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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죽어도 좋은 손길 (68/153)

68. 죽어도 좋은 손길2022.03.27.

16549369234004.png“가자, 하녀 건지러.”

키에르트와의 춤 교실이 일찍 끝난 덕분에 하녀들을 상대하는 시간도 당겨졌다. 하녀들의 처우는 전적으로 리시스에게 맡겨진 상태였다. 아직 하녀들은 감옥에 갇힌 채였다. 그들을 잘 요리해 써먹든, 그대로 전부 내쳐버리든, 리시스의 자유였다. 리시스는 기어들어온 암살자까지 알짜배기로 이용해 먹은 엄마처럼 하녀들을 다뤄보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황후궁을 재정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려면 경력직이 필요했다.

16549369234009.jpg“괜찮을까요?”

앨린은 리시스를 따라 나서면서 걱정했다. 암살 시도는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있던 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때 암암리에 협조하고 있었을 수도 있는 하녀들을 다시 들이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정작 당사자인 리시스는 무슨 생각인지 천하태평이었다.

16549369234004.png“미하엘이 알아서 잘 했겠지.”

리시스를 뒤따른 것은 앨린뿐만이 아니라 친위대장인 미하엘과 몇몇 친위대원들도 있었다. 미하엘은 리시스의 인정에 다부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49369234009.jpg“황후궁 전체의 동선 점검은 물론 배후까지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같은 일이 두 번은 일어나지 못할 겁니다.”

16549369234004.png“응, 미하엘을 믿어.”

이제는 이름도 막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위대와 친해졌다. 황제궁에서 지내다보니 아무래도 마주칠 일이 잦았다. 고기도 먹여놨겠다, 서로간에 어색한 시간이 좀 지나자 점점 편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키에르트와 함께 있는 모습을 종종 보이니 리시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도 쉬웠다. 늘 전쟁터에서 맞서던 에드린의 공주 대신, 황제의 옆자리에 있는 쉬란의 황후 폐하로. 리시스의 행차는 황후 치고는 단출한 듯했지만 친위대원을 대동하자 위엄이 생겼다. 하녀들이 갇혀 있는 감옥에 다다르자 문지기들이 먼저 알아보고 넙죽 인사를 올렸다.

16549369234009.jpg“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리시스가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도서관에서 아무도 리시스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제는 리시스도 자신을 알아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명령도 제법 할 줄 알게 되었다.

16549369234004.png“하녀들을 석방시켜.”

16549369234009.jpg“황후궁의 하녀들 말씀이십니까!”

16549369234004.png“응. 전부.”

16549369234009.jpg“옛! 명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감옥의 문지기들은 아주 빠릿빠릿했다. 문지기지만 궁의 호위병에 속하는 자들이라 특히나 이번 일과 관련해 예민하게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황후 폐하가 하녀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는 그들도 궁금해 하던 부분이었다. 문지기들은 후다닥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리시스는 감옥까지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하녀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에 맞는 햇빛에 하녀들은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다. 오늘따라 날씨도 좋았다. 찬란하게 쏟아지는 햇빛 가운데 리시스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햇빛을 받은 리시스의 머리카락과 옷이 반짝반짝 빛났다.

16549369234004.png“그동안 감옥에서 고생들 많았어. 몸이 많이 상했지?”

상냥하게 웃는 리시스의 등 뒤에서 햇빛이 찬란한 후광을 뿌렸다. 하녀들은 그 비현실적일 정도로 신성해 보이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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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16549369234004.png“황제 폐하께서 너무 진노하셔서 설득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 뭐야. 그래도 사식은 내가 열심히 넣는다고 넣었는데.”

16549369234009.jpg“아닙니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의 보살핌으로, 저희는……, 으흑!”

하녀들은 진심어린 눈물을 쏟았다. 어찌나 사식을 잘 넣어 주었는지, 감옥에 있다 나온 사람 같지 않게 볼이 포동포동했다. 감옥에서 움직이지는 않고 넣어 주는 밥만 먹다 보니 자연히 살이 쪘다. 제대로 씻지 못해 꾀죄죄하기는 했지만 몸이 어딘가 상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격무에 시달리던 황후궁 시절보다 혈색이 좋았다.

16549369234004.png“어디 아픈 곳은 없고?”

16549369234009.jpg“예, 예! 어허헝……!”

