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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첫 데이트 (70/153)


70. 첫 데이트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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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움직여!”

잠시 허리를 펼 새도 없이 호통이 등을 후려쳤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옷장 재배치를 해야 한다며 밤늦게까지 일을 시켰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온몸의 근육이 다 끊어지는 것마냥 아팠다.

그래도 쉴 수 없었다. 쉰다고 말하면 렌데일 공작가에서도 쫓겨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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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궁에서 어지간히 편히 살았나보다?”

호통소리에 다시 몸을 움직이는데, 이번에는 다른 하녀의 빈정거림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래도 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묘하게도 구박과 질투를 동시에 받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네가 뭔데 세니아 아가씨의 신임을 얻어 황후궁에 들어갔다 왔냐, 하는 질투와, 그래봤자 황후궁에서 쫓겨나 오갈 곳 없는 처지 주제에, 하며 날아오는 구박.

어느 것도 율라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구박도, 질투도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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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꾸물거려서 어느 세월에 다 끝내! 서둘러!”

사나운 재촉에 율라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자신이 이렇게 죽도록 힘들게 일하는 걸, 세니아 아가씨는 알까?

그럴 리가 없다.

세니아는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하녀의 개인 신상을 외우고 있을 정도로 꼼꼼했지만, 그렇다고 관심과 애정이 있지도 않았다.

하녀는 세니아에게 손수건 정도의 존재였다.

질 좋고 예쁘면 아끼지만, 그 손수건이 없다고 큰일나지도 않는다.

손수건 하나 때문에 무언가를 희생하지도,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는다.

무심결에 쓰고 좋네, 하고 어떤 손수건인지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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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는 안 그러셨는데.’

놀랍게도 리시스는 하녀들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처음에 이름을 묻고 다니길래 왜 저러나 했다. 황후답지 않다고 비웃기도 했다.

리시스도 치덕거린다 할 정도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리시스는 사람을 사람으로 봤다.

그 차이가 이렇게까지 큰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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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만 있으면 돌아가고 싶다.’

세니아의 하수인이 아니라, 황후 폐하의 진짜 하녀로서.

어차피 누구를 모시든 자신에겐 일자리였다. 돈만 제대로 챙겨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녀는 평생 종사해야 하는 일이다.

목수가 자신의 가구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처럼, 농부가 자신이 일군 농작물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처럼, 하녀도 자신이 모시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생긴다.

누군가를 평생 모시고 산다면 리시스이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다가갈 수는 없었다. 기다려야 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하녀가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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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잘 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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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채지 말랬지.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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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오셨습니까.”

율라는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세니아의 목소리에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놓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세니아는 하녀들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방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율라는 고개를 숙인 채 눈알만 굴려 세니아를 살폈다.

누가 보아도 로구안 사람인 남자가 세니아의 곁에 따라붙고 있었다.

이전에 일했을 때에는 없던 사람이었다.

율라는 하나도 잊지 않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사소한 정보라도 때에 따라서는 굉장히 큰 단서가 되기도 한다.

세니아가 알려주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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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시스의 말을 곱씹던 키에르트는 불현듯 깨달았다.

시간. 성의.

리시스와 자신은 처음부터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생각지 못한 순간 어색함에 사로잡혀버리는 것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친숙해지는 시간을 밟았더라면 이렇게 이상해지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비정상적인 두근거림을 그렇게 해석했다.

이대로 지내다보면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지만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야 했다.

밤이야 많이 보냈지만 아직 시간과 주고받은 관심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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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간을 좀 가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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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하자고요?”

리시스는 느닷없는 키에르트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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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차피 우리 곧 따로 살게 될 거잖아요. 왜 굳이 그걸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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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아니고. 시간을 함께 보내자고.”

너무 비장하게 생각을 하고 있던 탓일까, 말이 헛나왔다.

리시스의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야 헤어지는 연인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바뀐 키에르트의 말도 잘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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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시간은 함께 보내잖아요?”

키에르트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 식사나 티타임을 꼭 같이 가졌다.

명분은 리시스의 매너교육.

실제로 초반에는 에드린과 조금씩 다른 매너를 이리저리 수정받았다.

그러나 지금의 리시스는 사교계의 그 누구보다 우아하고 자연스러운 쉬란식 매너를 몸에 익혔다.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하루 한 번 만남은 꾸준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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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짧게 일과 보고하듯 말고, 아예 긴 시간을 쭉 함께 보내는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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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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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더 자연스럽고 편해지지 않을까?”

그제야 리시스도 지난 시간을 더듬어 보았다.

키에르트는 늘 바빴다. 리시스도 중간중간 꽤 바쁜 시간이 끼어 있었다.

일이나 용건이 있어 종종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해도, 흔히 친해지기 위해 ‘그냥’ 시간을 내는 일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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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제안이세요.”

키에르트와 ‘친해진다’는 생각은 리시스도 미처 못 했다.

애초에 친해질 대상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계약을 보다 잘 이행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관계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다.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하고.

인간 대 인간으로 친해지는 건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듣고 보니 좋은 생각이었다.

