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럼 키스는?2022.03.17.
“폐하께서 오늘 점심식사 어떠냐고 여쭈셨습니다.”
“아, 어떡하지? 오늘은 하루 종일 때 밀려고 시간 비워놨는데.”
“저녁은 어떠시냐고 여쭈셨습니다.”
“팩 하면서 자야 돼.”
“내일 아침은 어떠시냐고…….”
“늦잠 잘 것 같은데.”
금요일에는 하늘에 기도 올리러, 토요일에는 땅에 기도 올리러, 일요일에는 공기에 기도 올리러 바쁠 예정 같은 답변들이었다. 당신과 만나지 않기 위해, 바쁘기 위해서라면 개종도 불사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였다. 그만큼 리시스는 키에르트를 피하고 있었다. 자신은 여주인공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냐!’
쉬란에 온 이후 ‘살아남자’는 목표가 이렇게까지 꾸준히 지켜질 줄이야. 키에르트는 착실히 남주인공의 절차를 밟아갔다.
『밤에 산책 어떤가.』
시종을 통한 연락을 리시스가 제대로 받지 않자, 티티를 통해서까지 연락해 왔다. 연락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 정말 남주인공다웠다. 리시스는 쪽지를 못 본 척해버릴까 고민하다가 억지로 답장했다. 꼭 여주인공들은 잠수를 타다가 사단이 났다. 성의가 없을지언정 잠수만큼은 타지 말자.
『밤엔 졸려서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졸리고, 바쁘기도 했다. 리시스가 황제궁에 처박혀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예정되어 있던 행사들의 날짜들이 차근차근 다가왔다. 아무리 리시스가 참가하는 흉내만 내도 신경써야 할 부분은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씩 살피다 보니 실제로 바빠졌다. 그러나 답변을 듣는 사람 눈엔 다 핑계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눈치 보고 산 인생은 아니지만 눈치가 없지도 않아.”
회피로 일관되고 있는 답신에 드디어 인내심이 바닥난 키에르트가 예의고 뭐고 방문을 두드렸다. 아직 황후궁의 준비가 되지 않아 리시스는 황제궁에 더부살이 중이었다. 그나마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준 키에르트 덕분에 황제궁에 있으면서도 얼굴 마주치지 않고 쪽지만 오가기를 며칠. 이제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무슨 말씀이실까요?”
리시스는 하하하 최선을 다해 웃으며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 선 키에르트를 마주보았다. 아무리 키에르트가 눈치를 볼 줄 안다 하나 궁에에 뼈가 굵은 시종들만 하겠나.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제롬을 비롯한 시종들은 발소리도 없이 사사삭 사라졌다. 리시스의 곁에 붙어 있던 앨린과 가넷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리시스는 아닌 척했지만 긴장했다. 꼭 이러면 문 걸어 잠그고 발목에 사슬 채우던데.
“왜 나를 피하지? 에드린에서 피치 못할 연락이라도 왔나?”
그러나 키에르트가 꺼낸 말은 다분히 상식적이었다. 리시스는 헉 놀랐다. 일신의 안전만 생각하느라 까먹고 있었다. 그만큼 키에르트가 편해진 탓이라면 탓일까. 키에르트가 남주인공화가 되어도 에드린과의 평화를 위해서는 가까운 척이라도 했어야 했다.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요…….”
“그럼 왜.”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긴장감 가득한 망상처럼 다짜고짜 입술에 키스부터 하지는 않았다. 다가와 바싹 붙어서거나 안아들지도 않았다. 멀찍이, 손도 닿지 않을 만한 곳에서 팔짱을 낀 채로 쏘아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거리감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가까워졌던 탓일까. 이 거리감이 낯설었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억울하게 혼난 것처럼 가슴이 찌릿했다. 이럴 때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사태 해결에 도움 될 것이 없다. 리시스는 솔직히 까놓고 말했다.
“그게, 겁났어요.”
“겁? 내가 그대를 무섭게 했어?”
리시스의 말도 키에르트에게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리시스가 놀란 만큼 키에르트도 놀라워했다. 그 모습에 리시스는 다시 놀랐다.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내가 뭘 어쨌는데?”
키에르트는 이마를 짚고 한참 자신의 지난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과한 것은 없었다.
“키스에 환장하신 것처럼 구신 다음부터 꼭 저를 가둬놓고 미친 사람처럼 집착하실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요. 일단 저는 장수가 목표라 우선 거리를 둬야 진정하실 것 같아 피했어요.”
한 번에 몰아붙인 리시스는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가슴을 폈다.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역시 답은 같았다.
“남편이 아내에게 키스한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아니, 키스가 문제가 아니라……!”
“팔베개, 식사, 부부궁.”
“그것들은 문제가 아니긴 한데……!”
“그럼 뭐가 문제지?”
“……아.”
그제야 리시스는 깨달았다. 자신의 머릿속이 문제였다. 정확히는 열심히 채워 넣은 선행학습 지식이. 그러나 이걸 키에르트에게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일단 그 내용들을 입에 올리는 것부터가 난항이었다. 리시스는 최대한 말을 고르고 골랐다.
“폐하께서 꼭 남자 주인공 같으셔서요.”
“……?”
너무 골라서 앞뒤를 알 수 없는 영문 모를 말이 되었다.
“부가설명은 없나?”
“그러니까, 저도 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책을 좀 뒤져 봤는데요…….”