하녀들은 자비로운 리시스의 보살핌 앞에 오열했다. 리시스는 그 어느 때보다 자애로운 미소로 하녀들을 다독였다. 언제나 성공할 수밖에 없는 먹이기 작전은 이번에도 성공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키에르트가 홧김에 감옥에 처넣어 버린 것이 리시스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리시스가 직접 감옥에 넣고 먹였으면 효과는 0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저질러 주어서 리시스는 착하고 좋은 사람의 역할만 쏙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다들 방에 갇힌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갇혔으니 심리적으로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그런 상황에 리시스의 관심은 몹시도 달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 관심은 ‘맛있는 먹을 것’의 형태로 주어졌다. 가장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에게 마음은 기울기 마련이다.

16549369234009.jpg“저는 앞으로 이 한 목숨 바쳐 황후 폐하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16549369234009.jpg“저도요!”

16549369234009.jpg“제 목숨도요!”

빗발치는 충성 서약은 꽤 찡한 풍경이었다. 미하엘은 감동한 듯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앨린도 덩달아 무릎 꿇고 뭐라도 해야 하나 관절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리시스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6549369234004.png“목숨은 필요 없어.”

16549369234009.jpg“……예?”

16549369234009.jpg“엇, 왜요?”

하녀들은 벙쪘다. 앨린도 덩달아 벙쪘다. 미하엘도 같았지만 앨린이 먼저 물어봐 주어서 질문은 참을 수 있었다. 리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16549369234004.png“목숨은 소중한 거니까. 각자 목숨은 자신을 위해서 쓰고, 나에게는 하녀로서 각자 위치에 최선만 다해주면 돼.”

16549369298912.jpg“황후 폐하아아아!”

자신에게 주고 또 주는 사람만큼 감격적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녀들은 감동의 도가니에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역시나 리시스는 차분한 미소로 지켜보기만 했다. 이쯤 되니 앨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멋진 대처였다. 표면만 보고 사는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큰 그림. 사람을 움직이는 진정한 한 수! 이 다음엔 또 뭐가 나올까?

16549369234004.png“감옥에서 다들 몸이 상했을 테니 우선은 휴가를 좀 보내. 오랜만에 집에 가서 푹 쉬면 몸도 좋아지겠지.”

16549369234009.jpg“예……? 휴가요……? 언제까지요?”

16549369234004.png“다들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준비가 될 때까지?”

몸이라면 지금도 튼튼했다. 잘 먹인 몸은 운동 좀 못 했다고 축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리시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감을 잡았다. 몸의 준비뿐만 아니라 ‘마음의’ 준비까지. 진정한 충성이 아니면 거절하겠다는 신호였다. 하녀들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16549369234009.jpg“한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16549369234004.png“다들 푹 쉬고.”

리시스는 끝까지 웃으며 하녀들을 배웅했다. 황후라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황후에게 하녀란 가장 가까이에서 편하게 집어 쓸 수 있는 휴지 같은 존재였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우고, 기분 내키는 대로 뽑아 찢어버려도 그만인. 하지만 그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리시스는 잊지 않았다. 사람은 성의로 대해야 한다. 엄마는 그렇게 가르쳤다. *** 리시스는 모처럼 한 건 한 기분에 걸음이 가벼웠다. 직접 처리해야 했던 일 중에 가장 신경쓰이던 일을 끝냈다.

16549369234004.png‘이제 남은 일은…….’

행사에 관련된 몇몇 사항을 체크하고, 미뤄두고 있던 여름 축제에 대한 계획도 좀 다시 잡고, 부부궁도 확정짓고, 춤은 오늘은 끝이니까…….

16549369234004.png‘폐하는 괜찮으신가?’

자신보다는 어의가 더 잘 진찰하고 보살피겠지만 걱정이 되니 들여다보고 싶었다. 원래는 부부궁 건물을 먼저 돌아보려 했지만 리시스는 황제궁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황제궁은 여러 개의 건물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 중에 리시스가 신세를 지고 있는, 가장 보안이 철저한 깊숙한 건물 말고도 다른 여러 건물이 있었다. 합궁 이외의 날에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사생활을 존중하기 위해 다른 방을 이용했다. 같은 건물의 다른 방일 때도 있고, 아예 다른 건물일 때도 있었다. 보통 키에르트가 먼저 티티를 통해 기별을 보내왔기 때문에 리시스가 먼저 행방을 물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까 본 후 어디로 가서 쉬고 있는지 리시스도 알 수 없었다. 황제궁으로 다가가자 시종들의 연락을 받은 제롬이 나와 있었다.