친해지면 안 될 관계도 아니었다.

이미 부부다. 지금껏 쉬란의 황제 부부는 비즈니스만 했다지만 본질은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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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첫 데이트가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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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키에르트는 리시스가 꺼낸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래, 데이트가 있었지.

키에르트는 자신의 건조한 사고방식을 반성했다.

말 그대로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서로에 관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 생각하고 있었다.

데이트라면 그냥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뭔가를 함께하는 것이 더 시간을 밀도 있게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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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데이트.”

마음에 들었다.

키에르트는 밝게 웃으며 리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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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황후. 나와 데이트를 해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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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손을 답싹 잡았다.

방심하고 있던 키에르트의 가슴이 뜨끔 찔렸다.

괜찮은가 싶다가 꼭 한 번씩 이런다.

그래도 키에르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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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럼 해 보고 싶던 데이트라든가, 생각했던 것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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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실 있어요!”

리시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꽃을 받는 것도 리시스만의 꿈과 기대치가 있었던 것 같아서 물었는데, 뜻밖에 굉장한 호감 반응이 돌아왔다.

묻기를 잘했다. 기왕 할 것이면 리시스가 원하는 데이트를 하는 것이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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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는 뭐든 그대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 테니 편히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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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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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라.”

키에르트는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곁에서 듣고 있던 제롬이 슬쩍 눈치를 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열 번을 넘기고 다시 세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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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로……, 낚시를 할 수가 있나?”

열네 번째.

뒤에 붙는 문장은 조금씩 변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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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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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데이트가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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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그런 걸 하나?’

등등, 낚시 데이트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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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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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계획이 벌써 완성되었나?”

제롬은 괜히 위로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낚시 데이트 얘기가 나온 것이 바로 어제다.

늘 인내와 차분함을 잃지 않던 우리 황제 폐하 어디로 가셨나.

오늘 당장 호수에 물고기 다 풀었냐며 닦달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아니, 그렇게 낯설지만도 않았다. 결혼 이후 부쩍 그러고 계시니까.

유능한 시종장 제롬은 그 모습에도 최대한 맞춰 드리려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능력이 차고 넘치는 제롬이어도 하루만에 물고기를 공수해 풀어 놓는 것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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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낚시를 즐기신 황제 폐하께서 전무하셨던지라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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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해야 해.”

귀족의 생리는 복잡하면서 치밀하다.

식사 한 번 하는 데에도 수십 가지의 매너가 정해져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데이트도 형식의 연속이었다.

첫 데이트는 무조건 형식을 지켜야 했다.

나중에 쌍방이 형식을 생략하기로 합의가 되면 그땐 괜찮다.

하지만 그전에 멋대로 형식을 무시하는 것은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어 유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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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기하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두 분이 함께 즐거우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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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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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니까요. 폐하께서도 즐거우셔야 황후 폐하께서도 즐거우시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상대 앞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분명 형식에 들어 있다.

키에르트는 깜빡 잊고 있던 그것을 떠올리고 쓰게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든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 즐거울 생각을 못 했다.

하지만 리시스만큼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순수하게 즐거워 줬으면 했다. 그러려면 역시 완벽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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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가 즐거우려면 역시 잘 낚이는 것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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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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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호수에 물고기를 꽉꽉 채워 넣으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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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십니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여기서 훌륭한 시종장인 제롬은 명령을 이행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행사를 준비하듯 데이트 준비도 사전연습에 만전을 기했다.

완벽한 동선을 짜고, 여러 변수에 대한 대처도 마련해 두었다. 호위 배치는 물론이었다.

황궁 안에는 마침 호수가 있었다. 관상용 물고기도 몇 마리 넣어 키우고 있는 곳이었다.

호수지기는 자신이 가꾸는 호수에 자부심이 있었다.

키에르트가 큰 관심이 없어 찾지 않아도 혼자서 호수를 멋지게 꾸며놓고 있었다.

나무와 꽃도 아름답게 배치했고, 호숫가의 바위에 물때 하나 끼지 않게 깨끗하게 쓸고닦아 놓았다.

그리고 관상용 물고기도 아주 잘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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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용?”

제롬은 물속을 유유히 거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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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가 매일같이 좋은 것만 먹여서 저렇게 키워 놨습죠. 저 큰 빨간 놈은 벌써 30살이 넘어갑니다. 그래도 저 선명한 색을 보십쇼!”

호수지기가 뿌듯하게 자랑했다.

그러나 제롬은 심란했다.

저건 물고기라기보다는……, 고래……?

저걸 과연 낚시로 잡을 수 있는 건가……?

키에르트와 제롬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던 것과 그림이 많이 달라지려 했다.

반짝반짝 수면 위에 부서지는 햇살, 한가로운 고요함, 호수물에 발을 담근 두 사람.

또는 유유히 흘러가는 배.

참방이며 낚아올리는 은빛 작은 물고기…….

현실은 폭풍과 싸우는 원양어선의 거친 뱃사람의 낚시였다.

이건 아니지.

확실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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