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입술에 키스는 매너가 아냐2022.03.10.
더 이상 토닥거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키에르트는 손길을 멈추었다. 두 사람은 멀뚱멀뚱 천장만 바라보며 누웠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과로에 시달리며 살아 온 인생이었다. 머리만 붙이면 자려고 안달이었지 잠이 안 와서 고생한 날은 많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보았자 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분명했다.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했다.
“엄마가 어릴 때 토닥토닥을 해 주긴 했었는데요…….”
“음.”
리시스가 운을 떼자 키에르트가 반갑게 대꾸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잠이 더 깼었어요.”
“누가 건드리면 못 자는 쪽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키에르트의 팔베개는 편하고 좋았다. 팔베개를 베고 있으면 평소보다 잠이 더 잘 왔다. 이제는 없으면 서운했다. 합궁 준비를 하느라 따로 지냈던 며칠 동안 침대가 크고 추워 뒤척인 시간이 길어지기도 했다.
“엄마가 워낙 성의 없이 토닥거려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하셨는데?”
“한 손에는 종이나 책을 들고 그거 보면서 대충? 가끔 실수로 얼굴에 토닥거릴 때도 있었고.”
확실히 그건 애를 성의 있게 재우는 방법은 아니었다.
“엄마가 뭐 읽으면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오히려 더 잠이 잘 왔던 것 같아요.”
“아, 그건 좀 나도 비슷한 기억이 있군.”
리시스의 이야기를 듣다가 키에르트도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폐하는 어릴 때 어떻게 주무셨었어요? 선황후 폐하께서 재워주셨어요?”
“나는 유모였지.”
“오, 유모요. 유모 얘긴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었어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리시스의 눈이 반짝였다. 키에르트는 가볍게 어깨를 추어올렸다. 그렇게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냥 유모였지. 할 일 열심히 하고 살짝 신경질적이기도 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
따뜻하고 좋은 추억과는 거리가 먼 평가였다. 괜히 기대해서 말을 꺼냈던 리시스는 머쓱해졌다. 자신은 그래도 열 살 때까지 엄마와의 좋은 추억이라도 있는데. 키에르트는 선황제 부부도 거리감 있는 부모일 뿐이라 했다. 적어도 유모는 친밀하지 않을까 했는데 유모도 그냥 일하는 사람 1에 불과하다니.
“그래도 못 잘 때나 아플 때는 뭔가 해 주지 않았어요?”
“옆에 앉아서 밤새 대기하는 업무를 수행했던 것 같군.”
“……아…….”
유모 얘기에서는 가망이 없다. 리시스는 한편으로 딱한 마음이 들어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폐하는 진짜 다정하고 상냥하신 분 같은데.”
“……내가?”
키에르트가 지금까지 들어 온 평가 중 가장 황당한 평가였다. 어이가 없어서 하핫, 웃음이 터졌다.
“그냥 매너야.”
“그게 다정한 거죠.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그래주시는 거잖아요.”
“내가 특별한 건 아닐 텐데. 쉬란의 모든 남성들이 이럴 거야.”
지금까지 쉬란의 남자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으니 알 도리가 있나. 리시스는 반신반의했다. 키에르트가 보였던 모든 행동들이 그저 ‘매너’라고? 자신에게 꽃을 따 주고, 볼 때마다 꽃을 선물해 주고, 사람 많은 곳에서는 손을 잡아 이끌며 자신의 뒤로 숨겨주던, 그 많은 배려들이 누구에게나 베푸는 ‘매너’? 색색으로 붕 떠 있던 마음이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아, 그러셨던 거구나.”
“그대는 내 아내이자 황후니 더 특별하게 챙기기는 했지만.”
“으응.”
리시스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에르트가 덧붙인 말도 별 의미 없이 스쳐지나갔다. 실망을 하고서야 자신이 기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뭘 기대한 거야!’
키에르트가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이 두렵고 조심스러웠던 것 아닌가? 그래놓고 특별하지 못한 자신의 입장에 실망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았다.
“……?”
키에르트는 뭔가 뾰루퉁한 리시스의 반응에 고개를 돌렸다. 티를 내지는 않고 있지만 뭔가 입술이 뽈록 튀어나와 있다. 자신이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앞뒤 맥락을 짚어보던 키에르트는 아, 하고 깨달았다. 여성에게 관심이 없어도 사람 마음 헤아리는 눈치가 없진 않았다.
“입술에 키스는.”
“네?!”
키에르트가 꺼낸 말에 리시스가 펄쩍 뛰어올랐다. 겨우 가라앉히고 있던 마음이 놀라 콩콩 발을 굴렀다.
“입술에 키스는 아무에게나 하지 않아.”
“그, 그러세요?”
“그런 매너는 없거든.”
“부부간의 굿나잇 키스 매너…….”
굳이 그렇게 이름붙이고 싶다면 그러든가. 키에르트는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리시스의 뺨에 쪽, 입술을 눌렀다. 리시스가 꿈뻑꿈뻑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이젠 진짜 자야지.”
그리고 남자와 남편도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아 주기를 바랐다. 영 감을 못 잡는 리시스의 옆이마와 머리카락에 키에르트는 몇 번이고 꾹꾹 입술을 눌렀다.
“아, 왜 이러세요.”
“얼른 자라고.”
리시스가 귀찮은 듯 꾸물거렸다. 하지만 키에르트의 단단한 팔을 벗어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수리에 코를 묻고 잠을 청하는 키에르트의 품 안에서, 리시스도 눈을 감았다. 콩닥거리던 심장도 피곤했는지 곧 잠이 몰려들었다. 이건 남편의 품이라 그런 건지, 남자의 품이라 그런 건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아무튼 입술에 키스하지 않는 키에르트의 품은 편안했다. *** 리시스는 잠결에도 티티가 꾹꾹 누르는 것 같은 가벼운 접촉을 느꼈다.
