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망상과 현실 사이2022.02.27.
문 앞에 펼쳐진 꽃천지에 리시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빨간 책 예습을 통해 어마어마한 것을 각오하기는 했다. 하지만 문 앞부터 어마어마한 것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이건 뭐지?”
분명 그냥 복도였던 곳이 꽃길이 되어 있었다. 꽃이 벽과 천장까지 빼곡했다. 바닥에는 꽃잎이 수북이 쌓여 카펫을 이루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시는 길 즐거우시라며 명하셨습니다.”
제롬이 공손히 답했다. 마치 자신의 선물인 양 뿌듯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든 받으면 감동할 선물이기는 했다. 꽃다발도 거대할수록 감동적인데 꽃길을 만들어 주다니.
‘……그래도 적당히 해야지.’
어마어마한 꽃의 양에 감동이 오려다 질려서 도망갔다. 눈앞이 아찔해 심호흡을 했더니 가슴 가득 꽃향기가 찼다. 향기가 좋기는 한데 어지러움은 더해졌다.
‘이건 폐하의 각오인가!’
강하고 진한 선전포고였다. 리시스는 몸에 힘을 주어 꼿꼿이 버텨 섰다. 각오는 이미 끝났다. 도망치기엔 늦었다. 맞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용맹하게 맞서겠다! 알콩달콩한 합궁에 대처하는 태도로는 완전히 틀려먹었지만 리시스만 그걸 몰랐다.
“가지.”
리시스는 성큼 문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사박, 보드라운 꽃잎이 발아래 뭉개졌다. 낙엽을 밟는 것 같기도 하고 털이 긴 카펫을 밟는 것 같기도 했다. 낯선 감촉이 발밑을 간질였다.
‘으아.’
앞으로 키에르트와 할 모든 것들이 이렇게 낯설 것이다. 과감했던 첫 걸음과 달리 두 번째 걸음부터는 조심스러워졌다. 겁먹은 어린애처럼 살금살금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러나 뒤돌아 도망치지는 않았다. 두렵고 낯설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조금, 기대도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도착해 계십니다.”
리시스가 머물던 방에서 합궁을 할 방까지는 아주 가까웠다.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 정도의 짧은 거리였다. 문이 제발 멀어졌으면 빌었다. 그러나 문이 마중 나오듯 훌쩍 가까워졌다. 삼십 걸음쯤 되었을까? 그 삼십 걸음은 분명 꽃길이었는데 리시스는 가시밭길을 맨발로 건넌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딱딱딱딱딱…… 긴장으로 이가 마주칠 정도였다. 방까지 가는 길도 어마어마했는데 목적지는 얼마나 더 굉장할까. 대충 머릿속에서 비벼진 상상들은 제멋대로 괴물로 성장했다. 이제는 정말 도망갈 수 없다. 리시스는 결전에 임하는 장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들도 덩달아 비장하게 문을 열었다. 두둥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어?”
그러나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광경에 리시스는 맥빠진 소리를 흘렸다.
“왔나?”
키에르트가 문 앞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꽃길보다 더한 지옥도가 아니라 미소 짓고 있는 키에르트였다. 그것도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편한 차림의. 리시스는 떨던 것도 잊고 키에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아뇨…….”
뜻밖에도 키에르트의 옷차림은 엄청나지 않았다. 사실 예상하던 굉장한 상상 중 하나는 키에르트의 복장이었다. 빨간 책 속에서 ‘남성성’ 하면 꼭 빠지지 않는 묘사가 있었다.
‘……그의 근육은 갓 부푼 빵 같았다.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빵빵한 근육이 찢어발긴 셔츠 밑에서 흉흉한 존재감을 발산했다…….’
‘……느슨하게 걸친 셔츠가 어깨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부딪치면 멍이 들 것 같은 단단하고 각진 사각 어깨와, 그 밑으로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두툼한 팔뚝. 몸을 돌리자 얼핏 셔츠 위로 솟아오를 것 같은 등근육이 꿈틀거렸다…….’
같은, ‘단단한 육체’와 ‘허술한 복장’에 대한 묘사들 말이다. 물을 끼얹든가, 술을 끼얹든가 적셔놓는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키에르트의 모습은 그런 것들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편하고 느슨해 보였다. 늘 단정히 정리해서 고정시켰던 앞머리도 흐트러져서 이마를 가렸다. 살짝 짧아진 것도 같았다.
“머리……, 다듬으셨어요?”
“알아보는군.”
키에르트는 리시스의 발견을 반겼다.
“이러는 쪽이 좀 더 편해 보인다 해서.”
그 말까지 들으니 그런 느낌도 들었다. 살짝 낯설기는 했지만 황제 폐하가 아닌 평범한 청년 같았다. 그리고 리시스가 예상한 ‘남성성’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리시스는 긴장으로 잔뜩 오그라들었던 어깨를 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남성성과 키에르트가 생각한 남성성은 차이가 있던 모양이다. 안심이 됐다. 적어도 빨간 책에서 벌어진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신 거예요?”
“응.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헉…….”
편해진 마음에 떠올리던 미소가 사라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은 더 치명적이다. 꽃길보다 어마어마한 말이었다. 꾸며놓은 풍경이 아니라, 키에르트의 복장이 아니라, 키에르트의 말이 엄청났다. 이건 생각지 못했다.
“들어가지.”
