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이미 중독이 되어버린 입술2022.03.06.
“으, 으엑?”
“……키스의 소감으로는 너무한 소린데?”
“으악?”
“일부러 내진 말고.”
리시스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이건 엄마의 키스가 아니잖아요!”
“아니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던진 항의에 키에르트는 뻔뻔하게 답했다. 너무 뻔뻔해서 리시스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 그, 거, 어……. 엄마처럼……, 하신다고…….”
“하지만 우린 남녀관계잖아? 아내와, 남편.”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코끝을 톡 건드리며 분명하게 명시했다. 모든 말이 다 맞기는 했다. 하지만 입술에 키스까지 허락한 기억은 없는데?
“그래도, 그치만.”
“남편이니 완전히 엄마는 아니지. 엄마같이 해 줄 수는 있지만. 엄마에 남편 몫 하나 정도는 얹을 수 있잖아?”
꽤 설득력 있었다. 리시스는 혼란스러웠다. 눈동자가 이리저리로 마구 굴렀다. 그걸 코앞에서 지켜보던 키에르트는 다시 한번 입술을 부딪쳤다. 아, 해갈이 되었다. 달고 상쾌했다.
“싫어?”
“시, 싫은 건 아니지만……. 싫은데.”
“싫은 거야, 싫지 않은 거야?”
리시스는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었다. 키에르트의 말은 논리적으로 오류가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건 아닌데?’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분명히 ‘아무’ 남자랑은 손도 잡으면 안 된다. 그런데 키에르트는 ‘아무’ 남자가 아니었다. 남편이었다. 그러면 해도 되는 남자기는 한데, 이게 맞나? 리시스의 머릿속은 난장판이 되었다.
“모르겠어요…….”
스스로도 모르겠다. 좋고 싫고 단어의 의미조차도 잊어버릴 것 같다. 리시스는 울상이 되어 키에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큭.’
키에르트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코앞에서 리시스의 울먹울먹 젖은 눈이 동그랗게 올려다보는 걸 견디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심장이 지끈거리다 못해 아팠다.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고양이나 강아지 새끼를 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보들보들한 털에 코를 파묻고 마음껏 쪽쪽거리고 싶은 충동. 그것과 마찬가지로 저 물기어린 눈두덩이에, 동그란 뺨에, 통통한 입술에 마음껏 입술을 문대고 싶다.
“모를 땐 한 번 더 해보면 알지 않겠나?”
“……그러려나요……?”
키에르트의 제안에 리시스가 머뭇머뭇하면서도 끌려왔다.
“암, 그렇고말고.”
적군이 혼란에 빠졌을 때엔 밀어붙여야 한다. 키에르트는 훌륭한 전략가였다. 리시스가 더 깊이 고민하기 전에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흡……!”
이번에는 더 길었다. 꼭 다문 입술을 마주대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도 과했다. 입술에 준 힘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두 입술이 꽉 닿았다. 이러다가는 입술이 입술을 파고들 것 같았다. 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고 어깨를 움츠렸다.
‘어떡해! 앨린 말이 맞나 봐!’
진짜로 뇌가 폭약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눈앞에서 펑펑 색색의 폭발이 일어났다. 눈앞이 빙빙 돌고 귓가에서 팡파르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펑펑 소리가 아무튼 펑펑했다. 이대로 더 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달려왔다.
“잠, 잠깐!”
“……왜?”
그러나 멈출 수 있는 시점을 지났다. 겨우 가슴을 밀어 잠깐 떼어내는 데 성공했어도 키에르트는 맹렬하게 밀어붙였다.
“흡! 잠……!”
키에르트는 잠깐이라는 말을 다 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쪽, 쪼옥, 쪽. 쉼없이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리시스의 머릿속은 펑펑 터져나갔다.
“사, 살려주세요!”
결국 견디지 못한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입술을 두 손으로 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사납게 다시 따라붙던 키에르트가 한 박자 멈췄다. 놀라서는 아니고 웃음을 참느라였다.
“누가 죽인대?”
“죽을 것 같아요!”
“……진짜?”
리시스는 생명의 위기였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은 키에르트는 기뻐 보였다. 그 모습에 리시스는 졸도할 것 같았다. 그만 하라는 소린데요!
“진짜 죽는지 안 죽는지, 한 번 더 해 보면…….”
“죽어요!”
두 번은 안 먹혔다. 리시스의 노려보는 눈에 키에르트는 물러났다. 리시스는 끝까지 경계하며 자신의 입술을 두 손으로 꽁꽁 틀어막았다. 키에르트는 일어나는 대신 리시스를 안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렸다. 자연히 옆으로 마주보고 눕게 되었다. 키에르트의 팔을 베고, 품에 안긴, 늘 자던 모습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누웠는데도 평소같지 않았다. 품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맘편히 있지도 못했다. 키에르트는 안절부절못하는 리시스를 빤히 쳐다보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자신 때문에 동동거리는 것이 뿌듯했다. 만족감과 더 키스하고 싶다는 아쉬움이 동시에 샘솟았다. 딱 한 번만 더 할까? 말까? 그러나 리시스가 두 손으로 입술을 꽁꽁 가리고 있었다. 키에르트는 앞일을 위해 현재를 양보하기로 했다.
“그래서, 해 보니 알겠나?”
“……예?”
경계하던 리시스는 입술이 아니라 질문이 날아와 잠시 당황했다. 뭐더라?
“싫은지, 안 싫은지.”
“……아.”
한 박자 늦게 머리가 돌았다. 이 화끈거리는 사태의 원인. 굿나잇 키스. 리시스는 뭔가 속은 기분에 키에르트의 가슴을 퍽 때렸다.
“윽.”
