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폐하가 미쳐가기 시작했다2022.03.13.
“슬슬 황후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까 봐요.”
점심식사를 시작하면서 리시스가 자연스레 말을 꺼냈다. 화기애애하게 가벼운 이야기들을 나누던 도중이었다.
“왜?”
봄에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던 키에르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전쟁터의 잡초처럼 거칠어졌다. 리시스는 갑작스러운 표정변화에 놀랐다. 이상한 말도 아니었다. 적당히 때가 되었다 판단해서 말을 꺼냈던 건데, 키에르트의 반응은 적당하지 않았다.
“여기는 황제궁이니까요.”
리시스가 황제궁에서 지내게 된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어가고 있다. 암살 시도 때문에 보안을 위해 황제궁에서 지내기 시작한 것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다. 하녀들을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는 바람에 황제궁의 더부살이가 길어졌다. 그러나 영원히 평생 황제궁에 얹혀 살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처박혀 살기만 하면 상관없지만 리시스는 황후로서의 제 몫을 할 생각이었다.
“황제궁에서 생활하는 게 많이 불편한가?”
“어, 아뇨, 아뇨! 너무 편한데요!”
키에르트의 심각한 질문에 리시스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황제궁에 사는 쪽이 리시스도 더 편했다. 키에르트와 방도 따로 쓰고 있었다. 자신만의 공간은 보장되는데 괜히 하녀들 때문에 신경 곤두세울 필요도 없지, 암살자 걱정도 덜하지, 찾아올 손님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녀들이 없어도 가넷과 숙련된 시종들 덕분에 생활에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황후로서 일을 하려면 황후궁에 있어야 하니까요. 알현도 받고, 손님도 부르고.”
티파티 한 번 했다고 모든 의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전 티파티는 망한 듯 성공한 듯 애매하게 끝났다. 세니아에게 한 방 먹인 건 성공했지만 사교계에서 황후의 위엄을 제대로 보였나? 그 부분에서는 완전히 망했다. 남은 과제가 많았다. 그걸 이제부터 하나하나 고쳐 잡으려면 황제궁에서 나가야 했다.
“이대로 그냥 폐하의 아내로만 처박혀 살 수는 없잖아요. 저도 황후인데.”
“그건 그렇지만.”
키에르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그래도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말 끝에 ‘만’도 붙었다. 차마 자신이 먼저 꺼내지 못하는 불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혹시 황후궁에 들일 예산이 떨어졌다든가?”
“……쉬란을 거지 취급하는 건가? 황후궁 백 개를 지어도 돼.”
키에르트가 울컥하며 반박했다. 돈 문제는 아니고. 말을 던지면서도 돈 문제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쉬란에 와서 살면서 보고 경험한 재정상태는 굉장했다. 키에르트의 말대로 황후궁 하나 운영하는 정도는 돈이 나갔는지도 모를 정도일 것이다.
“음……, 그럼 아직 보안이 불안해서?”
“그것……, 도 있다고 치고.”
황궁 경비는 미하엘이 직접 나서서 재정비했다. 리시스가 단장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황궁 밖까지 나갔다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이미 그 시기엔 보안체계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였다. 돈도 아니고 안전도 아니고. 곰곰히 고민하던 리시스는 조금 더 심각하게, 어른의 관점으로 질문했다.
“제가 황후로서 너무 자리를 잡아버리면 폐하께서 곤란하실까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제 황후로서의 권력이 너무 커져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복잡한 권력관계가 생겨버릴 수 있으니까요.”
펄쩍 뛰는 키에르트의 되물음에 리시스는 생각하는 바를 담담히 늘어놓았다. 애초에 리시스가 황후로서 자리매김을 하려던 이유는 자신의 목숨보전을 위해서였다.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다 죽을까 봐. 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굶어죽을 걱정은 없었다. 지금은 키에르트가 집착하는 황후 폐하가 되었으니까. 황제와 황후의 관계만이었다면 아무리 굳건한 동맹을 맺었어도 불안했을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남자’와 ‘여자’라는 새로운 관계의 이름을 내밀었다. 황제와 황후보다 개인적이고 깊숙한 이름이었다. 적어도 그 이름으로 묶인 상태에서 굶거나 갇혀 죽을 일은 없었다. 키에르트의 마음 하나에 달린 부분이라 아슬아슬하기는 해도, 지금까지 보여 온 모습에서 변덕이 심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저는 폐하가 원하시는 대로 맞춰드릴 수 있어요. 처음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먹고 사는 데 문제만 없으면 크게 욕심 부릴 생각은 없거든요.”
“아니, 아니야.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서열 정리 깔끔하게 해 주는 것도 황제로서 고마울 일이고.”
말은 긍정적이었다. 표정의 불만은 그대로였다. 결국 리시스는 정답 맞추기를 포기했다.
“뭐가 맘에 안 드세요?”
대신 단도직입적으로 찔렀다. 키에르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래도 입이 열리지는 않았다.
“빨리요.”
리시스는 망설이는 키에르트의 등을 때리듯 재촉했다. 뒤틀린 속에 등까지 맞자 뱃속에서 꾸물거리던 불만이 여과 없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
“그대는 나와 떨어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나?”
“……예?”
“…….”
“……?”
키에르트는 토해놓은 진심이 실수인 양 고개를 팩 돌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리시스의 머리가 천천히 돌았다.
“……어머.”
리시스도 그 쪽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현실적인 고민만 했지 감성적인 쪽은 거들떠도 안 보았다.
“아……, 물론 저도 이제 막 익숙해지려는 차에 거주환경이 바뀌고 하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을 테지만, 아, 물론 아침저녁으로 뵙던 폐하를 조금 덜 뵙게 되는 것도 아쉬워 지긴 할 텐데.”
