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왜 거기에 키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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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왜 거기에 키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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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왜 거기에 키스를?
2022.04.14.
“……예?”
혼내겠지 생각은 했는데 그것보다 더 엄청난 말을 들어버렸다.
차라리 혼을 내 주었으면 좋겠는데……?
리시스의 얼떨떨한 반응에 키에르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뒤늦게 자각했다.
“……아니.”
“……입고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키에르트를 바라보던 리시스가 씩 웃었다.
리시스의 웃는 얼굴에 키에르트가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다.
“알아요, 얼른 젖은 옷 벗으라는 말씀이시잖아요.”
키에르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귀엽게 사람을 농락한다.
그렇다고 별달리 혼낼 방법이 없기는 했다.
“흐잇치!”
그때 리시스가 재채기를 터뜨렸다.
밖에서 해를 쬐고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늘진 실내에 들어오니 아무래도 체온이 떨어졌다.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하는 리시스의 몸을 발견한 키에르트가 재촉했다.
“장난치지 말고 얼른.”
키에르트는 수건으로 리시스의 젖은 머리카락과 옷의 물기를 대충 토닥여 흡수시킨 뒤 방을 나가려 했다.
“어, 잠깐만요.”
그런데 리시스가 잡았다.
“왜?”
“리본은 풀어 주셔야…….”
“아.”
이제 드레스를 입히고 벗기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드레스 안에는 속살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의 속옷을 껴입고 있어서 드레스 정도는 벗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키에르트는 이제 리시스 옷 입히고 벗기기 정도는 능숙하게 해냈다.
리시스도 늘 받던 저녁일과처럼 자연스럽게 키에르트에게 등을 들이댔다.
삭, 사악, 삭.
젖은 리본이 키에르트의 손끝을 스치며 날렵한 소리를 냈다.
평소처럼 리본을 풀고, 벗어내리기 쉽게 끈을 넉넉하게 풀어주던 키에르트의 손끝이 움찔 굽었다.
“…….”
평소의 리시스는 마른 속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흰 면은 속이 비치지 않아 잠옷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적셔진’ 속 원피스였다.
젖은 속옷이 살에 찰싹 달라붙어 살색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키에르트는 무방비하게 보게 된 광경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어떻게 물러서야 할지 모르겠다.
자연스럽게 마저 갈아 입으라고 돌아서면 되는데, 몸이 굳었다.
눈이 투명한 천이 달라붙은 흰 등에서 떠나지를 못했다.
좁고, 하얗고, 매끄러운 등.
리시스의 젖은 등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다시 한번 마른침이 넘어갔다.
침이 아니라 가시를 삼킨 듯 목구멍이 깔깔했다. 입안이 말라들었다.
리시스의 몸 위에 이슬처럼 맺혀 있는 물방울이 왠지 달 것 같았다.
키에르트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갔다.
“……폐하?”
리시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색에 슬쩍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키에르트의 입술이 리시스의 등에 닿았다.
정확히는 등과 어깨, 목의 중간쯤.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등선의 살짝 뒤였다.
스스로 만질 일이 거의 없는 곳. 볼 일도 없는 곳. 타인과 접촉할 일도 거의 없는 곳이었다.
“힉?”
리시스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키에르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뭐, 뭐예요?”
낯선 촉감에 리시스는 잔뜩 털을 곤두세운 짐승마냥 키에르트를 경계했다.
수건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움츠린 리시스의 모습에 키에르트는 뒤늦게 실수를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였다.
너무 예쁘고 신비로워서 진짜 자기도 모르게.
이성이라는 것이 잠시 저 세상을 찍고 돌아온 순간이었다.
“키스.”
키에르트는 침착하게 리시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우선은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는 것이 맞았으니까.
“……아, 예, 그러셨군요.”
리시스는 너무 침착한 대답에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왜 제 등에 키스를 하세요?”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왜라니, 그냥.
하지만 그냥은 대답이 되지 않는다.
조금 더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예뻐서?”
“……어…….”
두 번째 대답 역시 어영부영 넘어가게 할 뻔했다.
리시스는 황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아니, 예뻐도 그렇게 맘대로 키스하시면 안 되잖아요.”
키에르트도 몰리니 핑계가 길어졌다.
그냥 사과를 해 버리면 자신이 못된 짓을 한 것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못된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싫었어?”
그래도 한 번 확인은 하고.
“……싫은 건 아니었지만…….”
리시스는 의외로 빡빡한 원칙주의자였다.
키에르트도 비슷한 성격이기는 해서 그 마음을 존중했다.
그러니 합당한 핑계를 최대한 찾아냈다.
“오늘 아침에 굿모닝 키스 안 했잖아.”
“……앗. 그, 그치만 그건 입술…….”
“제 시간에 못 했으니 부위가 다른 곳이어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런가?
이번에는 리시스도 크게 흔들렸다.
“으음, 으으음…….”
싫었다면 크게 따졌겠지만, 조금 놀랐을 뿐이지 싫은 건 아니었으니까…….
다른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고 예뻐서라는데, 뭐…….
입술을 모으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모습이 또 얼마나 귀여운지, 리시스 본인만 몰랐다.
키에르트는 그만 또 참지 못했다.
쪽.
이번엔 제대로, 입술을 노렸다.
“……뭐예요? 왜? 또?”
키에르트는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대로 놈팡이같은 핑계를 같다 붙였다.
“이자.”
“와…….”
방금 건 진짜 사기꾼 같았다.
리시스는 어이가 없어 이번 건 따지려 했다.
