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당장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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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당장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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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당장 벗어
2022.04.10.
고래같은 물고기는 크기만 고래같은 것이 아니었다. 힘도 고래였다.
리시스가 도저히 힘으로 감당하지 못해 빨려들어갈 참이었다.
“으으으!”
리시스는 거의 눕다시피 낚싯대를 온몸으로 끌어안고 버텼다.
낚싯대가 활시위처럼 휘었다.
탄성 좋은 최고급품이었지만 한계는 있었다.
리시스의 힘과 고래의 팽팽한 힘겨루기를 당해내지 못한 낚싯대가 탕! 하고 굉음을 내며 부러졌다.
“으악?!”
한참 힘을 주어 버티던 리시스는 그대로 벌렁 나자빠졌다.
옆에 있던 키에르트가 다급히 리시스를 끌어당겨 안았다.
리시스의 평소 무게야 키에르트가 손가락 세 개로도 버틸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그러나 대치하고 있던 힘의 반동이 워낙 컸다.
키에르트가 엉겁결에 붙잡은 것으로는 막기 어려울 만큼 힘차게 튕겨나갔다.
“윽!”
그래도 키에르트는 끝까지 리시스를 붙잡은 팔을 풀지 않았다.
키에르트의 몸도 함께 굴렀다.
그러나 위치도 문제였다.
낚시를 하기 위해서는 물가에 바싹 붙어 앉아야 했다.
기우뚱한 몸의 방향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툭, 중심을 잃었다.
둘의 몸이 한데 엉겨 허공을 날았다.
“폐하!
“어억! 폐하!”
뒤에서 기겁한 시종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가 끝까지 들리기도 전에 첨벙! 물에 빠지는 소리가 리시스의 귓가에 울렸다.
호수는 깊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부그르르륵!
입에서 공기 빠져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놀라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데, 키에르트의 팔이 리시스의 몸을 꽉 붙들었다.
리시스는 아무 생각도 못하고 무작정 키에르트의 몸에 매달렸다.
“푸하!”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게 불쑥 수면 밖으로 머리가 솟았다.
일단 숨을 쉴 수 있게 됐으니 호흡에만 집중했다.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발에 단단한 것이 닿았다.
“황후, 괜찮나? 황후!”
“하아, 하아! 아……?”
키에르트의 다급한 고함에 정신을 차렸다.
리시스는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물속이 아니었다.
키에르트의 품안이었다.
주변에는 파랗게 질린 시종들이 담요다 뭐다 분주했다.
“곧 어의가 올 겁니다!”
“아……, 괜찮은 것 같은데…….”
놀라서 그렇지 몸에 별 이상은 없었다.
손발을 내려다보며 확인해 보아도 역시나 멀쩡했다.
오히려 키에르트가 더 큰일난 사람 같았다.
“저 괜찮아요.”
“그건 어의가 판단할 일이고.”
“진짠데.”
리시스는 멋쩍은 마음에 오히려 히히 웃었다.
키에르트는 같이 웃어주는 대신 더 험하게 도끼눈을 떴다.
웃는 얼굴도 안 먹히는 걸 보면 제대로 열받으신 모양이다.
“저 물에 처음 빠져 봐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말을 좀 말같이…….”
“폐하는 수영도 잘하시고.”
“말 돌리지 마.”
키에르트는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지만 점점 갈수록 분노의 기세가 약해졌다.
리시스는 에이이, 웃으며 조금 더 몰아붙였다.
“나중에 수영도 폐하께 배우면 되겠네요. 그쵸?”
“…….”
“어, 안 가르쳐 주실 거예요?”
“……나중에.”
그래도 결국 물러졌다.
리시스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하는 걸 보면 이미 놀라서 울컥 솟았던 화는 다 꺼져내려간 게 분명했다.
키에르트는 시종에게 건네받은 담요를 직접 리시스의 몸에 꽁꽁 둘렀다.
“얼른 옷부터 갈아입지.”
“마차를 불렀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아……, 이대로 돌아가요?”
“그래야지.”
리시스는 입술을 삐죽였다.
“좀 아쉬운데…….”
고래도 못 잡았고.
데이트라면 밤이 될 때까지 계속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 해가 한참 남은 지금 끝이라니.
황제궁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뭐든 할 수도 있지만 장소도 중요했다.
이제 익숙해진 황제궁은 집이었다.
그러나 리시스가 뭘 하기도 전에 마차가 대령되었다.
리시스는 담요에 둘둘 말린 채 키에르트에게 달랑 안겨 마차에 실렸다.
“춥지는 않나?”
“네에, 이 정도야 뭐. 시원해요.”
심지어 여름 축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기였다.
쉬란의 날씨는 에드린보다 훨씬 따뜻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그냥 젖은 채 놀아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혼나겠지.
자신의 몸을 소중히!
듣지 않아도 키에르트의 호통이 귀에 쟁쟁했다.
리시스는 찍 소리도 못하고 얌전히 실려갔다.
“어? 폐하! 여기요!”
그러나 가던 길목에 부부궁으로 찍은 장소를 지나치게 된, 굉장한 우연을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여기 부부궁으로 찍은 곳이에요! 들렀다 가면 안 돼요?”
“아, 여기였나.”
부부궁에 관한 것은 리시스에게 완벽하게 일임했다.
일을 맡긴다기보다는 취향이 중요한 부분이라 최대한 리시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둔 것이다.
자신이 관심을 보이며 물어보면 리시스가 부담스러워 할까 봐 키에르트는 일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알려 하지 않았다.
완성되어 ‘여기예요! 짜잔!’ 하면 전력으로 놀랄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되는 것인가.