리시스는 ‘왜 이러세요?’ 하는 눈빛으로 키에르트를 바라보았다. 키에르트는 채근하듯 손을 재차 내밀었다. 문 앞에 선 채로 밤을 새울 수는 없는 일이라 리시스는 얼떨떨하게 손을 겹쳤다. 키에르트가 어영부영하는 손을 힘주어 꽉 잡았다. 리시스는 흡! 하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잡힌 이상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키에르트의 각오가 보였다. 리시스는 호랑이 굴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으로 방에 들어섰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마음속의 절박한 비명이 튀어나오기 전, 키에르트는 손을 놓아주었다. 그대로 침대에 리시스를 던지고, 표범처럼 날렵하게 올라타는 상황을 생각하던 중이었다.
“……?”
현실은 테이블 앞에 마주앉은 키에르트와 자신의 모습이었다. 리시스는 아직도 멍한 정신을 챙기지 못했다. 키에르트는 다정하게 물었다.
“식사는 했나?”
“대충…….”
“대충 먹으면 안 되지. 왜? 입맛이 없었어?”
“긴장해서…….”
어리버리하게 솔직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예의상 대충 둘러대야 한다 생각을 하면서도 머리를 굴릴 여유가 없었다.
“우선 가볍게 배라도 채울까?”
“어……, 예…….”
말을 듣고 보니 배가 고픈 것도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리시스는 키에르트가 내미는 대로 꿀떡꿀떡 받아먹었다.
“천천히 꼭꼭 씹어먹어.”
“흐에? 에에.”
리시스는 그제야 자신이 씹지도 않고 삼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씹는 것을 까먹었다. 갑자기 목이 멨다. 켁켁거리자 키에르트가 얼른 음료가 든 잔을 내밀었다.
“감사해요.”
“안 뺏어먹으니까 전투적으로 먹지 않아도 돼.”
키에르트는 천천히 먹으라는 듯 손수 과일 껍질을 까서 작은 조각으로 쪼개주었다. 그걸 리시스의 접시에 하나씩 늘어놓는다. 쿠키도 조각조각 내고, 고기도 작은 조각으로 썰어놓았다. 리시스는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이렇게 키에르트가 주는 대로 먹으니 목이 메이지도 않았다. ……감동이었다. 자신의 식사를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챙겨주다니.
“이제 좀 살 만해?”
키에르트가 한결 부드러워진 리시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리시스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배가 차니 굳었던 몸과 마음도 풀어졌다. 일단 먹을 것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머릿속에 잔뜩 세워놓았던 망상의 성이 점점 더 모래성처럼 흘러내렸다. 키에르트도 그새 ‘남성성’에 대한 도전의식을 내려놓았을 수도 있다. 합궁일이니 굳이 그런 험한 짓을 하기보다는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마음을 돌렸을 수도 있지. 어쩌면 까먹었을 수도 있다.
“저, 저는 무서운 생각만 하고 왔는데……, 이제 마음이 놓여요.”
“무서운 생각?”
“각오하라고 하셨잖아요.”
“응, 그 각오는 계속 하고 있어야지.”
풀어지던 리시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아, 아직 끝난 것 아니에요?”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
순간 냉동된 리시스가 쨍하니 깨질 뻔했다.
“농담이야.”
“……네?”
키에르트는 냉동됐다, 해동됐다 하는, 봄철 생선 같은 리시스를 보며 픽 웃었다. 저렇게 긴장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하긴 뭘 하나. 하지만 리시스에게 끝까지 밝히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키에르트는 아직 작전 중이었다.
“먼저 하나 물어보지. 그대는 남성성을 대체 뭐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그건 말이죠.”
리시스는 이런 것이야말로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지 않는 합의만큼 중요했다. 왜냐면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일 수 있으니까.
“제가 생각한 남성성은!”
이하 생략된 표현은 키에르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리시스도 합의를 위해 큰 용기를 내어 말했다. 입으로 꺼내어 말하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이번에는 키에르트의 목이 충격으로 멨다.
“책에서요!”
키에르트가 읽었던 책과 분명 다른 책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키에르트와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영 다를 수가 없었다. 너무 충격적으로 지독해서 도저히 참고할 수 없었던 옆 서가의 빨간 책들이 떠올랐다. 키에르트는 이마를 짚었다.
“왜……, 하필 그런 걸 참고해서 분석한 거지?”
“그, 그냥……, 그게 눈에 들어와서……, 그게 보통인 것 같아서…….”
“보오토오옹?”
키에르트는 다시금 충격을 받았다.
“이건 나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네.”
“그대는 살해당하는 입장을 즐기는, 그런 종류의 성벽이 있는 건가?”
리시스는 미간을 모았다. 자신의 청각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키에르트의 좋은 목소리가 다 개소리로 들렸다. 멍멍멍, 멍멍, 멍멍멍!
“……웬 개소리세요?”
“그대가 굳이 그걸 원한다면 나는 들어 줄 용의가 있어.”
“……네?”
“완전히 죽이는 것까지는 곤란해도 반 죽이는 정도는…….”
부부간의 관계는 합의가 최우선이라 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굉장한 요구사항일지라도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리시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리시스가 털어놓은 ‘남성성’에 대한 고찰의 결과물은 가학과 피학이 난무하는, 살벌함이었다.
“아뇨, 거절합니다.”
리시스는 다급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자신이 필사적으로 했던 자료조사가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참이다. 전쟁에서는 웬만하면 틀리는 일이 없는데, 남녀관계는 웬만하지 않았다. 그래도 틀려서 다행이었다.
“제가 생각한 남성성과 폐하가 생각하신 남성성이 다른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것 같군.”
“그럼 폐하가 생각하고 준비하신 건 뭐예요?”
자신의 머릿속에 무럭무럭 자라던 그 망상대로만 아니면 웬만한 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시스의 물음에 키에르트는 설핏 웃었다. 이미 그의 작전은 진행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