그러나 그때 다시 재채기가 튀어나와버렸다.
“히잇칭!”
“얼른 갈아입지.”
키에르트는 마른 수건더미로 리시스를 파묻다시피하고 방을 나와버렸다.
등 뒤로 문을 쾅 닫은 키에르트는 문에 기대서서 입을 막았다.
‘무슨 생각을.’
무슨 생각이긴. 야한 생각이었다.
리시스가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올려다본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드레스도 벗어내린 차림으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생각보다 치명적이었다.
그대로 더 있었다면 입술이 아니라 다른 어마어마한 곳까지 입을 맞추고 싶어졌을 것 같았다.
‘……미쳤나?’
키에르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요즘 들어 제정신인 때가 별로 없는 기분이다.
자신이 이렇게 여자의 몸에 관심이 많은 인간이었는지도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
키에르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주문을 외웠다.
‘계약위반은 금물이다……, 계약은 신뢰다…….’
자신의 욕망보다는 신뢰가 우선이다.
리시스가 자신을 원한다면 원한다고 말을 했겠지.
아무 말도, 신호도 없는 것을 보면 아직인 것이다.
기다리자.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리시스와의 신뢰를 생각하자 다행히 조금씩 달아올랐던 머리가 진정되었다.
숨을 내쉬며 발치를 내려다보니 옷에서 떨어진 물이 웅덩이를 그리고 있었다.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자신도 젖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
옷을 갈아입고 젖은 머리를 터는데 리시스가 나왔다.
리시스도 젖은 머리 끝을 수건으로 둘둘 만 채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키에르트는 자연스럽게 새 수건을 들고 다가갔다.
“말리려면 한참 걸리겠군.”
리시스의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단장을 할 때에도 한참 빗질을 해야 했다.
그 시간은 키에르트의 즐거움이기도 했다.
키에르트는 새 수건으로 리시스의 머리카락에서 물기를 꾹꾹 짜며 손가락으로 빗질을 했다.
리시스는 잠자코 키에르트의 시중을 받았다.
키에르트의 머리 시중은 황송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일상이었다.
기분 좋은 손길에 머리를 맡기고 있으니 몸이 노곤해졌다.
오늘 하루 별다른 일은 안 했지만 햇빛을 쬐며 낚시에 열을 올리고, 물에 빠지기까지 했다. 체력소모가 적지는 않았다.
졸음과 배고픔은 동시에 찾아왔다.
꼬로록.
“배고픈가?”
“그렇네요. 머리만 말리고 얼른 황제궁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아니다, 여기서 해결해도 되려나요?”
리시스는 앉은 채 고개를 홱 돌려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
또, 또 그렇게 쳐다보지.
키에르트는 얼른 흔들릴 뻔한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지.”
“좋아요! 부부궁에서 첫 식사네요.”
키에르트도 좋았다.
뭐든 처음을 기념하는 건 중요했다.
“먹고 싶은 것 있나?”
“으음…….”
리시스는 잠시 메뉴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아까 낚아올린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아, 아까 잡은 고기들. 그거 먹으면 안 돼요?”
“아!”
리시스가 열과 성을 다해 잡았던 그것들.
먹지 않고 버리는 아까운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럼 그걸 요리해 오라고……, 아니지. 우리가 직접 해 먹을 수도 있겠군.”
“폐하 요리도 할 수 있으세요?!”
리시스의 감탄하는 목소리에 키에르트는 우쭐해졌다.
“야전에서 생존을 위해 버틸 수 있는 정도는. ……아마,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굽는 건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럴싸한 요리를 만들어 짜잔, 하고 내놓고 싶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희망이 키에르트를 점령했다.
키에르트는 제롬에게 물고기를 건네받았다.
그새 잡은 양이 상당해서 두둑했다.
“저도 같이 해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와 나란히 부엌의 조리대에 섰다.
리시스는 요리를 할 기회도 없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못 했다.
부엌에 들어가는 것도 권위였다. 공주는 그런 권한조차 없었다.
비슷한 두 사람이 모였다.
과연 먹을 만한 걸 만들어낼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니까요.”
“그렇지.”
“실패도 경험이고요.”
“물론 그렇지.”
“실패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키에르트는 멋진 요리를 성공해 내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물고기와 씨름했다.
결과는 예상만큼 참담하지는 않았다.
생선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날것과 탄 것의 중간쯤 되는 적당한 구이를 완성했다.
요리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냠냠 잘 먹었다.
“맛있는데요?”
당연했다.
제롬이 무슨 짓을 해도 맛있는 물고기를 공수했으니까.
하지만 그것 말고도 직접 만들었다는 것에서도 맛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것이다.
배불리 먹은 리시스는 배를 두드리며 늘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최고의 데이트였어요.”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말에 문득 돌아보았다.
리시스는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었다.
“이렇게 좋기만 한 하루는 처음 겪어봐요. 그런 하루를 쉬란에서 겪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요.”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순탄치만은 않은 하루였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것들 투성이였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리시스가 즐겁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키에르트도 데이트를 구상하며 쌓였던 긴장감을 날려버리고 편히 미소 지었다.
“쉬란에서 추억이 이렇게 생기네요.”
그동안 했던 것들 중 추억이라 할 만한 것이 몇 개나 있었던가?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행적을 곱씹어 보았다.
노는 행위는 몇 번이고 했지만 놀기 위해 놀았던 적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에 우리 또 놀아요.”
리시스는 비밀기지를 만든 어린아이처럼 장난스럽게 웃었다.
키에르트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러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약속은 꼭 지키리라 마음속으로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