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죽이는’ 황제 폐하2022.02.24.
책장들은 아예 웬만한 각오로는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듯 새빨간 색이었다. 책 등에도 빨간색, 표지에도 빨간색이 잔뜩 칠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책장들 옆에 분홍색 책장이 있었다. 예상하건대 분홍색 책들이 늘어서 있을 곳이었다.
“비었네?”
그러나 분홍색 책장은 비어 있었다. 빨간 책보다 분홍 책이 수위가 덜할 것이라고 당연히 예측할 수 있지 않은가. 그거라면 정신적으로도 조금 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은 분홍 책장을 바라보며 리시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 바다를 건너면 개울은 깡총이니까.”
먼저 뛰는 법을 배우면 기는 건 거저먹기일 것이다. 리시스는 숨을 들이마시고 빨간 책에 집중했다. ***
“폐하, 두 시까지 결재해 주셔야 하는 안건이…….”
“아아. 해야지.”
키에르트는 제롬의 재촉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다시 펜을 들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내용을 쫓아내는 데엔 시간이 걸렸다. 한참 서류에 집중하던 키에르트는 어렵게 결재 사인과 첨부하는 말을 붙인 뒤 다시 책을 들었다.
“재미있으십니까.”
“아니.”
키에르트는 전략 보고서를 읽는 듯 사뭇 진지했다. 그러나 책의 표지는 아무리 봐도 재미로 휙 읽어넘기게 생겼다. 뽀얀 핑크색 바탕에 난무하는 흰색, 빨간색 하트, 그 가운데에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힌 제목. 『그 아가씨가 침대에 누워버린 이유 -서른 전에 백 명이랑 사겨봄 지음』 제목과 어우러져 내용의 신뢰도를 높이는 필명까지. 아가씨들이 치명적인 매력에 홀랑 빠지게 한 즐거운 과정을 그렸을 법한 책이었다. 다만 책의 분야가 ‘소설’이었다. 신중하게 책장을 넘기고, 줄을 치고, 별표까지 그리며 읽을 분야는 아니었다.
“그 책에 공부할 점이 많은 모양입니다, 폐하?”
제롬은 노파심에 슬그머니 참견했다. 자신도 연애에 재주가 없으니 더 걱정이 되었다.
“음……, 뜻밖에 생각할 점이 많아.”
“어떤 겁니까.”
“남성성은 꼭 육체에서만 풍기는 것이 아닌 모양이야.”
“오……, 그럼 어디에서 풍깁니까?”
키에르트는 책에서 얻은 수많은 지식을 정리했다. 이걸 과연 한 번에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보는 흘러넘쳤다. 하지만 키에르트가 못할 것은 없었다. ‘진짜 이것뿐?’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당연한 것들이 많았다. 가령 아름답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만날 때마다 꽃 선물하기.
‘이미 하는 거고. 아, 이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미 하고 있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상대가 완벽하게 만족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면 더욱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 키에르트는 밑줄을 그었다. 울고 있을 때 다정하게 위로하기.
‘……우나?’
키에르트는 멈칫했다. 리시스의 눈물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머릿속을 많이 채우고 있는 것은 환하게 피어나는 꽃 같은 미소였다.
‘아, 있긴 있었지.’
신방에서 손대지 말라고. 기둥을 붙잡고 자신을 괴한 보듯 보며 펑펑 울었다. 키에르트의 얼굴이 와그작 찌그러졌다. 리시스가 자신에게 다시 그런 시선을 보내며 운다고 생각하니 아주 불쾌했다. 다정하게 위로하기. 밑줄 쫙, 별 세 개, 그걸로도 모자라 색연필로 진하게 칠했다. 그 밑으로도 웬만해선 다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 이어졌다.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는 것들이었다. 그중 간혹 의외의 것도 있었다. 먹을 것 잘 챙기기, 잘 먹여주기.