키에르트가 계속 해보라는 양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리시스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이어도 키에르트보다 먼저 생각해내지 못한 것은 지워지지 않았다. 감정도 돈만큼 무서운 부채였다. 지금은 리시스가 황제궁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키에르트가 아무 때나 방문을 할 수 있었다. 어차피 같은 건물 안의 다른 방이니 용건이 있을 땐 방문만 두드리면 되었다. 황후궁으로 돌아가면 키에르트와 이렇게 편히 만나기도 어려워 질 것은 분명했다.
“그치만 폐하께서 황후궁에 오시는 건 언제든 환영이에요!”
“내 궁에서 방문 두드리는 것과 남의 궁을 찾아가는 것이 과연 같겠나?”
“아, 아예 황후궁에 방 하나를 내어 드리면 어떨까요?”
풀릴 것 같지 않은 키에르트의 기분에 급해진 리시스는 아이디어 하나를 급조해 냈다.
“오, 괜찮지 않아요?”
리시스는 스스로의 생각에 감탄했다. 키에르트도 눈빛이 바뀌었다. 아닌 척하고는 있지만 솔깃한 것이 분명했다.
“흠.”
“지금 제가 황제궁에 방 하나를 쓰고 있는 거랑 똑같이, 황후궁에 폐하의 방을 만들면 굳이 손님으로 방문하실 필요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흠……. 아냐, 그래도.”
리시스의 말을 유심히 듣던 키에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엥, 왜요?”
“황후의 고유 영역은 지켜져야 해.”
“저는 지금 폐하의 고유 영역에서 맘대로 살고 있는데요?”
리시스는 격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맨발에 슬리퍼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이게 다 같은 궁에 사니까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키에르트는 사적인 부분에서는 규율에 관대했다. 리시스도 똑같이 관대함을 베풀어 줄 의향이 있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그러나 키에르트의 의지는 굳건했다. 비록 리시스가 먼저 제안했다고는 하나 황제의 권한을 내어주는 쪽이 아니라 황후의 권한을 침범하는 쪽이라서. 하지만 리시스가 좋은 제안을 해 준 덕분에 타협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부궁은 어떨까.”
“부부궁요?”
부부사이가 좋은 귀족가에는 아예 부부용 방을 따로 만든다. 각자의 방은 각자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둘이 함께 있을 때만 쓰이는 방이다. 황제 부부의 경우 궁을 각자 쓰니 부부궁을 만드는 것이 맞을 것이다. 리시스도 부부궁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그래, 모든 인원은 외부에 배치하고 궁 안은 우리 둘만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지.”
응? 리시스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계획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끽해야 밥이나 먹고 팔베개 하고 자는 것이 고작인데, ……설마 빨간 서재의 그것까지 하시려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확인하는 건데요……. 초야에 했던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거죠?”
리시스가 원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대지 않겠다는 둘만의 약속. 리시스는 시종들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물었다. 키에르트는 사기꾼처럼 웃었다.
“물론이지, 그대에게 허락받은 부분만 빼고.”
키에르트는 똑같이 리시스에게 속삭임을 돌려주며 머리카락 끝을 입술에 댔다.
리시스는 감이 좋았다. 스멀스멀 불안감이 솟았다. 이거, 키에르트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남성성 선언 때부터 좀 그랬는데, 입술에 키스 이후로 확실히 이상해졌다. 과도한 친절, 질척거리는 스킨십, 급발진, 집착. 이건 모두 빨간 책장의 서적에 주로 등장하던 남주인공들의 특성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리시스의 등이 쭈뼛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키에르트는 미쳐가고 있었다.
‘큰일 난 것 같은데!’
그 책들의 남주인공들은 보통 미친놈들이 아니었단 말이다. *** 똑같이 생존이 목표였지만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다. 궁의 유령이 되어 굶어죽지 않는 것이 처음 목표였다면, 이제는 미친 남주인공화 되어가는 키에르트의 손에 말라죽지 않기가 되어갔다. 문제의 발단은 그놈의 남성성이었다.
‘이 남자가 왜 이렇게 미치기 시작한 거지?’
리시스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키에르트의 승부욕을 뭔가 잘못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잘 따지고 보면 키에르트는 리시스를 전쟁터에서 만나기 이전에는 패배라는 것이 뭔지도 잘 몰랐다 했다. 완벽한 황태자로 태어나 완벽한 황제로 성장한 사람. 못하는 것이 없는, 태어난 순간부터 완성된 사람. 그랬다가 리시스를 만나 처음으로 좌절을 겪었다면?
‘집착할 만도 하지!’
게다가 세상 모든 여자들이 달려들었을 그의 인생에, 리시스가 첫 거부를 선물해 주었을 수도 있다. 그건 서로간의 합의였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남자로서 자존심이 은근슬쩍 상했던 것인가! 하지만 키에르트가 질척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가 아니었다. 본인의 입으로도 말했다. 쉬란의 가벼운 매너에 불과한 것들이라고.
‘그게 문제였나?’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순수하게 감탄했을 뿐인데, 그것이 키에르트를 자극했을 수도 있다. 리시스는 머리를 움켜쥐고 끙끙 앓았다. 본의는 아니지만 한 사람 인생과 인성을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책임감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리시스가 접한 서적의 남주인공들은 꼭 그 집착을 하다, 미쳐 날뛰다, 여주인공을 괴롭히는 쪽으로 연결되었다. 그 후에 여차저차해서 미친개에서 강아지로 변신한 남주인공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결국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기는 하지만! 리시스는 괴롭힘 당하는 여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그 여주인공들만큼 튼튼할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