘이분은 진짜다!’
리시스에게 충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리시스는 그 속마음을 지켜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한 명은 확보.
모든 일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도 처음이 힘들지 그 뒤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그럼 부탁해.”
리시스의 작전이 개시되었다.
***
“황후 폐하께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모양이야.”
황궁에서 나온 사람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율라의 심장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다.
혼자 창고 천장까지 장작을 쌓아올리느라 온몸이 너덜너덜했는데 달려갈 힘이 솟았다.
정신없이 달려간 곳에서 만난 하녀장은 비장하게 말을 전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율라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렌데일 가문에 돌아온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감옥에 열다섯 번은 들어갔다 나온 만큼 고생을 했다.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한계까지 몰렸다.
일이 힘든 것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황후궁에서도 바쁠 때는 밤에 잘 때 온몸이 다 쑤실 만큼 일했다.
그래도 그건 자고 일어나면 나아졌다.
마음이 몰리는 건 자고 일어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다시 잠자리에 드는 순간만 그렸다. 자려고 누워서는 내일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황궁에 들어갔었다고 저 혼자 잘난 줄 아는 재수 없는 애.’
‘황후한테도 쫓겨났는데 세니아 아가씨 눈 밖까지 난 끝난 인생.’
어딜 가나 차가운 눈빛들이 달라붙었다.
하다못해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식사 시간을 지날 때까지 일을 시켜놓고는, 일이 끝나고 겨우 주방에 가면 ‘다 떨어졌는데? 진작 오지?’ 하는 빈정거림만 돌아왔다.
찌다 만 감자, 국물만 남은 스튜, 남이 먹다 남긴 빵 같은 걸로 겨우 주린 배를 채웠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걸로 사람 괴롭히는 건 아니지!
하녀들이 스파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황후 폐하는 먹을 것 하나는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다.
사람이 그래야 하는 거다.
“지금 당장 복귀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녀와 친위대의 차이는 손에 칼을 들었냐 마냐 뿐이었다.
마음만은 황후 폐하의 적을 향해 돌격 중이었다.
짐을 챙기려고 숙소로 돌아가는 걸음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황궁에서 사람이 나왔다고?”
그러나 그 걸음은 곧 멈췄다.
세니아가 나와 있었다.
이곳은 하녀들만 다니는 뒷길이었다.
세니아가 평소 걸음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절대, 우연히라도 지나갈 리 없는 곳이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나온 것이다.
황궁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야, 한 번 황궁에서 일한 사람이 어떻게 평범한 귀족가에서 일을 하겠어. 제자리로 돌아가게 돼서 다행이야.”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앞으로도 내 쥐새끼 노릇 잘해야 한다?
세니아의 목소리 뒤에서 이런 속삭임이 따라붙었다.
그동안 자신이 배를 곯든, 잠도 못 자고 일에 시달리든 관심 하나 없더니 이제 와서 다정하게 미소 지어 봤자다.
율라는 고개를 깊이 숙여 울컥한 표정을 가렸다.
“……네, 아가씨.”
조금만 더 유심히 봤어도 그 표정이 보였을 텐데.
세니아는 코앞에서도 그걸 못 보았다.
아랫사람의 감정 따위는 윗사람이 알 바 아니다.
따르지 않는 사람을 채찍질할 필요는 있지만 세세한 감정까지 챙겨줄 의무는 없었다.
“앞으로는 잘 하겠지?”
“……물론입니다.”
“이번 같은 답답한 사태가 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 나도 사람인지라 두 번 참긴 어려울 것 같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율라의 대답에 세니아는 흠, 차갑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저 덜떨어진 것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속으로는 욕이 나왔다.
하지만 리시스도 저것만큼 덜떨어져서 다행이었다.
단장해 줄 사람도 시장판에서 구하더니, 결국 하녀를 새로 구하는 것도 어려워 포기한 모양이다.
제 목숨 내놓고, 벌거벗은 채 지내는 것이 되는 줄도 모르고.
멍청한 주인에 멍청한 하녀.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는지.
***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까지는 들떴었는데, 막상 황궁 문을 넘으니 걸음이 무거워졌다.
율라는 발을 끌며 하녀장 뒤를 따라갔다.
얼굴을 마주하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잘못했다고 빌어야 할까, 사실 세니아 아가씨한테 물어나른 정보가 좀 있었다고 고백할까.
“어서와. 푹 쉬었어?”
“화, 황후 폐하…….”
그러나 밝게 맞아주는 리시스의 얼굴을 보자 긴장이 탁 풀렸다.
감옥 앞에서 휴가를 보내주던 때와 정말 다르지 않았다.
리시스가 보내줬던 것은 협박도 아니고, 경고도 아닌, 진짜 휴가였던 것이다.
“그래도 집에 갔다오니 마음도 편하고 좀 괜찮아졌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율라는 왈칵 쏟아질 뻔한 눈물을 삼키며 절했다.
“내가 황후궁을 한참 비워둬서 할 일이 많을 거야.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잘 부탁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율라의 군기 잡힌 대답에 뒤에서 듣고 있던 하녀장이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래야지.
그리고 그 순간 율라는 결심했다.
“저,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완전히 갈아타기로.
세니아 아가씨는 무섭다. 자신의 배신을 알면 세상 끝까지라도 찾아와서 죽여버릴 사람이다.
황후 폐하는 황제 폐하라는 단단한 아군이 ‘지금은’ 있으시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른다.