‘어머! 이건 내가 늘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가게의 슈크림 도넛!’
‘지나가다 생각나서.’
‘지금 먹어도 돼?’
‘당연하지. 천천히 먹어. 다 네 거야.’
우걱우걱 먹던 여주인공의 뺨에 크림이 묻는다. 그걸 귀엽게 쳐다보던 남주인공은 그것을 떼어 자신의 입으로 쏙 가져가고. 여주인공은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남주인공은 자상한 미소와 함께 목이 메지 않게 음료를 내밀어 준다.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을 몽롱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두 사람의 눈이 맞는다.
‘맛있어?’
‘응…….’
‘나도 맛봐도 돼?’
‘……응…….’
입술이 점점 가까워진다.
“……!”
키에르트는 화들짝 놀라 책을 덮었다. 저도 모르게 리시스의 얼굴을 여주인공의 얼굴에 대입해 상상해 버렸다. 가까워지는 리시스의 얼굴, 그 입술. 리시스의 입술은 어떤 느낌일까.
멍하니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던 키에르트를 심상치 않게 바라보던 제롬이 조심스레 여쭸다.
“입술이 건조하십니까?”
“뭐? 아니, 부드러…….”
리시스의 입술이 부드러울 것 같다고. ……는 제롬에게 해선 안 될 이야기였다. 제롬은 당황스럽게 눈알을 굴리다 고개를 숙였다.
“예……, 입술이……, 부드러우시군요, 폐하.”
“…….”
이게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키에르트는 자신의 체면을 잠시 내려놓고 작전에 다시 집중했다. 음식을 챙겨준다는 건 생각지 못했던 꿀팁이었다. 키에르트는 별을 두 개, 세 개 힘주어 그렸다. 생각해 보면 리시스가 키에르트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었던 적이 더 많았다. 어차피 식사는 시종들이 챙기니 키에르트가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리시스는 식기를 못 쓰는 어린애가 아니다. 자신의 식사는 스스로 챙길 줄 아는 성인이니 신경을 쓸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것에서 오히려 매력을 느낄 수도 있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황후가 내게 고기를 챙겨줬었지.’
리시스의 티파티 때였다. 그때는 티파티의 주인이니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때 챙김을 받았던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애 취급 받는 것이 기분 나쁜 일이 아니라니.’
키에르트는 태어난 순간부터 애였던 적이 없었다. 황태자는 비범해야 했다. 애면 안 되었다. 온 세상의 사랑과 관심, 존경까지도 받았기에 그만큼 늠름하고 완벽해야 했다. 뭐든 잘해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인생의 의무였다. ‘애 같다’는 말은 키에르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기쁠 수도 있었다. 리시스 덕분에 몰랐던 세상의 한 가지를 더 배우게 되었다. 키에르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책에 진한 표시를 더했다. 그걸 지켜보는 제롬의 마음은 복잡하게 꼬여갔다. 단지 정략결혼의 상대, 언제 내쳐질지 모르는 황후의 관심을 끌어보자고 하는 일에 너무 집중하고 있다.
“그런데 폐하, 너무 열의를 올리시는 것 아닙니까?”
키에르트가 무슨 소리냐는 듯 제롬을 빤히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께 남성성을 어필하는 정도면 이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롬은 밀려 있는 서류와, 그 옆의 책무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짜고짜 던진 ‘여성에게 남성으로서 보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그 답은 허멀 후작이 주었다.
‘잘 모를 땐 남 따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고는 책 한 권을 추천했다. 그 책은 적당히 교양과 정도가 있었다. 기왕이면 많이 아는 것이 좋다며 서가 하나를 옮겨 온 키에르트가 정도가 없는 것이지. 이쯤 되면 전쟁이었다. 키에르트가 한 번을 못 이겨봤던 리시스와의 전쟁. *** 기다렸고, 한편으로 절대 기다리지 않았던 합궁의 밤이 결국 오고 말았다. 리시스는 비장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미 마음의 각오는 끝내 놓았다. 어차피 언젠가 올 일이면 의연하게 받아들이자. 가넷이 거울 앞에 앉은 리시스의 뒤로 다가왔다.