그렇게 리시스의 머릿속 세계가 공개되었다. 키에르트는 ‘뭐 이딴.’이라는 말 한 마디로 축약해 버렸던, 하필 ‘그’ 서가의 책들에서 흡수된 지식으로 구축된 세계였다. 키에르트의 감상은 단순했다.
“어디서 그런 세기말 망상 같은 걸 주워 읽어가지고……!”
키에르트도 그 서가의 책을 훑어보기는 했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들이라 도로 내려놓았을 뿐이다. 울컥 소리를 지르던 키에르트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
리시스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도 그 책에 묘사되어 있던 남자 주인공의 특성이었다. 툭하면 화내고, 소리 지르고, 속마음과 달리 미운 소리만 뱉고. 키에르트는 가슴을 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건 알았다.
“아니야. 일단 아니야.”
“네에…….”
그 대답에 신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다시 한번 울컥하려다가 겨우 숨을 삼키며 참았다. 요즘 들어 부쩍 화가 늘었다. 전쟁에서 자기 목숨이 날아가기 직전까지 몰려도 침착하던 사람인데, 툭하면 울컥하고 벌컥하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 스스로가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아 키에르트는 허허 웃으며 심호흡을 했다. 리시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봄날 망아지처럼 기분이 날뛴다. 우선은 침착하게 설명을 해서 오해를 풀어야 했다.
“일단 나는 그대가 접한 그 책은 굉장히 취향이 아니었어.”
“네에…….”
“절대로 그런 방향을 지향하지도 않고.”
그제야 리시스가 슬그머니 듣는 척 눈을 들었다.
“나는 그대에게 더 친절하고, 다정하고 싶다고.”
다시 신용도 하락. 역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건 큰 문제였다. 리시스가 꿍얼꿍얼 지적했다.
“그런 것 치고는 키스에 환장한 사람처럼…….”
하필 그건 또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었다. 리시스도 솔직히 털어놓았으니 키에르트도 솔직해질 차례였다.
“……그건 그냥 너무 해 보고 싶었던 거라…….”
“키스가 그렇게 해 보고 싶으셨어요?”
“아니, 그렇다기보단…….”
아닌 게 아니라 맞지. 말만 보면 맞는데 뭔가 틀린 느낌이다. 리시스의 빨갛고 도톰한, 오물거리는 입술이 궁금하고, 그 입술을 마주쳐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걸 세간에서는 ‘키스’라 부른다. 그렇다면 키스를 해 보고 싶었던 것이 맞기는 한데…….
키에르트는 꼬이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응.”
리시스는 내심 ‘아니’를 기대했다. 키스는 그냥 분위기에 쓸렸을 뿐이라고. 일시적인 충동에 불과했다고. 그러나 우리 황제 폐하는 키스가 해 보고 싶으셨단다. 리시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싫다 그러면 안 하실 거예요?”
“……그래야지…….”
대답은 순순히 나왔다. 그런데 실망감을 숨기지도 않았다. 역시 키스에 환장하신 것이 분명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해도 빨간 서가 책의 남주인공 수순을 밟고 계신 것이 분명해 보이기는 하는데……, 또 이렇게 순순한 걸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리시스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 키스 다음 것도 엄청 하고 싶으시다든가, 매 순간 참고 계신 거예요?”
“아니, 그렇진 않아.”
가끔 야한 슬립 차림의 그때 ‘그’ 리시스가 불쑥 떠오르긴 하지만 언제나 그걸 떠올리며 펑 터질 것 같던 시기는 지나갔다. 지금 리시스를 보면 끌어안고 머릿속에 코를 묻고 싶은 충동이 더 컸다.
“……그렇게까지가 아니면, 됐어요.”
리시스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이상까지 밀어붙이면 리시스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에드린과의 관계가 엮여있다 한들 목숨까지 버려가며 키에르트와 붙어 살 수는 없었다. 일단 살고 봐야지.
“그럼 이젠 가까이 가도 되나?”
키에르트가 문가에서 물었다. 리시스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 미쳐봤자 얼마나 미치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세요.”
웃음이 나오니 마음도 편해졌다. 키에르트는 한 걸음씩 신중히 다가왔다. 리시스는 피하지 않고 키에르트를 마주보았다. 한 발 앞까지 다가온 키에르트가 눈을 마주치며 다시 물었다.
“머리카락에 대한 허락은 아직 유효한가?”
“……네, 그거야 뭐.”
키에르트는 슬며시 웃으며 리시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거친 느낌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이 손길은 마음에 들었다. 괜히 혼자 겁먹고 졸아들었던 심장이 다시 원래대로 부풀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키에르트가 또 질문했다.
“그럼 키스는?”
“……예?”
리시스는 얼떨떨하게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식으로 방심시켜놓고 기습이라니. 하지만 키에르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
“싫으면 참을게.”
‘안 한다’도 아니고 ‘참는다’다. 이건 또 신종 협박인가. 그러나 마냥 협박이라고 하기에는……, 리시스도 키스가 싫지만은 않았다. 싫지 않다는 건 지난밤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싫지는 않은데요…….”
“응.”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아뇨, 한 번에 한 번.”
노랭이 같은 허락이었다. 그래도 키에르트는 일확천금을 손에 쥔 것 마냥 환하게 웃으며 리시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안는 건 허락 안 했는데. 그래도 키스까지는 허락했으니 덤으로 끼워서 허락해 주기로 했다. 키에르트 한정, 마음이 약해졌다. 큰일이었다. 이런 식이면 매번 질 수도 있었다. 패배를 모르는 것은 리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슬프지 않은 패배는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