16549369234009.jpg“일은 잘 마치셨습니까.”

16549369234004.png“응.”

16549369234009.jpg“그럼,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16549369234004.png“어, 아니. 잠깐.”

원래대로면 키에르트의 행선은 절대 비밀이다. 원칙상 황후에게도 키에르트의 사전 허락이 없으면 알려줄 수 없다 했다. 그러나 리시스는 혹시나 하며 말을 꺼냈다.

16549369234004.png“폐하는?”

16549369234009.jpg“쉬고 계십니다.”

16549369234004.png“어디서?”

16549369234009.jpg“북쪽 궁에 계십니다.”

16549369234004.png“응?”

제롬은 너무 아무렇지 않게 키에르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16549369234009.jpg“안내해 드릴까요?”

16549369234004.png“어? 어…….”

키에르트의 허락을 받니 마니 하는 절차도 없이 바로 안내를 하려 앞장을 섰다. 순순히 들여보내준다니 고맙기는 한데……. 리시스는 제롬이 혹시 으슥한 곳으로 자신을 데려가 쓱싹 해버리려는 건가 새삼스러운 의심마저 품었다.

16549369234009.jpg“이 방입니다.”

그러나 제롬은 정중하게 키에르트가 있는 방문 앞까지 리시스를 모셨다. 방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친위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이곳이 분명히 맞기는 했다.

16549369234004.png“나 들어가도 돼?”

16549369234009.jpg“물론입니다.”

16549369234004.png“……허락은?”

찾아 온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방문까지 멋대로 열고 들어가도 되나? 리시스는 노파심에 확인했다. 제롬과 친위대원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16549369234009.jpg“예, 황후 폐하는 언제든, 이라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16549369234004.png“……아……. 그랬구나.”

키에르트가 직접 리시스에게 말해 준 적이 없어 리시스도 몰랐다. 하지만 언제든 리시스가 키에르트를 필요로 할 때에는 찾아도 된다는 다정함이었다. 이번에는 키에르트의 숨겨진 성의에 리시스의 어깨가 올라갔다. 친위대원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소리 없이 열린 문틈으로 들어간 리시스는 방 한쪽의 소파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키에르트를 발견했다.

16549369234004.png“폐하?”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부름에 부스스 눈을 떴다. 자는 도중 등장한 리시스의 모습에도 놀라지 않는 것이, 명령은 틀림이 없던 모양이었다.

16549369355558.png“황후……? 일은 다 마쳤나?”

16549369234004.png“몇 개 남긴 했는데 폐하가 걱정돼서 찾아왔어요.”

16549369355558.png“아……, 그래.”

키에르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리시스는 다급히 다가가 키에르트의 어깨를 눌렀다.

16549369234004.png“저 때문에 일어나지 마시고 누우세요.”

16549369355558.png“…….”

키에르트는 반쯤 몸을 일으킨 채로 멈췄다. 리시스를 바라보는 눈가에 옅은 홍조가 얹혀 있었다. 그걸 발견한 리시스는 놀라며 어깨를 누르던 손을 이마에 얹었다.

16549369234004.png“폐하, 진짜 몸이 안 좋으신 것 아니에요?”

리시스의 작은 손이 키에르트의 이마와 눈을 가렸다. 키에르트는 눈을 감으며 소파에 다시 드러누웠다.

16549369234004.png“어의를 다시 불러올게요!”

16549369355558.png“아니.”

키에르트는 자리를 뜨려는 리시스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이마로 그 손을 되돌렸다.

16549369355558.png“이러고 있어 줘.”

16549369234004.png“이런다고 병이 낫지는 않아요.”

16549369355558.png“그대가 만져주면 낫는 것 같아.”

병 주고 약 주는 손이었다. 리시스가 만질 때마다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서 어의를 찾았다. 하지만 어의는 물론 제롬의 손길마저도 거부감이 들었다. 몸에 닿는 모든 것이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리시스의 손이 닿자 그런 느낌이 싹 가셨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 정도 부작용은 상관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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