“황제 폐하께서 남자로서 각오를 보여주신다 하셨다고요?”
“그……, 런데?”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가넷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리시스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뭔가를 보여준다 한 건 황제 폐하인데 왜 당신이 각오를 다져?
“그렇다면 황후 폐하께서도 그에 걸맞는 준비를 하시는 것이 제대로 된 답례 아니겠습니까.”
리시스는 선뜻 그러겠다 답하지 못했다. 답례로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래야겠지만, 가넷이 보이는 의욕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가넷! 실력을 제대로 보일 기회를 주십시오!”
시골 귀족 아가씨에서 갑자기 황후 폐하의 시중으로 급 승진을 해버린 가넷의 의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실력을 보여 주겠다는 의지로 불탔다. 황후 폐하에게 채용되기는 했지만 아직 실력을 제대로 보일 기회가 없었다. 이때, 합궁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의욕으로 활활 불타는 가넷의 옆에서 앨린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오우, 아냐, 아냐, 아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황제 폐하께서는 과하게 힘 들어간 것 안 좋아하세요.”
합방을 한 번 겪어 본 앨린은 경력자의 자신감을 보였다. 한 번의 확실한 실패를 겪었으니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럼 꾸민 듯 안 꾸민 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저절로 눈이 가게 꾸미면 되는 겁니까?”
가넷이 스스로의 실력에 가진 자신감도 상당했다. 말로만 들어서는 꽤 그럴싸했다. 앨린과 리시스도 단박에 ‘아니’라 하지 못하고 동공만 흔들렸다.
“그럼 일단 맡겨 주시겠습니까?”
“너, 너무 예쁘게 하면 안 돼…….”
리시스는 소극적으로 경고했다.
“왜 안 됩니까?”
“너무 예쁘면……, 폐하께서 좀 정신을 놓으시더라고.”
“좋은 것 아닙니까?”
“그, 그럼 이상해지셔…….”
가넷의 면접을 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단지 부끄럽거나 예뻐서 좋게 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디 한 군데가 망가진 사람 같았다. 그러다 홱 돌아버릴 것처럼 무서울 정도였다. 뭔가를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그런데, 작정하고 뭔가를 하려다가 그렇게 되어버리면? 뒷감당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 진짜 내가 죽을지도 몰라.”
가넷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밤에 ‘죽이시는’ 황제 폐하라니. 너무 완벽하신 것 아닌가. 그러나 보아하니 황후 폐하는 아직 그 ‘죽이는’ 맛을 잘 모르시는 모양이다.
“예에,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가넷은 손목을 풀며 자세를 잡았다. *** 리시스는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를 원했으나 그건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키에르트는 아예 합궁을 위해 방을 따로 마련하도록 명을 내렸다. 준비한 방은 같은 건물 안에 있었다. 단장을 방에서 마치고 슬리퍼만 신고도 갈 수 있었다. 리시스는 거울 속의 자신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가넷은 주문대로 평소의 맨얼굴보다는 촉촉하고 은은하게 물든 모습을 만들어냈다. 막 세수를 마쳤을 때의 발그레해진 뺨과 입술 같은 색조, 머리를 감고 반쯤 말렸을 때의 촉촉하고 보들거리는 머리카락. 인위적으로 신경 쓴 부분은 없어 보이지만 보다보면 한 번 더 눈이 갔다. 얼핏 보면 꾸몄는지 안 꾸몄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저번처럼 서로 민망한 분위기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리시스는 숨을 가라앉히며 문 앞에 섰다. 기다리고 있던 시종들이 양 옆으로 활짝 문을 열었다.
“헉.”
그러나 시작부터 문제였다.