“티티……?”
“아니, 남편.”
“……에……?”
잠이 덜 깬 리시스는 멍하니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밤새 여기저기 붓고 부스스해진 리시스와 달리 키에르트는 씻고 온 사람처럼 말끔했다. 눈에 잠기운도 없었다. 그는 멍하니 깜빡이는 리시스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흐?”
“굿모닝 키스.”
아침만 기다리며 벼른 사람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리시스가 허둥지둥 가슴을 밀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니, 잠깐.”
“아직 안 했어.”
입술. 키에르트는 입술에 환장한 사람이 되었다. 리시스는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도망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한 번’은 괜찮다고 어젯밤 말해버렸다. 안 된다고 딱 잘라 밀어버릴 수도 없고, 물론 싫은 건 아니고, 하지만 어젯밤처럼 계속 쪽쪽거렸다가는 심장이 날뛰어서 아침을 다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더구나 리시스가 보았던 ‘빨간 책장’의 책에서는 아침이 특히나 위험한 시간대였다.
“그, 그럼 빨리 하세요.”
키에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리시스의 몸 위로 상체를 드리웠다. 그의 두터운 두 팔이 리시스의 머리를 가두듯 양 옆을 짚었다. 내려다보는 얼굴에 어두컴컴한 그림자가 졌는데도 묘하게 눈빛은 밝았다.
“흡!”
잡아먹힐 것 같다. 그런 위기감이 들었다. 리시스는 다가오는 키에르트의 입술을 보다 못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흘러도 어젯밤 같은 무차별 입술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찔끔찔끔 겨우 한쪽 눈을 뜨자 눈가에 키에르트의 입술이 쪽, 닿았다.
“!”
리시스가 끽 놀라자 키에르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술에 키스는 없었다.
“끝이에요?”
“그대가 원한다면 더 해도 좋고.”
“아뇨! 아뇨! 괜찮은데요! ……근데 왜요?”
무섭고 떨려도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리시스는 그 와중에도 궁금해서 물었다. 키에르트는 웃으며 리시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밤새 끌어안고 잤으면서 또 아침에 끌어안는 것이 좋았다. 이 작은 몸, 파닥거리는 생기를 소유하고 싶었다.
“도망갈까 봐.”
리시스는 작은 새 같았다. 가끔 장난기가 솟구치거나 도저히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욕망이 치솟을 때도 있지만 그 이상 했다가는 놓쳐버릴 수 있었다. 키에르트는 렉싱턴 장군이나, 알헨크 같은 놈들을 떠올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렉싱턴 장군은 이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리시스의 인생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보호자나 마찬가지였다. 방심할 수 없다. 알헨크는 스쳐 지나가는 놈이었지만 어쩐지 기억에서 잘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리시스가 본격적으로 황후로서 자리를 잡고 사교계에 드나들게 되면 그런 놈들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다. 역시 방심할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마음처럼 리시스의 몸을 두 팔로 꽁꽁 묶었다. 그러는 사이 해는 점점 높이 떠올랐다. 일어날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어……, 이제 좀 놓아 주셔야……. 사람들을 들일 때가…….”
품안에서 쌕쌕 숨을 몰아쉬던 리시스가 키에르트의 팔을 톡톡 치며 난처하게 조언했다. 그러나 키에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더 좋지?”
“아니 그렇긴 한데 그게…….”
연기와 실제가 섞이기 시작하니 태도가 같을 수 없었다. 연기일 때는 일부러 보여주려고 더 했는데, 실제 남자와 여자, 부부다운 관계가 되니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었다.
“그래도, 그게, 부끄러운데.”
리시스는 빨개진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키에르트의 가슴에 얼굴을 쏙 파묻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놓아달라고 해 놓고서 되레 키에르트의 품으로 파고드는 형국이었다. 키에르트는 오락가락하는 태도에 핀잔 대신 관대한 포옹을 돌려주었다.
“꺅!”
강렬한 관대함이었다. 팔에 힘을 너무 주어 리시스가 숨 막혀 비명을 지를 정도로.
“아, 미안.”
얼른 힘을 뺐지만 키에르트의 팔이 지나갔던 자리대로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진짜 남자의 팔 힘이란 상상 이상의 단단함을 가지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이번엔 정말 생각지 못한 사고였다. 키에르트는 걱정스럽게 리시스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잠옷을 입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보이는 팔뚝 같은 곳에 슬쩍 붉은 기가 올라왔다.
“……이런, 정말 실수였어. 미안해.”
키에르트는 한껏 달아올랐던 기분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리시스는 쭈뼛쭈뼛 고개를 저었다. 놀라기는 했어도 아프지는 않았다. 이 정도 쓸린 자국은 몇 분만 지나도 금방 없어질 것이다.
“정말 괜찮아요. ……아.”
“……왜, 어디 또 아파?”
“아뇨, 건조했나 봐요. 입술이…….”
입술이 평소와 다르게 띵띵 부은 느낌이었다. 리시스는 무심결에 입술을 만졌다가 무슨 물 오른 새싹처럼 포동하게 부어오른 감촉에 화다닥 놀랐다. 내 입술이 밤새 왜 이렇게 됐어? 리시스는 질책하듯 키에르트를 돌아보았다가 말을 잃었다. 폐하의 입술은 왜 밤새 연지라도 바른 것처럼 시뻘게져 있는데요?
“…….”
이놈의 남편을 그냥. 민망해서 죽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