아무리 연약해도 전쟁터에서 구른 짬이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매서운 한 방에 키에르트는 미처 신음을 숨기지도 못했다. 키에르트의 신음을 들으면서도 리시스는 씩씩댔다.
“누가 굿나잇 키스를 열다섯 번을 해요!”
“……? 아? ……응?”
그거야? 키에르트는 맞은 김에 엄살이라도 부려보려다가 눈을 떴다.
“싫지는 않았어?”
“싫은 건 아닌 것 같아요.”
확실히 여러 번 해 보니 알 수 있었다. 싫었으면 ‘어이쿠우, 우리 공주님의 고운 손으로 만져 주시면 금방 나을 텐데.’ 하며 손을 주물럭거리던 병사의 코뼈를 부러뜨렸을 때와 같은 반응이 먼저 튀어나왔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주먹이 나가지 않았다는 건 싫을 정도까진 아니란 소리다. 그렇다고 하고 또 해도 좋은 건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도 배가 터지게 먹으면 물린다. 입술의 키스도 그랬다. 쪽 했을 때의 달콤한 폭발은 확실히 강력했지만 반복할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 뭔가가 연결될 것만 같은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다. 리시스가 보았던 빨간 서가의 책들. 인간이 이게 되나? 싶었던 굉장한 짓들로 연결될 것 같았다. 그것까진 아니지!
“굿나잇 키스까진 괜찮은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돼요.”
리시스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왜?”
키에르트는 뭘 잘했다고 억울한 듯 되물었다. 리시스는 눈과 목에 힘을 꽉 주었다.
“제 마음이에요.”
“…….”
설득할 수 없는 단호한 이유였다. 키에르트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원래 원했던 것도 입술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걸 채웠으니 만족할 수 있다. 볼수록 탐나던 리시스의 빨갛고 통통한 입술. 건드리면 톡 터질 것 같은, 베어물면 단맛이 뭉클하게 배어 올라올 것 같던 그 입술 맛을 드디어 보았다. 실제로 단맛이 나지는 않았지만 독주를 한 사발 들이켠 것처럼 눈앞이 아찔했다. 한 잔 마시면 두 잔이 떠오르는 술의 독성처럼, 리시스의 입술도 중독성이 상당했다. 여차하면 빠져들어 제정신 못 차릴 것 같았다. 경계하고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조심할 생각이 안 드는 걸 보면……, 이미 중독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굿나잇 키스도 했으니 얼른 자요.”
리시스는 키에르트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그런다고 잠이 오겠나 싶지만 손바닥의 보드라운 감촉이 마음에 들어 키에르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님이 자라 명하시니 얼른 자야지. 이제 입술에 키스도 했으니 진짜 아내인 거다.
“휴…….”
키에르트가 얌전히 눈을 감자 리시스는 한참 뒤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숨을 몰아쉬었다. 당연하지만 키에르트도 깨어 있었다. 리시스의 명에 따라 최선을 다해 자는 척을 하는 중이었다. 리시스는 금방 잠들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기척을 숨기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품안에서 그러는데 키에르트도 잠이 올 리 없었다. 손가락만 한 새가 손바닥에서 포르릉거려도 잠들 수 없다. 새보다 큰 리시스가 품안에서 사부작거리는데 잠이 올 리가. 더구나 오늘따라 청초하게 꾸민 리시스의 몸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퐁퐁 올라왔다. 움직일 때마다 그 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 상황에 잠든 척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자자며.”
키에르트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익! 왜 안 주무세요?”
“그대가 자야 나도 자지.”
“……잘게요.”
리시스는 움직이지 않고 빳빳하게 몸을 굳혔다.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옆사람이 그러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하고 잠들 만큼 키에르트는 둔하지 않았다. 리시스가 못 자면 키에르트도 못 잔다. 내일 일정이 하나도 없으면 대충 뭉개도 되겠지만 행사가 가까워져서 일정이 빡빡했다. 어떻게든 리시스를 재워야 했다. 키에르트는 팔베개를 해 주지 않은 팔을 뻗어 리시스의 등을 감쌌다. 리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쉬……, 자야지.”
키에르트는 어색한 손길로 리시스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영 어색했다. 키에르트는 하룻밤 재우는 것보다 영원히 재우는 걸 더 잘했다. 황태자로 태어나 황제로 성장한 사람이 누군가를 재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수면에 방해가 돼서 거슬리면 치워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암살자가 숙면을 방해하면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리시스를 죽여버릴 수는 없었다. 키에르트는 최선을 다해 리시스를 토닥였다. 리시스는 얌전히 토닥거림을 받았지만 키에르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흠칫흠칫 몸은 더욱 굳어만 갔다.
“……이게 아닌가?”
키에르트는 혹시 자신의 손에서 자신도 모르는 살기가 묻어나나 싶어 물었다.
“어, 그, 이론적으로는 맞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지?”
“엄, 엄마가 이렇게 재워주긴 했었는데, 폐하는 엄마가 아니라 남편이니까…….”
이번 기회에 아주 확실히 선이 그어졌다. 키에르트가 원하던 바이기는 했는데, 왜 씁쓸한 결론이 하나씩 따라올까. 편하면서 남자로서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 되는 건 뜨거운 얼음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키에르트는 엄마가 아니라 남편으로서 아내를 재우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걸로 잠이 안 오면 이건?”
토닥토닥 말고 동물 쓰다듬듯이 등을 쓸어내렸다. 말이 흥분했을 때 진정시키는 방법이다. 티티도 가끔 이렇게 쓸어주면 호두를 먹다가 꾸벅꾸벅 졸고는 했다. 인간도 동물이니까.
“흐익!”
……역효과였다. 자신은 동물이 맞는 것 같은데 리시스는 아니었나 보다. 잠이 더 확 달아나 버린 리시스의 원망어린 눈초리에 키에르트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건 침실 창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