만약에 황후 폐하가 에드린으로 돌아가 버리신다면 그때 율라는 진짜 죽은 목숨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렌데일 공작가에 있었어도 말라죽었을 것이다.
기왕 죽을 목숨, 잘 쓰자.
“황후 마마께서 아셔야 하는 것 아닐까 싶어서요…….”
율라는 렌데일 공작가에서 보았던 남자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 몇 마디까지 들었을 때는 이걸 왜 나한테 말하지? 하던 리시스도 점점 더 진지해졌다.
듣다 보니 이건 일전에 면접에서 묘한 느낌을 보였던 남자, 알헨크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렌데일 가문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확인했다.
“세니아 아가씨께도 하대를 해요. 세니아 아가씨도 그걸 지적하지 않으시고……. 아랫것들이 기어오르는 걸 가장 못 견디시는 분이거든요.”
이건 리시스도 몰랐던 정보다.
‘그냥’ 여행자가 아니라는 뜻이 되는데…….
알헨크의 말대로 신세를 지는 정도가 아닌 게 분명했다. 뭔가 냄새가 났다.
“그런 얘길 내게 해줘도 돼?”
냄새를 맡으려면 코를 가까이 들이박아야 한다.
리시스는 율라의 신상이 걱정되었다.
“목숨이 위험하셨잖아요. 그런데도 용서해 주셨고요.”
율라도 이번에 기준을 세웠다.
적어도 자신의 몸을 챙겨주고 기회를 준 ‘주인’이다. 더 엄청난 정보를 물어드리지는 못해도 목숨은 지켜드리겠다고.
세니아 아가씨와 밀접한 정보라면 뭐든 리시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보 고마워. 하지만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예. 하지만 황후 폐하를 위하서라면 할 것 같습니다.”
“하지 말라니까…….”
율라는 감히 황명을 거역하며 씩 웃었다.
리시스도 엄하게 혼내는 대신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한 명. 또 성공.
엄마가 암살자를 돌쇠처럼 써먹던 방법이었다.
사람을 잡는 건 마음과 등짝패기랬다.
이번엔 등짝까지는 가지 않았다. 전쟁터의 암살자보다 훨씬 쉬웠다.
***
원래 계획은 부부궁에서 종종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시종이나 하녀를 들일 수 없는 부부궁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었다.
자연히 키에르트와 리시스는 각각의 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오늘은 마침 볼일을 보고 지나가던 길에 부부궁이 있었다.
“잠깐 안에 뭐가 달라졌는지만 보고 갈까?”
거의 완성되었기는 했지만 갖춰놓지 못한 몇몇 가구나 인테리어를 추가하겠다고 제롬이 말했다.
그 사이에 완성되었을지도 모르니 한 번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다.
뒤따르던 앨린과 가넷을 황후궁으로 먼저 보내놓고 리시스는 혼자 부부궁의 문을 열었다.
“어……?”
당연히 비어 있을 거라 생각한 부부궁의 거실에 키에르트가 있었다.
키에르트는 소파에 길게 누워 눈을 감은 채였다.
자기 집 안방처럼 편하게 늘어진 표정, 참 오랜만에 봤다.
의외로 키에르트의 자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다.
리시스는 조심스럽게 키에르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주 작은 바스락거림에도 바로 눈을 뜰 것 같은 예민한 사람이 미동도 않는다.
리시스는 그게 신기해서 소파 옆에 바싹 다가가 앉아 키에르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남편이니 얼굴 보는 것 정도는 잘못 아니겠지?
‘진짜 잘생겼다…….’
예쁘고 잘생긴 것도 보다보면 물린다던데, 키에르트의 미모는 봐도 봐도 물리지 않았다.
이렇게 정석적으로 예쁘게 잘생긴 사람을 처음 봐서 신기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전쟁터에서는 그런 외모를 유지하기 힘드니까.
키에르트의 외모는 문화와 여유로움의 집합체 같았다.
실제 그의 인생이 그렇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세상에서 거친 곳 한 번 안 가고 따가운 볕 한 번 쬐지 않고 자란 사람 같았다.
리시스는 그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언제나 허덕이며 살아왔던 사람에게는 타인의 것이나마 그 여유가 참 예뻐 보였다.
한참 쳐다보는 중, 키에르트의 눈썹이 움직였다.
‘아, 깨시려나 보다.’
리시스가 슬그머니 몸을 물려 안 본 척하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키에르트가 번쩍 눈을 떴다.
“앗.”
아니, 어떻게 인간이 잠에서 깨는데 움찔거리지도 않고, 으으으 하면서 몸을 비틀지도 않고, 눈을 비비적거리지도 않고, 그대로 번쩍 눈뜨고 기상인가!
비인간적으로 잘생기신 건 인정하는데 비인간적으로 기상하실 것까진 없잖아요!
리시스는 차마 도망도 못 가고 키에르트의 곁에서 얼굴을 들이민 자세 그대로 멈췄다.
키에르트가 눈만 움직여 리시스를 돌아보았다.
아직 잠에서 다 깨어나지 않았는지 눈빛이 몽롱했다.
몰래 봤다고 뭐라고 할 것 같지는 않은 분위기였다.
리시스는 얼른 분위기를 타 생긋 웃으며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러나 막 입술 사이로 말이 나오기도 전.
키에르트가 팔을 뻗었다.
“……폐……?”
그리고 입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