키에르트도 리시스가 마련한 부부궁을 들르는 것은 설렜다.
“그래, 여기가 더 가깝기도 하니. 제롬.”
“예, 이곳으로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이렇게 할 계획은 없었다.
제롬은 속으로 당황했지만 속으로 계획을 열심히 수정하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황후 폐하의 단장을 도울 시녀들도 이리로 오라 하겠습니다.”
“아니. 아무도 그 선을 넘을 수 없다.”
“예?”
제롬은 발밑을 확인했다.
한 발을 더 걸으면 부부궁 현관으로 이어진 계단이었다.
부부궁은 시종도, 하녀도 들이지 않고 온전히 황제 부부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특히 두 분이 안에 들어 있을 때는 절대, 그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생각보다 빠른 부부궁 개장이었다.
“아.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음.”
“……그런데 황후 폐하의 드레스나 수건 같은 것은 아직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키에르트는 낮게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리시스를 젖은 채로 둘 수는 없다.
“이번만 허락하지. 단, 다른 사람은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저’만, ‘직접’ 모든 걸 나르겠습니다.”
키에르트는 그제야 좀 안심한 듯 몸을 돌려 부부궁 안으로 들어섰다.
“와……!”
부부궁 안에 들어선 리시스는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감탄했다.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고 고르기는 했지만 리시스도 실제 꾸며진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롬은 각각의 가구와 벽지, 바닥재 등의 그림이 실린 책을 가져와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리시스가 원하는 것을 고르거나, 또는 색깔만 지정했다.
‘적당히 골라주셔도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롬의 당부 덕분에 리시스도 부담 없이 골랐다.
리시스와 달리 궁을 갈고닦고 꾸미는 것에 도가 튼 제롬이 맡아 했으니, 도저히 망치려야 망칠 수 없었다.
……원칙대로는.
“흠, 흠. 실례하겠습니다. 수건과 옷을 대령했습니다.”
“거기에 놓고 가도록.”
키에르트는 제롬을 돌아보지도 않고 내보냈다.
그러나 리시스가 몸을 빙글 돌려 제롬을 향해 찬사어린 눈빛을 보냈다.
“제롬, 훌륭해!”
“……예?”
“너어무 예뻐!”
제롬은 그 반응에 속이 쓰렸다.
“……진짜 이걸로 만족하십니까?”
“어! 최고야! 진짜 능력자구나?!”
……칭찬은 감사하지만 이게 맞나.
제롬은 두 손을 맞잡고 깡총깡총 뛰며 감동하는 리시스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화려한 쉬란의 것에 눈이 먼 리시스는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떴다.
이전엔 꾸밀 공간도 없고 재료도 없어서, 서랍엔 문짝만 달리면 되고 침대는 무너지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이불은 구멍나지 않은 것이 제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세상 모든 반짝거림을 다 내 마음대로 채워넣을 수 있게 되었다. 고르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다. 천지창조를 손가락 하나로 해 내는 짜릿함은 중독성이 있었다.
그 결과는 살짝 잔혹했다. 제대로 된 쉬란의 고매한 센스를 가진 사람의 눈에는.
“……아직 완성은 아닙니다. 손을 볼 곳이 많습니다.”
“이미 훌륭한데?!”
조금이라도 보완을 해서 리시스의 악취미를 덮어보려 한 제롬의 시도는 단박에 실패했다.
어차피 황제 부부만 쓸 궁이다.
다른 사람 눈에 좋아 보일 필요는 없다.
두 분이, 특히 황후 폐하가 만족하시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지만!
시종장으로서의 자존심과 프로 의식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떠십니까.”
황후 폐하 혼자 쓸 궁이 아니다.
황제 폐하의 취향도 중요하다.
제롬은 마지막 희망을 키에르트에게 걸며 물었다.
“아주 변칙적이며 센세이션하고, 키치한 멋도 느껴지는군. 완벽한 불균형 속에서 궤를 유지하는 일관성도 있고.”
“…….”
이건 사회성인가 취향의 문제인가.
제롬은 마지막 남은 아군에게 배신당한 눈빛으로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는 깔끔한 취향의 소유자였다.
신방도 정신 사납다고 다 치워버리고 싶다 하셨던 분인데.
부부궁은 심지어 생활공간이지 않은가. 이 꼴을 앞으로 계속 보고 지내실 수 있을까?
그러나 키에르트는 감탄하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리시스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래……, 황후 폐하께서 만족하시면 황제 폐하도 만족하시는 거지.
이 시종장도 만족합니다…….
제롬은 곱게 절하며 물러섰다.
“이건 에드린 식인가?”
키에르트는 낯선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흥미를 가지며 리시스에게 물었다.
“음, 아뇨.”
“그럼?”
리시스는 그동안 자신감이 좀 붙었다.
이전에는 에드린의 공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쉬란의 황후로서 완벽해야 할지 등에 촉각을 세웠는데 이제는 둘 다 아니어도 된다는 걸 알았다.
리시스는 생긋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 식이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는 만족스러운 대답이기도 했다.
잔뜩 긴장해서 털을 곤두세운 모습보다는, 온 세상이 자신의 방인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구는 쪽이 보기 좋았다.
“좋은 취향이야.”
“헷치!”
좋은 대화를 이어가던 중, 리시스의 재채기가 터졌다.
뭐든 다 좋게 넘어가 줄 것 같던 키에르트의 눈이 순식간에 세모꼴이 됐다.
“아, 그. 코가 간지러워서.”
안 통했다.
세모꼴이 다시 캐슈넛같이 예쁜 곡선으로 돌아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에드린의 바람처럼 찬바람 쌩쌩 부는 목소리가 명령했다.
“당. 장. 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